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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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 목사
당교회사랑의교회
노회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동서울노회
직책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후임자오정현
성직
목회총회 신학교(現 총신대학교) 목사 안수
개인정보
출생이름옥한흠, 호는 은보 (恩步)
출생1938년 12월 5일
일제 강점기의 기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현 거제시)
타계2010년 9월 2일(73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교파장로교(합동)
거주지서울특별시
부모아버지 옥약실, 어머니 이희순
배우자김영순 사모
가족아들 옥성호, 옥승훈, 옥성수
전직사랑의교회 담임목사 (1978년 ~ 2003년)
사랑의교회 원로목사 (2003년 ~ 2010년)
학력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명예박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 명예박사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대학원 목회학 박사
칼빈 신학교대학원 신학 석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성균관대학교 영문학 학사
사목표어한없이 흠이 많은 옥.[1]

옥한흠(玉漢欽, 1938년 12월 5일 ~ 2010년 9월 2일)은 대한민국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 개신교 목사로, 사랑의교회 설립자이다. 본관은 의령이며, 호는 은보(恩步)이다.

성균관대학교 문리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이후 미국 미시간주 칼빈 신학교[2]의 신학석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목회학 박사 및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 성도교회에서 대학생들에게 성경공부를 지도하면서 제자훈련의 기초를 쌓았다. 귀국후 그는 1978년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고 2003년까지 담임목사로 활동했으며, 교회에 '평신도를 깨운다' 제자훈련을 도입해 국내외의 교회에 제자훈련 운동을 확산시켰다. 1998년부터 개신교 목회자들의 연합 단체인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를 창립해 활동했다. 생전에 그가 집필한 교회 중심의 제자훈련 교과서인 『평신도를 깨운다』는 100쇄를 넘긴 스테디셀러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11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생애와 사역[편집]

거제도 믿음의 집안에서 출생 1938년~1957년, 10대

1938년 12월 5일 경상남도 거제도 산골마을에서 아버지 옥약실과 어머니 이희순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사경회란 사경회는 다 쫓아다녔고 거제일운초등학교 3학년 때 구원의 감격을 경험했다. 거제 지세포 대광중학교 시절 수련회에서 또 한 번 십자가의 강력한 은혜를 체험했다.

주일학교를 지도하다 1958년~1960년, 20대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나, 신체검사에서 ‘고혈압’ 이라는 판정을 받아 시험도 보기 전에 자격이 박탈됐다. 다시 도전하기 위해 재수를 하던 그는 증조부가 세웠던 삼거리교회에서 주일학교 지도를 하면서 그만의 열정으로 주일학교를 부흥시켰다.

성균관대 · 총신 신대원 입학과 결혼 1961년~1968년, 20대

1961년 12월 군에 입대해 낮에는 근무하고 밤이면 입시준비를 했다. 1962년 당시 야간 대학으로는 가장 인기가 높았던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63년 폐결핵 판정을 받고 대학 2년간의 처절한 투병 생활 끝에 완치된 그는 김영순 사모를 만나 1965년 4월, 28세의 나이에 결혼했다. 1968년 그는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총신 신대원과 성도교회 부교역자 시절 1968년~1972년, 30대 초반

총신 신대원 재학시절 서울 은평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 그는 100명이었던 주일학교를 500명까지 성장시켰다. 그 후 1970년 김희보 목사의 요청으로 성도교회 사역자로 부임하고 이듬 해 2월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성도교회(담임 김성환 목사)에서 그는 그의 인생의 분수령이 된 대학부를 맡았고 1972년 35세에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수도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제자훈련의 모태, 성도교회 대학부 1971년~1975년, 30대 중반

옥 목사는 대학생들이 기성 교회에서 빠져나가 선교단체로 모이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다. 그러다 성도교회 대학부에 막 올라온 방선기로부터 네비게이토선교회에서 훈련받는 상황을 보고받고는 선교단체에는 있지만, 기성 교회에는 없는 세 가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복음, 훈련, 비전이었다. 대학생 12명과 함께 성도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한 그는 3M(Campus Ministry, Business Ministry, World Ministry)의 비전을 갖고,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펼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주문했다. 대학부 학생들이 방선기(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박성수, 한정국, 박성남, 한인권, 이인호, 황태연, 정세열, 한병혁, 김강태(포항공과대학교), 정문렬(서강대), 김신, 손인문, 김복만, 안명준(평택대), 고문규(건양대), 장경(단국대), 홍원표(한밭대), 권영식(동국대), 안덕수, 백상조, 권상철등 약 20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곳에서 박사와 교수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유학, 제자훈련의 신학적 검증의 길국 1975년~1978년, 30대 후반

제자훈련에 대한 신학적 논리와 성격적 체계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던 옥 목사는 1975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칼빈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가난했던 그는 가족과 함께 유학을 떠날 수 없어 아내와 자식들을 진영의 처가로 보내며 또다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때 그는 미시간 주에 소재한 그랜드 레피즈 한인교회에서 잠시 목회를 했다.

한스 큉의 『교회론』 과 운명적 만남 1978년, 41세

1977년 5월 칼빈 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자리를 옮겨 목회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그곳 구내 서점에서 한스큉의 『교회론』을 발견한 옥 목사는 왜 제자훈련에 미쳐야 하는지, 평신도를 왜 제자로 깨워야 하는지 확고한 신학적 답을 얻었고, 이후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 전 그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제자훈련의 산실인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네비게이토선교회 본부를 방문했다.

강남은평교회 개척과 사랑의교회로의 개칭 1978년~1981년, 40대 초반

옥 목사는 기성 교회로 가고 싶은 유혹을 끊기 위해 1978년 6월 귀국하자마자 서둘러 그해 7월 23일 주일 오후 3시, 강남 서초동 유스호스텔 앞 3층 짜리 건물 2층에서 강남은평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1981년 9월 강남은평교회는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라는 말씀 안에 내포된 십자가 의미를 좋아했던 그는 ‘사랑’이란 단어에 ‘의’라는 소유격을 붙여 그만의 목회철학을 드러냈다.

제자훈련에 미치다 1978년~1981년, 40대 초반

사랑의교회에서 시작한 첫 제자반은 김영순 사모 혼자만 남고 실패로 끝났다. 부유하고 신앙 연수만 오래된 이들에게 원색적인 말씀으로 도전하니 훈련생들은 얼굴이 빨개지며 쩔쩔매기 일쑤였다. 그러나 다시 시작한 여자 제자반은 영적으로 큰 변화를 맛보았다. 옥 목사는 교회 밖의 모든 모임이나 집회 요청을 거절하고 제자훈련에 완전히 집중했다. 여자 제자반이 성공하자, 1979년 남자 제자반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사랑의교회만의 브랜드들 1982~1984, 40대 중반

옥 목사는 구역장을 순장, 구역예배를 다락방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소그룹 리더인 순장은 제자훈련과 사역훈련 2년을 마친 후에 세워졌다. 또한 그는 주일예배를 통해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설교에 생명을 걸었고, 주기도문송, 세례자 간증을 활용하여 성도들이 예배 시간에 복음을 체험하도록했다. 1982년 10월 사랑의교회는 제1회 사랑의 생활화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는 이후 ‘대각성전도집회’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기존 신자에게는 대각성을, 태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합신에서 강의 1979년~1985년, 40대 중반

1979년 예장 합동교단이 신학 교권문제로 주류와 비주류(개혁, 지금의 합신)로 분열되었는데, 이때 그는 개혁교단에 동참했다. 그는 남서울교회에서 설립예배를 드린 합동신학교 (이후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쳤다. 처음 강의에는 지나친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학생들로부터 신학적 이견으로 상처를 받았지만 차차 그의 신학의 강조인 제자화 신학이 설득력을 얻어갔다.

카타콤 같은 지하 교회, 사랑의교회 건축 1983년~1985년, 40대 중반

옥 목사의 탁월한 설교와 제자훈련을 통해 배출된 순장들의 전도로 교인이 500여 명으로 증가하자 교회건축을 결의하고, 1985년 1월, 성전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해 서울시 건축상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소음을 없애기 위해 카타콤처럼 지하로 예배실을 만든 점과 건축비가 모자라 가장 흠이 많은 불량품 적벽돌로 지은 것이 오히려 경건한 운치를 자아냈다. 십자가 대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자를 강대상 앞에 붙였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평신도를 깨운다』 출간 1984년, 47세

1984년 6월 옥 목사는 『평신도를 깨운다』를 출간했다. 제자훈련 목회를 시작한 지 5년이 되자 제자훈련에 대한 중간결산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3개월간 제자훈련 자료들을 모은 후, 1984년 제자훈련 겨울방학을 이용해 용인 벧엘수양관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원고를 집필했으며, 7주 만에 원고를 탈고했다. 2010년 9월 현재까지 103쇄가 인쇄됐다. 이 책은 현재까지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중국어, 벵골어, 에스토니아어 등 8개 국어로 번역됐다.

CAL세미나, 목회자를 깨워 평신도를 세우다 1986년, 49세

『평신도를 깨운다』의 책 발간은 CAL세미나 개최로 이어졌다. 책을 읽은 목회자들로부터 제자훈련 세미나 요청이 쇄도하자 1986년 3월 세미나실(현재 국제제자훈련원)을 설립하고, 1986년 3월 제1기 ‘평신도를깨운다 제자훈련지도사세미나’ (CAL세미나)를 사랑의교회에서 개최했다.

안식년과 카메라, 로마서 강해설교로 살아나다 1989년~1992년, 50대 중반

그는 일주일에 제자반, 사역반 3개, 순장반 2회, 교역자 훈련, 주일설교 3회, 또 1년 3차례 돌아오는 CAL세미나 인도에 자신의 모든 진액을 쏟았다. 급기야 그는 1989년에 탈진하여 개척12년만에 하와이에서 1년간 안식년을 가져야 했다. 이때 이후로 그는 모든 훈련을 부교역자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붙잡는 것이 로마서 강해설교였다. 당시 의사의 권유로 시작한 취미 생활은 사진찍기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찍은 그의 작품들은 몇 권의 사진집으로 묶였다.

한국교회의 갱신과 일치를 위해 교갱협 · 한목협 창립 1989~1998년, 50대

1989년부터 16년간 그는 한국오엠국제선교회 이사장을 맡아 한국 젊은이들을 훈련하고 선교사로 파송하는데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1992년 9월에는 소망교회와 협력해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세워 중국 내 우수한 인재들을 배출했다. 한편, 1996년 3월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교갱협)를 창립해 합동교단 내 금권선거를 뿌리 뽑고 총회 제비뽑기 선거제도를 정착시켰다. 또한 평소 하나 되는 한국 교회를 주장했던 그는 1998년 11월 한국기독교목회자 협의회(한목협)를 창립해 한국 교회 연합과 일치를 도모하며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했다.

목회 일선에서 조기 은퇴를 하기로 결심한 옥한흠 목사는 2003년 5월 사랑의교회 공동의회를 통해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미국에서 사역하던 오정현 목사를 청빙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이임 예배를 거쳐 옥한흠 목사는 담임 목사직에서 물러났다.

2010년 9월 2일 아침, 그는 지병으로 인해 향년 73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함께보기[편집]

저서[편집]

  • <광인 : 옥한흠을 말하다> (국제제자훈련원(DMI) 2010)
  • <이보다 좋은 복이 없다> (국제제자훈련원(DMI) 2009)
  • <제자훈련 열정 40년> (국제제자훈련원(DMI) 2009)
  • <안아주심> (국제제자훈련원(DMI) 2007)
  • <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국제제자훈련원 2004)
  • <길 : 평신도를 위한 제자훈련 입문> (국제제자훈련원(DMI) 2003)
  •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개정판)> (국제제자훈련원(DMI) 2002)
  • <하늘행복으로 살아가는 작은 예수> (국제제자훈련원 2001)
  • <평신도를 깨운다> (국제제자훈련원 1984)

참조[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