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Theantares/김일성 연보 (金日成 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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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1912년 ~ 1919년)[편집]


  • 1912년 4월 15일[1]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리 (平壤府 龍山面 下里)[2] 칠골의 외가에서 김형직(金亨稷, 1894~1926)강반석(康盤石, 1892~1932)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3]
    생가로 알려진 만경대(萬景臺) 고향집은 조부모 김보현(金輔鉉, 1871~1955)과 이보익(李寶益, 1876~1959)이 살던 집이며,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평양부 고순화면 남동(平壤府 古順和面 南洞)[4]에 속함.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들 지역은 평양부에서 분리하여 신설된 대동군에 속하게 되어[5] 주소가 친가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古平面 南里) 만경대, 외가는 대동군 용산면 하리(大同郡 龍山面 下里) 칠골로 바뀜.
    오늘날 칠골과 만경대는 평양직할시(平壤直轄市) 만경대구역에 편입되어 있다.
    외조부 강돈욱(康敦煜, 1871 ~ 1943)과 모친 강반석이 다니던 칠골교회는 김일성의 지시로 1992년에 복원했다고 함.[6][7]
    (어린 시절 칠골 외가와 만경대 친가를 오가며 살았을 가능성은 있다.) 북한은 김형직이 그의 이름을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의미로 성주(成柱)라고 지었다고 주장하고, 한국에서도 대체로 이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 그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일 가능성이 크고,[8] 김성주(金誠柱)로 적은 문헌도 있다.[9][10]

  • 1916년 봄 : 김형직은 평양 숭실중학교를 중퇴한후 만경대에 있는 순화학교 교사를 하였다. 그후 1916년 봄에 평안남도 강동군 고읍면 동삼리(江東郡古邑面東三里) 내동부락(현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에 가서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11][12][13][14]
    (평안남도 강동군 고읍면 동삼리(江東郡古邑面東三里) / 평양시 강동군 역사 :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의 향교리와 봉진면 동삼1리 동삼2리를 1952년에 병합하여 향교리로 하였고, 1967년에 향교리를 봉화리로 개칭함.)

  • 1917년 3월 23일 : 장일환(張日煥, 1886 ~ 1918.04.09) 등이 평양에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조직. 회원명단에 김형직(金亨稷)의 이름이 들어 있다.[15][16]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二 > 秘密結社發見處分ノ件 (1918년 02월 18일)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秘密結社發見處分ノ件(平安南道警務部長報告要旨)
    今回在外不平鮮人ト通謀シ國權恢復ヲ企劃セル「朝鮮國民會」ナル秘密結社ヲ發見シ關係者ヲ檢擧シ刑事訴追ニ附シタリ其ノ顚末左ノ如シ
    一. 會員氏名
    本籍 平安南道平壤府黃金町 / 住所 同 櫻町 / 會長 張日煥 當三十二年
    ....
    本籍 平安南道大同郡古平面南里 / 住所 平安南道江東郡古邑面東三里 / 書堂敎師 金亨稷 當三十四年


    북한에서는 회장 장일환(張日煥)의 이름은 감추고, 조선국민회를 김형직 조직한 것으로 조작하여 우상화에 이용하고 있다.[17]

  • 1918년 2월 18일 : 김형직이 「조선국민회」 건으로 일경에 의해 검거돼 형사소추를 받음.[16]
    김형직은 이 해에 평북 중강진으로 이주함.[14][18]

  • 1925-05-05 일자 일본 외무성(日本 外務省) 간도 총영사(間島總領事) 기록 : 김형직(金亨稷)이 장백현 8도구에 거주하며 재산이 1,000원이라함. 1919년 3.1운동의 주모자였으며, 체포를 피해 그해 5월에 강건너 대안(對岸)으로 달아났다고 함.
  • 1919년 : 김형직은 1919년의 3·1운동때 평북 중강진에서 운동의 선두에 섰던 것이 일본기록에 나온다.[19]

    김일성이 어린 나이에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는 것은 거짓이다.[18][20] 그는 당시 부친이 살던 중강진 아닌 칠골 외가에 있었으며, 그 무렵 김일성 장군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21]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新文化社, 1974) p.32》

    옛 「김일성장군」의 실재(實在)와 또 이북(以北)의 김성주(金聖柱)가 어릴 때부터 옛 「김일성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하는 것을 증언(證言)해 주는 사람으로 현응수(玄應洙, 1892년생. 市內 금호동 거주)씨가 있다. 玄씨는 “1919년 2월 15일에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하리(平南 大同郡 龍山面 下里) 칠골(七谷)에 있는 창덕학교(彰德學校)에 교원(敎員)으로 부임했다. 당시(當時) 교장(校長)은 김성주(金聖柱)의 외조부(外祖父)인 강돈욱(康敦煜, 1871 ~ 1943) 장로(長老)였으며 김성주(金聖柱)는 아직 학교(學校)에도 가기 전(前)이었는데 그 때는 외가(外家)에 와서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以北의 金聖柱傳에도 그때 外家에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때 우리는 만주(滿洲)에서 활약(活躍)하고 있는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자주 듣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가 김일성 장군의 활약(活躍)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에 찬 마음으로 주고 받고 있을 때 김성주(金聖柱)는 외할아버지인 강장로(康長老) 곁에 앉아 있곤 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라고 현옹(玄翁)은 필자(筆者)에게 증언해 주었던 것이다.

    1916년 평안남도 사립학교 교원 시험 합격자에 현응수(玄應洙)가 있으므로,[22] 그의 증언은 믿을만 하다. 김성주 본인도 어릴 때부터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그가 해방 후 스스로 자칭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 1919년 5월: 일제기록에 의하면 김형직은 1919년 5월경에 평북 중강진으로부터 압록강 대안인 만주 임강(臨江)으로 이주하였다.[23][24] 1919년 5월 단오에는 김일성은 중강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부모를 따라 임강으로 갔다.
    <중강진과 임강시(临江市, 병음: Línjiāng Shì) 구글 지도>

    김형직 일가가 이주한 임강은 임강현(臨江縣)의 현소재지(縣所在地)였는데 모아산(帽兒山)이라고도 불렀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현공서(縣公署)에서 압록강변 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있었던 정미소 옆에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김형직은 여기에 순천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방안에는 가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을 걸었다.[25] 당시 만주는 무질서한 때라 무면허 의사에 대한 단속도 없었던 것 같음. 김형직이 아편 밀매에 관여하여 큰 돈을 벌게 되었다는 주장이 많다.

    한편 당시 김형직은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이라는 단체에 가입해 있었는데, 단장은 김호(金虎, 1892 ~ 1929)였다.[26] 김호(金虎)[일명 : 김봉산(金鳳山)]는 정의부 소속 양서봉(梁瑞鳳) 직속의 부하 중 가장 영맹하다고 이름났었는데, 1929년 11월 9일 일본 경찰에 사살당했다.[27], 김일성의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 1890~1942)도 백산무사단 단원이었는데, 군자금 모집차 평양에 잠입했다가 1921년 4월 24일 일경에 체포되었다.[23][28] 김형직과 백산무사단, 김호 등에 대해서는 허동찬(許東粲, 1932~ )의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에 자세히 나옴.[29]

수학기 (1920년 봄 ~ 1929년 여름)[편집]


  • 1920년 봄 : 중국인 학교인 임강 소학교(臨江小學校, 즉 모아산현립소학교)에 입학.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함. 모아산현립소학교(帽兒山縣立小學校)는 1927년 당시 한인을 박해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반동 소학교였다.[25]

  • 1921년 6월 28일 : 자유시 참변이 일어남.[30]

  • 1921년 여름 : 김형직은 임강 동쪽에 있는 장백현(長白縣) 팔도구(八道溝)로 다시 이주하게 되는데 임강에 있을 때와 같이 광제의원이란 간판으로 한방의를 했다.[31]

    압록강과 팔도구하(八道溝河)의 합수목에 있는 마을에 광제의원을 차리게 되었다. 김일성은 1921년 여름에 이곳 팔도구소학교(장백현립제칠분교) 2학년에 전학했다고 한다.

    장백현의 동남단에 현치인 장일부가 있는데 거기에 현립제1분교가 있었고 거기에서 압록강을 따라 대체로 서쪽 하류로 나가면서 제3·제4 등 분교가 설치되어 임강현경인 팔도구에 제7분교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측에서는 이 학교들을 정몽학교로도 불러 팔도구소학교는 제칠정몽학교라 하였다.
    팔도구의 제7정몽학교는 1917년에 설치되었다.그 12년 후가 되는 1929년의 통계에 의하면 귀화한인인 교원이 1명만 있었고 아동은 8명 밖에 되지 않았다.당시는 4년제 소학교였으므로 단순계산으로는 한 학년에 2명 꼴이었다. 이 학교는 한인을 귀화시켜 중국에 정착하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은 회고록 : 「내가 다니는 팔도구소학교는 4년제 중국인학교였는데 수업도 중국말로 하고 취급하는 과목도 중국의 것이었다. 시내에는 조선학교가 없었다」[32]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33]

  • 1923년 3월 : 칠골 외가로 와서 창덕학교(彰德學校)를 다님. 북한은 이때 김일성이 8도구에서 칠골까지 걸어서 왔다는 길을 「배움의 천리길」이라 명명하고 기념한다.[34]
    허동찬(許東粲, 1932 ~ )은 김일성이 1922년 8월 부모, 동생들과 함께 칠골로 왔고, 부모는 만주로 돌아가지만 김일성은 그때부터 창덕학교를 다녔으며, 「배움의 천리길」은 거짓이라고 주장한다.[35]
    창덕학교는 조선에서 제일 먼저 포교를 시작한 개신교인 북미 장로파에 속하는 대동군 용산면 하리교회가 1909년에 설립한 5년제 사립학교이다.학생수가 1백명이 넘는 당시로서는 큰 학교였는데 하리교회를 세우는데 공로가 있었던 그의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었다.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낸 강양욱도 당시 교원을 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그가 담임을 한 학급에 편입되었다고 말하고 있다.[36]

  • 1925년 1월 : 칠골 외가에서 김형직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 팔도구로 걸어서 돌아감 : 「광복의 천리길」[37]. 당시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느면서 맹세했다고 하는 말이 각종 김일성 전기에 판박이처럼 나온다.[38]

    『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말은 해방 직후 김일성 수행기자를 하던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이 1945년 10월 19일부터 평양민보(平壤民報)에 연재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에 처음 나오는데,[39]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후에 이는 자신이 지어낸 말이라 했다.[40]
    1960년까지의 북한기록은 1952년 전기의 기술대로 김형직이 그를 「데리고」 만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여행 중도에 숙식을 해결할 능력도 없는 13살 짜리 아이가 1월의 엄동설한에 눈덮히고 얼어서 미끄러운 길 수백 km를 혼자 걸어간다는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려우므로 실제로는 그가 단독으로 간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41]

  • 1925년 3월 : 무송현(撫松縣)으로 이사.[41]

  • 1925년 봄 ~ 1926년 봄 : 「무송 제1소학교」를 다님.[42]

  • 1926년 3월 ~ 6월 : 3월에 화성의숙(華成義塾)에 입학했다 6월 부친의 사망으로 퇴학.[43][44][45]
    화성의숙(華成義塾)은 1926년 3월, 정의부(正義府)최동오(崔東旿, 1892~1963)화전관가(樺甸官街)에 설립한 수업연한(修業年限) 1년 6개월의 학교였는데 설립(設立) 당시에는 교원(敎員) 2名, 생도(生徒) 30名이 있었다.[46][47]
    김일성이 화성의숙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결성했다는 회고록의 주장은 그가 「동급생」들보다 5살이나 어린 소년이었던 점과 재학기간이 3∼4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해 보더라도 그 날조가 명확하다.[48] 실제로는 이종락이 만든 것이다.[49]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6) 서울신문 1993-03-30 6면

    그는 길림에 가서 처음에는 오동진의 집에서 학교에 다녔고 그가 체포된 다음에는 장철호의 집에 한 1년,현묵관네 집에서 몇달,그리고 오동진의 후임으로 정의부 사령을 하던 이웅의 집에도 얼마간 가 있었다…<주①>

    그런데 이것은 과거의 그 어떠한 전기에서도 전혀 볼 수 없었던 새 이야기들이다.그러면서 이 이야기들은 당돌하게 나온 것 치고는 또 너무 자세하다.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소설이란 것이 금방 탄로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첫째로 김일성은 조선노동당의 전통을 날조하는데 이용한 「해외조선혁명운동사」의 저자 최형우를 27년 1월에 길림에서 만난 것같이 왜곡하였다.그러나 최형우는 30년에 오가자에서 그를 본 기사를 쓰고 있을 뿐이다.

    또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하여금 살해하게 한 최형우를 파렴치하게도 「동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그가 김일성의 동지였더라면 해방직후 어째서 그는 월북하지않고 한국전쟁 때까지 이남에 남아 있었겠는가.

    둘째로 그는 58년에 중국에서 귀국한 김시우를 평북 전천에 귀양보내다시피 쫓아내 평양에 한번도 부르지도 않고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그런데 화성의숙 시대의 자기를 우상화할 필요가 생기게 되자 그는 이 김시우를 전기에 등장시키고 그의 서재에서 자기가 마르크스 문헌을 읽었다는 산화를 만드는데 이용하였다.이번에는 그를 다시 이용하여 중학교에 들어가는데 그가 마치 중간다리를 놓아준 인물인 것처럼 만들어 놓고 있다.

    ○김시우소개로 꾸며

    셋째로 그는 이왕 거짓말을 꾸밀 바에야 「통이 크게」(김일성,김정일의 평소 입버릇)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그는 당시 정의부에서 활약한 인물 중에서도 최고지도자였던 오동진,현정경(현묵관),이웅 등의 집을 전부 자기의 하숙집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대목에서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감촉할 수 있는 것은 68년 전기 이후 자주 그 이름이 나오는 장철호와의 관계 뿐이다.그러나 그 집에 1년이나 있었다는 것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주해> ①「세기와 더불어Ⅱ」199∼204면 ②같은책 202면


  • 1926년 6월 5일 : 부친 김형직(金亨稷) 사망[13]. 만주에서 김형직과 친구로 지냈던 이도일(李道日, 1894 ~ ?)의 증언에 의하면 김형직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함.[26][50]

  • 1926년 가을 ~ 1927년 6월 : 봉천(奉天)의 평단중학교(平旦中學校) 재학.[51][52] 김성주는 부친 사망후 마골단(馬骨團)이라는 공산주의 계통 폭력조직에 들어가서 심부름이나 하는 처지로 전락했는데, 정의부(正義府)가 산하의 이종락(李鐘洛) 소대장(小隊長)을 보내 마골단의 행패를 제압함. 이종락은 심부름이나 하던 김성주를 빼내어 평단중학교에 입학시켜 주었다고 함. 평단중학교 재학은 북한의 김일성 전기에서는 누락되어 있으나 당시 평단중학교를 다녔던 사람의 증언으로 확인이 됨.[53]

  • 1927년 8월 ~ 1929년 5월 : 길림(吉林) 육문중학교(毓文中学校)로 전학하여 재학.[54] 이때 정의부(正義府)에서 학비(學費)를 공금(公金)으로 대주었는데[55], 부친 김형직이 그 소속원이었던 때문으로 보임.

  • 1929년 5월 14일 :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 조직(組織)에 참여했다가 길림 총영사관 경찰에 발각되자[56] 도주하여 체포는 면했으나, 졸업을 눈앞에 두고 육문중학을 중퇴하게 된다.[54] 육문중학 중퇴가 북한에서 인정하는 김일성의 최종학력이다.

    3부 통합운동의 계통[57]
    在滿 運動 團體 --民族運動 - 民族唯一黨組織運動 --促 成 會 --正義府【脫退幹部】-- 在滿唯一黨策進會 - (慶尙道派中心)
    新民府【軍政派】
    參議府【主力】
    其 他
    協 議 會 --正義府【主力】-- 三府統一運動-國民府 - (平安道派中心)
    新民府【民政派】
    參議府【一派】
    其 他
    社會運動 - 靑年運動(共産)單一黨組織運動 -----住中國韓人靑年同盟 - (促成會(策進會) 支持)
    南滿韓人靑年總同盟 - (協議會(國民府) 支持)
    反同盟派(北滿朝鮮人靑年同盟) - (一部促成會支持)
    만주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고에 시게루(川越茂, 1881 ~ 1969)가 1929년 5월 14일자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1864 ~ 1929)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조선공산청년회 조직의 건(朝鮮共産靑年會 組織ノ件)」 : 여기에 나온 "육문학교(毓文學校) 생도(生徒) 김성계(金聖桂)"가 바로 북한 김일성이며, 김성주(金聖柱)를 잘못 적은 것이다. 이것이 김성주가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최초의 사례이다.

    국민부 (國民府) "조선혁명당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인 자치기관"
    梁世奉 : 朝鮮革命軍 總司令의 硏究 (丁原鈺) > Ⅱ. 正義府의 組織과 抗日獨立運動 > 4. 全民族唯一黨運動과 三府統一運動 國史館論叢 第8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12-20)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영석, 백야 김좌진장군 연구(白冶 金佐鎭將軍 硏究)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 第51輯 (국사편찬위원회, 1994-06-20)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아나키즘 등장하다 ⑨한족총련 결성 : 공산주의자와 틀어진 김좌진, 아나키스트와 연대 [중앙선데이] 입력 2012.08.24 14:42 | 284호 30면

    김일성이 속했던 조선공산청년회는 민족진영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반대투쟁이 주목적이고, 항일투쟁에는 관심도 없다.

반국민부 활동기 (1929년 가을 ~ 1932년 말)[편집]


왕청문(旺淸門) 사건[편집]

  • 1929년 가을 ~ 1930년 초 : 이종락(李鐘洛)이 자신을 찾아온 김성주를 요녕성 신빈현(遼寧省 新賓縣) 왕청문(旺淸門)에 있는 남만학원(南滿學院)에 보내 다니게 함.
    南滿洲學院(약칭 南滿學院)은 정의부(正義府) 때에 세운 특수 교육기관이었는데 국민부(國民府)가 발족한 이후로는 국민부가 인수해 관장하고 있었다. 독립정신을 기르고 군인으로서는 소대장(小隊長)이 될 수 있는 자질, 행정으로 나간다면 자치구(自治區)의 구장(區長)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교육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북한의 김일성 전기에서는 남만학원 재학 사실도 누락되어 있으나, 당시 만주에서 그와 알고 지냈던 사람의 증언으로 밝혀짐.[58]

  • 국민부에서 남만학원 책임자 현정경(玄正卿, 1886-1941) 이하 강사진이 공산주의 교육만 하여 학생들도 이에 동조하여 국민부에 반대하게 된 것을 알고 이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자 김성주는 다시 도망침.[58]
    정의부가 국민부로 개조된 후에도 계속하여 반동 간부의 행동을 감시하고 암살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동년 10월 중순, 본 총동맹의 반동 간부 최봉(崔峰)·이태희(李泰熙)·지운산(地雲山)·이광선(李光先)·한의철(韓義哲)·이몽렬(李夢烈)의 6명을 체포하여 국민부 간부 김문거(金文擧)·김보안(金輔安)은 부하 군인을 지휘하여 동월 16일 신빈현 북왕청(北旺淸) 부근 산골짜기에서 전부 이를 총살하였다.[59][60]

  • 1930년 3월 14일 :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을 담당할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김성주(金成柱)가 선임되었음.[61][60]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 남만농민동맹(南滿農民同盟), 남만여자교육회(南滿女子敎育會)를 동합시킨 단체이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제3장 길림 시절 (1927년 1월 ~ 1930년 5월) 10. 철창 속에서"에는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5월 초까지 길림의 감옥에 있었다고 했으나 시기적으로 이 자료와 모순이다. 거짓말로 보임.

    별 기반이 없던 김성주가 간부로 선출된 것은 남만청총지도위원 이종락의 지원을 받은 때문인 듯.
    김일성이 국민부 산하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 간부 였다는 것은 그가 국민부에 가입해 있었다는 증거로 보임. 회고록에서 이를 감춘 이유는?

  • 1930년 5월 30일 : 간도 폭동[62]
    남경(南京)의 중앙일보(中央日報, 1930.08.11)는 조선혁명군 제9대장 이종락 일파도 간도폭동에 간여했다고 보도함.[63] 이종락의 부하였던 김성주도 이 사건에 무슨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 1930년 6월 :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朝鮮共産黨滿洲總局)코민테른 12월 테제 영향으로 해산.[64][65]
    조선공산당재건설 만주부 창립대회의 상황 : 1930년 1월 22일[66] - 재건설계(再建設系) : 정의부 또는 국민부 인사도 다수 참여.
    1930년 3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党)이 중국공산당에 합류[67][68]

    28년 코민테른<12월테제>가 발표되자, 각 파 만주총국은 조직을 해체하고 1국1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30년 4월에 ML파가, 6월에 화요파가 각각 조직을 해체했다. 서울-상해파는 이미 29년 1월경 조직을 해체, 국내에서 당 재건운동에 힘썼다. 이로써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30년 6월까지 모두 해체되었으며,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및 조선혁명군 사령부[편집]

  • 1930년 8월 19일 : 국민부(國民府)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탈퇴를 선언 :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 대리(日本 總領事 代理)가 1930년 8월 27일자로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 1930년 9월 3일 : 국민부(國民府)에 속했던 삼촌 김형권(金亨權, 1905 ~ 1936)이 함경남도 풍산군(豊山郡) 등지로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가 홍원군 주익면 장정리(洪原郡 州翼面 壯亭里)에서 체포됨.[69]

    최효일, 김형건, 박차석, 정계빈 등 판결문 1932/04/04 경성복심법원 : 최효일(崔孝一) 사형, 김형권(金亨權) 징역 15년, 박차석(朴且石) 징역 10년[70]


  • 1930년 9월 10일 : 국민부(國民府)를 탈퇴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9대장(第九隊長) 이종락(李鐘洛, 1907 ~ 1940) 등 공산주의자들과 동아혁명군(東亞革命軍) 수령(首領) 김광렬(金光烈, 1896 ~ ?)이 제휴(提携)하여 1930년 9월 10일자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길강지휘부(吉江指揮部)를 조직(組織).
    당시의 조직표(組織表)와 내건 선언(宣言) 및 구호(口號)가 1930-09-17 일자 길림(吉林) 주재 일본 총영사의 외무대신앞 보고서에 나옴.
    이종락(李鐘洛, 1907 ~ 1940), 안붕(安鵬), 김광렬(金光烈, 1896 ~ ?), 장기명(張基明, 1906 ~ ?, 일명 張小峰), 고할신(高轄信, 1904 ~ ?), 최창걸(崔昌傑, ? ~ 1931.11), 차광수(車光洙, 1905 ~ 1932) 등..

    모두 조선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내건 선언(宣言)과 구호(口號)에는 항일이나 조선독립을 위한 투쟁은 없고, 국민당 정부 타도, 국민부 박멸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며, 이를 위해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는다고 하였다.
    만주국 성립후 생겨난 유격대나 동북항일 연군도 기본적으로 같은 목표이지만, 이를 위해 만주국을 붕괴시키기 위한 항일투쟁이 곁들여졌을 뿐이다. 만주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았으며, 조선독립의 목적의식이 전혀 없다. 이의 후신인 조선혁명군 사령부, 세화군(世火軍, 1931년 3월), 동방혁명군(東方革命軍, 1931년 5월)도 조선독립과 무관하기는 마찬가지임

    김일성도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및 조선혁명군 사령부 소속원이었다.[71] 아래 김일성(金一成) 체포 기사의 조선○○군(朝鮮○○軍)도 이종락 지휘하의 조선혁명군(사령부)을 말하는 것이다.
    동아일보 1931년 3월 26일 : 朝鮮○○軍(조선○○군) 男女三名(남녀삼명) 被捉(피착) : 金一成(김일성) 崔得英(최득영) 류봉화(女子)[72][73]
    동아일보 1931년 5월 4일 : 李鐘洛 部下(이종락 부하) 三名(삼명)이 被逮(피체) : 김일성(金一成) 최득영(崔得永) 류봉화(劉鳳和)[74]

    국공내전 시기에 국민당군에 대한 정보를 일본에 팔아넘긴 모택동[75]
    (중국공산당의 목적은 항일 아닌 중국 적화. 중공당 만주성위 목표는 항일보다 만주적화 : 중국 국민당 정부와, 민족진영 조선혁명군을 반대하고 공격한 이유.)

    엔도 호마레(遠藤誉, 1941- ), ≪모택동: 일본군과 공모한 남자(毛沢東 : 日本軍と共謀した男)≫ (新潮社, 2015/11/14)
    「일본군의 침공에 감사한다」(1956 년 9 월 4 일의 모택동 발언) 중국 연구 전문가가 그린 「건국의 아버지」의 진실。: 「日本軍の進攻に感謝する」(1956年9月4日の毛沢東発言)中国研究の第一人者が描いた「建国の父」の真実。

    2015년 엔도 선생은 <<모택동: 일본군과 공모한 남자(毛沢東 : 日本軍と共謀した男)>>란 제목의 역작을 발표했다. 선생의 세밀한 논증에 따르면, 중일전쟁 시기 모택동은 일본 외무성 지부에 반한민(潘漢民, 1906-1977) 등의 중공 스파이를 심어서 장개석 및 국민당 관련 고급 정보를 비싼 가격에 일제에게 넘기고 거액의 뒷돈을 챙겼으며, 일본과의 밀약을 체결해 중국공산당의 세력 확장만을 꾀했다. 한 논평에 따르면, 이 책은 “중국연구의 제1인자가 철저히 조사한 자료로 들려주는 중국공산당의 불편한 진실”이다.


    천하의 모택동이 항일전쟁 시기 “일제와 공모를 했다니?" 엔도 선생의 논증은 그야말로 폭군의 목을 겨눈 날카로운 비수가 아닐 수 없다. 과연 모택동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장춘에서 아사한 수십 만 난민들 틈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 가녀린 소녀가 70년이 지난 지금 동경대학 국제관계 연구소의 소장이 되어 자신을 단죄하리란 사실을!



  • 1930년 9월 : 이종락, 현정경, 고할신, 차광수 등의 중국공산당 가입 : 구 재건설계 (舊 再建設系)[76]
    이들을 구 서울-상해계(舊ソウル上海系)라고 한 문헌도 있음.[77]
    최창걸(崔昌傑, ? ~ 1931.11)도 중국공산당원임.[78]

    <李鐘洛 일파 진용을 갱신. 「중국공산당에 가입」 적극적 행동에 전환> 조선일보 1931.04.01 / 석간2 2 면

  • 1930년 11월 25일 :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를 조선혁명군 사령부로 개칭함.
    이 무렵 김일성은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 머무는데, 조선혁명군 사령부에서 새로 편성한 5개 재향군 상비대(在鄕軍 常備隊) 중 회덕현 오가자 지방에 둔 제13대 및 제15대 중 하나에 그가 소속되었던 때문으로 보임.

  • 1931-02-03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체포된 이종락(李鐘洛)의 사진. 오른 쪽으로부터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이종락, 박운석(朴雲碩), 김광렬(金光烈, 1896 ~ ?)
    동아일보 관련기사 보기
  • 1930년 12월 : 이종락(李鐘洛)의 부하(部下)가 정신(鄭信, 1898 ~ 1930)을 중동선(中東線) 카륜(卞倫)역 부근에서 암살(暗殺)함[79][80] : 길림 주재 일본 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1930-12-27 일자 보고서.
    정신(鄭信)은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1889 ~ 1930) 장군이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 김일성(金一星, 본명 김봉환)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朴尙實)에 피살된 후[81] 후임자 역할을 하던 사람임.

  • 1930년 말~1931년 초 :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 머뭄. 이 시기에 삼성(三成)학교 교사였던 최형우(崔衡宇, 1905~1950)가[82] 그에게 일성(一星)이란 별호를 지어줌.[83][84][85]
    김일성 회고록에는 1920년대말 김혁이 김성주에게 "한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86] 이를 한자로 일성(一星)으로 적다가 나중에 일성(日成)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별"이라는 이름은 김성주 아닌 그의 혁명 선배 김인묵이라는 인물의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다.[45]

  • 1931년 1월 16일 : 관전현(寬甸縣) 지방 반국민부파(국민부 개조파) 공산주의자 사이에 중공당 가입문제와 농민협회 유격대 조직 문제로 알력이 일어남. 고활신(高豁信)을 중심으로 한 김석하(金錫夏), 이성근(李成根), 이윤환(李允煥)[87]은 토론후 다수결로 정하자고 하고, 주창(朱蒼), 이성상(李成相), 안도형(安圖亨)은 개별적으로 중공당에 가입하자고 하여 격론이 벌어짐. 주창(朱蒼), 이성상, 안도형 등은 40여명의 군인과 4백여호의 농민을 선동하여 자위대를 조직하고 김석하, 이성근, 이윤환 외 1명을 총살함. 이성상과 안도형은 국민부 시절 이윤환의 부하였다.[88]

  • 1931년 1월 28일 : 김일성의 상관 이종락(李鐘洛, 1907~1940)김광렬(金光烈, 1896 ~ ?), 장기명(張基明, 1906 ~ ?, 일명 張小峰), 박운석(朴雲碩) 등 조선혁명군 사령부 핵심 인물들이 검거(檢擧)되어 조선혁명군 사령부가 붕괴됨.[89][90][91][92]

    고할신(高轄信, 高豁信)도 3월 22일 체포되었으나, 6월 11일에 보석으로 일시 풀려난 후 6월 13일 도주하였다.[93][94]


오가자(五家子)에서의 살인[편집]


세화군(世火軍) 및 동방혁명군(東方革命軍)[편집]

  • 1931년 3월 23일 : 최창걸(崔昌傑, ? ~ 1931.11), 차광수(車光洙, 1905 ~ 1932) 등 조선혁명군 사령부 잔존 세력이 세화군(世火軍)으로 재편성됨. 김성주(金成柱)가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委員)으로 됨.[99]

    5월 3일에 동방혁명군(東方革命軍)으로 개칭함.[100]
    만주사변(滿洲事變) 후 간부 최창걸(崔昌傑)과 한창국(韓昌國) 간의 알력으로 활동이 심히 부진하게 됨.
    한창국은 1931년 귀순하고, 최창걸은 1931년 11월 중순 조선혁명당 양세봉의 부하에게 살해됨. (決端鳳은 梁瑞鳳 즉 梁世鳳의 오기로 보임)

    독립운동사자료집 10 :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관한 문서 속보의 건 / 대정 8년 4월 25일 / 불령선인의 행동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pp.601~602  : 공훈전자사료관

    불령선인의 행동

    4. 동방혁명군(東方革命軍)[조선혁명군 길강성 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省 指揮部), 조선혁명군 사령부(朝鮮革命軍 司令部), 세화군(世火軍)]
    조선혁명군 길강성 지휘부는 원 국민부 혁명군 제9대장 이종락(李鐘洛)이 국민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독립 행동으로 나서 원 동아 혁명군 수령 김광렬(金光烈)[치치하얼 근거지]과 제휴하여 소화 5년 8월 중에 두 사람은 길림에서 회합하여 조직하고 이래 합장선(哈長線) 도뢰소(陶賴昭)를 근거로 하여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중공당(中共黨) 측과 연락을 취하고 국민부(國民府) 기타 민족주의 단체에 대항하는 한편, 군자금 조달에 노력하고 있던바, 본 길강성 지휘부는 성립 당초 전중국의 계급적, 통일적 홍군(紅軍) 기관으로 편성될 때까지 이를 지지하는 취지의 선언서를 발표하므로 말미암아 중국 공산당과 연락이 있음이 일반에게 인식되어, 따라서 중국 관헌의 취체 엄중하였으므로 이 명칭을 폐하고 중국 관헌의 주의를 피하기 위하여 표면 민족 단체로 가장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간주하고, 동년 11월 하순 하얼삔 시외 러시아인 여관에 간부 회합하여 조직을 고치고 조선혁명군사령부라고 개칭하고 각각 부서의 결정을 하였다. 그 후 작년 1월 28일 수령 이종락(李鐘洛, 1907 ~ 1940)·김광렬(金光烈)·박운석(朴雲錫) 등은 장춘(長春)에서 우리 경찰서원에게 체포되어 수령을 잃은 조선혁명군 사령부원 등은 한때 어찌할 바를 몰라 재기의 가망이 보이지 않았으나 잔당(殘黨) 박근원(朴根源) 등은 길림에서 고활신 및 유하(柳河) 지방에서 활동중인 최창걸(崔昌杰) 일파와 기맥을 통하고 다시 제3세력 단체 수립의 계획을 세워 동년 3월 23일 길림에서 잔당원 박근원(朴根源)·한창국(韓昌國)·장철(張哲) 및 최창걸(崔昌杰) 등 집합하여 세화군(世火軍)을 조직하고 부서 역원을 선임하여 다시 활동을 개시하였으나, 그 후 세화군(世火軍)이라는 명칭은 장래 활동상 매우 좋지 못하다는 의논이 일어나, 동방혁명군(東方革命軍)이라고 개칭하기로 하여 5월 3일 그러한 취지를 각군 책임자에게 통지하였던바. 그 조직의 내용·부서 등은 종전대로 하고 중앙 근거지를 하얼삔으로 이전하였다.
    그리하여, 동방혁명군은 이에 진용(陣容)을 일신하고 혁명군원을 만주 각지에 분파하여 군자금의 조달에 주력을 기울이는 한편, 최창걸 등의 간부는 유하현 금천(金川) 지방에서 공산당원과 연락하고 국민부를 타도하려고 진공을 서둘렀으나 최근 최창걸의 소식 불명으로 되었다.

    작년 1월 28일 조선혁명군 사령부 이종락, 김광렬 등이 체포되었다고 했으므로 위 기록은 체포 이듬해인 1932년에 작성된 것임.

  • 1931년 3월 26일 : 이종락(李鐘洛) 부하(部下) 김일성(金一成) 등 3명 피체(被逮) : 동아 및 조선일보 보도[72][73]
    朝鮮○○軍(조선○○군) 男女三名(남녀삼명) 被捉(피착) : 金一成(김일성) 崔得英(최득영) 류봉화(女子) / 길림성 이통현(吉林省 伊通縣)에서 잡혀 / 武器(무기)도 押收(압수) 되엇다

  • 1931년 5월 4일 : 이종락 부하 김일성 등 3명 피체 : 동아일보 보도[74]
    李鐘洛 部下(이종락 부하) 三名(삼명)이 被逮(피체) : 김일성(金一成) 최득영(崔得永) 류봉화(劉鳳和) / 이통현 공안국에 잡히어서 / 吉林省政府(길림성정부)로 護送(호송)

    이런 기록들로 보아 김성주는 1931년 전후에 김일성(金一星) 또는 김일성(金一成)이란 이름을 별호 비슷하게 쓰기도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그가 어떤 이름을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본명의 한자 표기 "成柱 / 聖柱 / 誠柱"나 별명의 한자 표기 "一星 / 一成 / 日成"은 한국어 발음은 서로 같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당시 김일성이 주로 쓰던 말 중국어로는 글자 뿐만 아니라 발음까지 모두 달라서 같은 이름들이 아니다.

  • 1931년 9월 18일 : 만주사변(滿洲事變)


조선혁명군 고동뢰 소대 참살[편집]


유격대 시기 (1932년 말 ~ 1940년 10월)[편집]


    만주의 공산 계열 유격대들은 만주적화가 목표였으며, 동북항일연군도 마찬가지. 조선독립은 이들과 무관.
  • 1932년 초겨울(연말) : 김성주(金成柱)가 학생 옷 차림으로 안도현(安圖縣) 유격대를 찾아와 입대.[112]

    북한서 주장하는 1932년 4월 25일 안도반일유격대(安圖反日遊擊隊) 창설은 거짓임. 이날 창설된 안도현(安圖縣) 유격대장은 김일성 아닌 이영배(李英培)임.[113][114][115]

  • 민생단 사건[116]

  • 조선혁명군과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의 관계[117]

    조선혁명군이 반공주의를 고수하다 세불리하여 마지막에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했다고 하나, 동북항일연군도 얼마 더 버티지 못하고 궤멸되어 잔존세력이 소련으로 도주하면서 소멸하므로 큰 의미를 두기도 어려움. 조선혁명군이 소멸한 후 연이어 동북항일연군도 소멸함.

항련 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편집]

  • 1937년 7월 7일 : 중일 전쟁(中日戰爭) 발발 - 지나사변(支那事變), 일지사변(日支事變)

  • 1937년 가을 : 소련의 한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 지도자급인사 2000여명 처형, 17만여명 중앙아시아 강제이송. 추위와 굶주림으로 1/3 가량 사망.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을 인준하지 않은 것은 조선독립의 필요성까지 부인한 것과 동일하다. 소련은 조선독립운동을 가장 심하게 탄압한 국가이며, 김일성은 그 하수인에 지나지 않음.

항련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편집]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27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7 昭和15年7月5日から昭和15年7月26日 1940년 6월 ~7월
1940년 7월 26일 김일성 비단 내부상황에 관한 건 - 지순옥사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42600、満洲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6 昭和15年6月1日から昭和15年6月27日 1940년 5월 김일성


김일성 귀순 공작[편집]

  • 김일성은 1939년 무렵부터 왕년의 상관 이종락과 삼촌 김형권의 동료 박차석을 중재인으로 내세운 일본 경찰 측의 귀순 협상 제의에 응하여 한때 귀순할 결심까지 했으나, 사후 안전보장을 위해 까다로운 조건을 내거는 바람에 협상이 지연되면서, 이러한 사정이 1로군 총사령 양정우에게 보고가 들어간다.
    1940년 1월 : 김일성과 귀순 조건 협상차 부대에 들어왔던 이종락이 보고를 받고 들이닥친 1로군 총사령 양정우에게 총살 당함.[118][119]. 만선일보 기사는 사건 2개월여 후에 쓴 것이므로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비교적 정확하게 쓴 것으로 보이는데, 김창영의 1949년 반민특위 조사 당시의 진술과도 대체로 일치하며 좀 더 구체적이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1938년 가을 귀순 협상차 부대에 들어온 이종락을 자신이 죽였다고 했으나 시기도 틀리고, 사실도 아니다.[120]


소련군 시기 (1940년 10월 ~ 1945년 9월)[편집]


  • 1940년 10월 23일 : 일본군의 집중적 토벌로 항일연군 1로군이 완전 궤멸될 위기에 처하자 결사항전하는 상관,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만주서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121]
    소련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투옥. 주보중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남

  • 1941년 1월 1일 : 서철(徐哲, 1907~1992)[122], 안길(安吉, 1907 ~ 1947)과 함께 왕신림(王新林)에게 올리는 보고서 작성[123]

  • 1941년 2월 16일 : 소련으로 망명한 빨치산 일부를 수용한 남야영(B Camp)이 있던 하마탄 (오늘날의 라즈돌노예) 마을 88번지에서 장남 김정일 출생

  • 1941년 4월 10일 ~ 1941년 11월 12일 : 위증민을 찾아오라는 주보중의 지시로 대원 28명을 데리고 만주로 나감. 중간에 8월 10일~9월 14일 기간에 소련에 돌아와 보고를 하고 다시 감.[124][125]
    파견인원 명단에 나오는 주명증(朱明增)은 만주에서 5월 15일 일본측에 체포됨.[126]

  • 1941년 4월 13일 :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 체결

  • 1942년 :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의 지시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의 역사를 간단히 기록한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 집필[127]
    (김일성이 일본군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한 후에 직접 쓴 이 글에 조선독립이란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김일성 본인이 중국 공산당원으로 중국을 위해 열심히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최종적으로 일본군에 패배했다고 자인하고 있다.)

  • 1942년 7월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북야영(A Camp)에 88여단이 창설되어 그곳으로 이주. 대위 계급을 받고 1대대 대대장이 됨.
    7월 17일 정식 소련군인이됨.[128]

  • 1945년 8월 29일 적기훈장 수여받음.[128]


북한 임시 지도자 (1945년 9월 ~ 1948년 9월)[편집]


  • 1945년 9월 초 : 스탈린이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시험을 본 후 북한 지도자로 결정함.

  • 1945년 9월 19일 :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로 원산항을 통해 입북. 마중나온 인사들에게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

  • 1945년 9월 20일 : 북한 지역에 부르조아 민주국가를 수립하라는 스탈린의 비밀 지령문 하달.

  • 1945년 9월 22일 : 원산서 기차편으로 평양 도착. 김영환이란 가명으로 비공개 활동.

  • 1945년 10월 2일 : 소련군 문서에 진지첸이란 중국식 이름을 김일성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

  • 1945년 10월 13일 : 저녁 평양시내 「평화회관」에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주최 김일성 장군 환영연회[129]
    당시 모임에 평남 인민정치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던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은 1959년 한국으로 귀순한 후 쓴 수기에서 모임의 일자가 10월 12일 또는 그 전날 저녁이고 장소도 「다마야」라는 일본요정이라고 하였다.[130]

  • 1945년 10월 14일 : 오후 1시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평양시 민중대회 집회에서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되고 연설을 함.[131] 가짜 김일성 장군이라는 소동이 일어남.[132]

  • 1945년 10월 14일 : 평양시 민중대회 집회가 끝난 후 저녁 때 만경대 방문하여 친척과 친지를 만나는 장면 연출.[133][134] 가짜라는 소문의 확산을 막기 위해 급조한, 계획에 없던 일정임.[132]
    한재덕(韓載德)이 10월 19일부터 평양민보(平壤民報)에 연재한 기사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는 김일성의 만경대 방문 당시의 일을 보도한 것이다.

  • 1945년 10월 18일 : 오후 6시 평양시내 「대동관」에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주최 김일성 장군 환영회 및 가족 위안회가 열림. 김일성 조모, 숙부 김형록 내외 등 친척과 친지 참석[135][136]

    이 모임에 참석했던 오영진(吳泳鎭, 1916-1974)이 1947년 11월 월남 후에 쓴 책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北韓): 하나의 증언(證言)』 (복간본 p.96부터)에는 이날 모임의 참석자, 모임 진행과정, 분위기 등에 대해 자세히 나옴. 장소는 전 일본요정 「가선(歌扇)」이라고 함.[137][138]

  • 1945년 12월 25일 : 쉬킨 보고서에 9월 20일의 스탈린 비밀 지령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

  • 1946년 1월 5일 :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

  • 1946년 2월 8일 :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됨.

  • 1946년 3월 : 토지개혁 실시. 무상몰수, 무상분배라고 하나, 농민에게 토지의 소유권 아닌 경작권만 줌. 지주에게 내던 소작료보다 가혹한 세금을 부과.

  • 1946년 7월 초 :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에게 지도자 면접시험을 봄.


북한 수상 (1948년 9월 ~ 1950년)[편집]


  • 1948년 9월 10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범. 내각 수상에 취임

  • 1949년 3월 5일 :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 남침 전쟁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함.
    이후 스탈린에게 48차례나 전문을 보내 남침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함.[139][140][141][142]

  • 1950년 3월 : 모스크바 방문. 남침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승인을 얻음.

  • 1950년 6월 25일 : 6.25 남침 전쟁 시작.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이 날은 타이타닉(Titanic)호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날이며, 북한은 이를 또한 김일성 우상화 선전에 이용하고 있다. 김일성 출생은 타이타닉 침몰보다 더한 재난이다.
  2. 용산방(龍山坊)이 1896년 용산면으로 개편 북한지역정보넷
  3. [문화] 파워인터뷰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문화일보 2016년 01월 01일
  4. 고순화방(古順和坊)이 1896년 고순화면 (古順和面)으로 개편 북한지역정보넷
  5.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북한지역정보넷) : 고순화면(古順和面)과 평천면(平川面)이 합하여 고평면(古平面)이 됨.
  6. 북한의 종교-칠골교회 RFA 2019-02-12
  7. 북한교회를 가다③ 평양칠골교회 편(상) 통일뉴스 2016.01.04
    북한교회를 가다④ 평양칠골교회 편(하) 통일뉴스 2016.01.11
  8.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은 김일성의 창덕학교 동창이나 만주에서 그를 직접 알았던 사람들의 후일 증언을 토대로 그의 실제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아닌 김성주(金聖柱)이며, 전사한 보천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金日成)의 본명이 金成柱인 것을 따라, 자신이 그 사건의 주역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본명까지 金成柱로 고쳤다고 주장한다 : 이명영(李命英),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 (신문화사, 1974) pp. 94, 103, 109, 152.
    일제시대 기록에는 그의 본명이 金成柱/金聖柱 두 가지가 다 나와서 어느 쪽이 맞는지 명확히 가리기가 쉽지 않다.
  9. 최형우(崔衡宇),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 (漢城 : 東方文化社, 檀紀 4278[1945]년 12월 10일) pp. 25, 28.
  10. 金日成은 나의 弟子다? 三八線 넘는 崔東旿氏談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11.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김일성자서전연구:5) 서울신문 1992-10-15 4면
  12.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6) 1992. 11. 26 (목) | 서울신문
  13. 北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 사망 90돌 행사 :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의 김형직 동상 헌화 CBS노컷뉴스 2016-06-06
  14. 김형직(金亨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형직은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아내인 강반석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75년 평양사범대학을 김형직사범대학으로, 1988년 함경북도 후창군을 김형직군(郡)으로 개칭하였고, 그 외에 김형직 군의대학 등 김형직의 이름을 딴 학교들이 있다. 그가 사망한 후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와 평안북도 삭주군 남사로동자구,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 등에 동상이 세워졌고, 만경대 묘지에는 반신상이 있다.

  1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朝鮮人槪況 送付에 관한 건 (1919년 03월 26일) p.60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歐米 7雜 > 朝鮮人槪況 第二 壹部 參考 送付 (1919년 03월 26일) p.61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6.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25, 조선(朝鮮) 1 (みすず書房, 1967)
    金日成의 父 金亨稷 조선국민회활동 사실로 확인돼 연합뉴스 1998-03-25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 독립기념관에 소장 연합뉴스 2005-03-23
  17.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 서울신문 1992-10-13 5면
  18. 만경대 방문 北주민이 듣는 김일성 관련 거짓 선전들 - DailyNK 2018.04.13

    만경대 김일성생가 강사의 김일성에 대한 선전을 기사화한 노동신문 4월3일자 내용에서 아주 큰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3·1운동’ 과 김일성과의 연계이다. 기사를 보면 강사는 다음과 같이 선전하는 것 같다. “만경대시절에 체험하신 3.1인민봉기도 우리 수령님의 혁명의식발전에 참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어리신 나이에 어른들과 함께 시위대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시며 만경대에서 보통문 앞에까지 가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이 선전의 핵심은 바로 만경대에서의 3.1운동 경험이 김일성의 혁명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3·1운동시기 김일성은 8살이었는데 ‘김일성원수님의 어린시절’, 책을 보면 그 무렵 김일성은 만경대에 있지 않고 부친인 김형직과 함께 국경지대인 중간진에 있었다. 그 책 ‘밝은 앞날을 내다보시며’ 차례에서 김형직이 1916년 만경대를 떠나 봉화리에 자리를 옮겼고, ‘조국을 멀리 떠나서’ 차례에는 김형직이 1918년에 국경지대인 중강진으로 자리를 다시 옮겼다고 나온다. 이때 김일성도 함께 고향을 떠나 김형직을 도왔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이 만경대에 다시 돌아온 것은 그가 12살 때였다. 바로 북한이 ‘김일성어린시절 따라배우기’ 중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배움의 천리길’이 바로 이 시기이다. 따라서 3.1운동과 김일성의 만경대어린시절을 연동시키는 것은 날조(捏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3.1운동을 통한 김일성의 혁명의식 고양(高揚)도 가짜가 되는 것이다.

  19.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김일성자서전연구:6) 서울신문 1992-10-20 4면
  20. 북한의 인민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VOA Korea 2015.3.7
  21. 이명영(李命英),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新文化社, 1974) p.32 ; pp.122 ~ 124
  22. 지방통신: 평안남도 교원시험 합격자(평양) 매일신보(每日申報) 1916-05-19 : 04면 04단
  23. 白山武士團員 逮捕의 件 : 1921년 05월 12일 조선소요사건관계 서류 >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3 : 康晋錫(變名 金在龍, 韓成龍,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大正 9년 (1920) 음력 2월.....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의 매부 金亨穆(金亨稷의 오류)의 집에 잠시 체류하다 같은 해 음력 4월 2일 임강현 천금동에서 목재 벌채 종사...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6권 > 1921년 4월 24일 > 白山武士團 第二部 外務員 康晋錫 (국사편찬위원회, 1971년)
  24.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8) - 서울신문 1992-10-27 4면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9) 1992. 12. 08 (화) | 서울신문
  25.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0) 1992. 12. 10 (목) | 서울신문
  26.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1. 金亨稷 國史館論叢 第4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10-09)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pp.96~97]

    第二章 金聖柱의 少年時節 / 第一節 家系와 生活環境

    當時 撫松에 살았던 李道日씨(79세, 釜山 거주)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亨稷이랑 같이 獨立運動團體인 白山武士團에 關係했었다. 團長은 金虎란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순수한 民族主義者였다. 그런데 그때 共產黨運動이 벌어지면서부터 獨立運動陣營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漢醫였던 金亨稷은 獨立軍한테는 약도 주고 治療도 해주었으나 共產黨은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아 공산당한데 원한을 사고 있었다. 어느 날 밤 共產黨들이 와서 분풀이로 亨稷이를 殺害하고 말았다. 金聖柱는 자기 아버지를 누가 죽인지도 모르고 지금 共產黨을 하고 있는 것이다."

  27. 소화 4년 12월 3일 선비 사살에 대한 건 독립운동사자료집 10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일본 외무성 보존 문서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pp.451~453 : 공훈전자사료관
  28. 신훤(申楦, 1895 ~ 1962) 독립유공자 공훈록 - 보훈처
  29. 허동찬(許東粲, 1932~ ), 『김일성 평전(金日成 評傳) - 허구와 실상』, (북한문제연구소, 1987) pp.86~88.
  30. 한민족독립운동사 4권 독립전쟁 / Ⅰ.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4. 자유시사변 : 김창순(북한연구소 이사장) (국사편찬위원회, 1988년 12월 30일)
  31.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김일성자서전연구:8) 서울신문 1992-10-27 4면
  32.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1) 1992. 12. 15 (화) | 서울신문
  33. 長白縣 檔案館 所藏 韓國史 關聯 檔案資料 槪況 해외사료총서 09권 : 중국 소재 한국사 자료 조사보고 Ⅰ (국사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10일)
  34. 북한교회를 가다⑫ 량강도 포평교회 최재영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 NK 투데이 2016-03-22
  35. 새전기 「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 (신고 김일성자서전 연구:22) 1992. 12. 17 (목) | 서울신문
  36.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4) 1992. 12. 29 (화) | 서울신문
  37. 北, '광복의 천리길' 답사 시작 dailynk 2005-01-23
  38. 김일성저작집1 p.361
  39.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1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p.67~68 ; p.110.
  40. 한재덕(韓載德),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21회)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동아일보 1962.05.24, 2면
    한재덕(韓載德), 『김일성을 고발한다』 (내외문화사, 1965) p.96
  41.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5) 1993. 01. 05 (화) | 서울신문
  42.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6) 1993. 01. 07 (목) | 서울신문
  43. (3)김일성 회고록의 진실 (3-1) 화성의숙의 꾸며진 회고 블루투데이 2012.09.12
  44.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8) 1993. 01. 14 (목) | 서울신문
  45. 김일성의 이름은 어떻게 신화가 됐을까?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7-02-24
  46.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2. 打倒帝國主義同盟 國史館論叢 第4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10-09
  47. 金日成은 나의 弟子다? 三八線 넘는 崔東旿氏談 민중일보(民衆日報) 1948/04/22 : 김일성의 본명을 金誠柱로 적었다.
  48.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4) 1993. 02. 04 (목) | 서울신문
  49. 조작의 대표사례, 타도제국주의동맹 RFA 2015-10-16
  50.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 조규하(曺圭河), 이경문(李庚文), 강성재(姜聲才), "남북의 대화" (한얼문고 1972, 고려원 1987)

    한때 金日成(김일성)과 한마을에서 살았던 李道日(이도일)씨(七八(칠팔) · 釜山市(부산시) 대청洞(동) 四街八六(사가팔육))의 증언.

    지금부터 三十(삼십)여년전 내가 滿州(만주) 안도縣(현)에 살때 그때 金成柱(김성주)라고 불렀던 청년과 같은 부락에 산 일이 있었읍니다. 金成柱(김성주)는 그 아버지되는 金亨稷(김형직)이 共産黨(공산당) 측으로부터 암살을 당한 후 안도縣(현)으로 들어와 재산이 있었던 有志(유지)를 양아버지로 삼고 정착했읍니다. 그런데 얼마후 金成柱(김성주)는 조직을 만들어 재산이 있는 노인들을 잡아다 죽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를 죽일까도 마음 먹었지만 그 아버지인 亨稷(형직)이와 나는 친구이기 때문에 그만두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金成柱(김성주)가 양아버지 창고에서 무기 몇 자루를 훔쳐가지고 나가 안도縣(현)과 통화縣(현) 사이에 있던 日本軍(일본군) 진지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는 바람에 그 세력이 약간 커졌지요. 그후 滿州軍(만주군) 중좌로 있던 내 동생 李道先(이도선)을 金成柱(김성주)가 죽였기 때문에 원수를 갚기 위해 만주군 당국에 銃(총)을 달라고 청했더니, 내가 獨立軍(독립군)한 일이 있다고 무기를 주지 않다가 나중에 三十(삼십) 자루를 주었어요. 그때 關東軍(관동군)의 대토벌 작전이 시작됐는데 나도 그 작전에 참가해서 공비들을 제거했지요. 이리하여 金成柱(김성주) 일당과 그 부하들이 모두 섬멸되고 金(김)등 일곱 사람만이 살아서 연해주로 빠져 나갔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51.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3. 카륜會議 國史館論叢 第4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10-09)
  52.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7) 1993-02-16 4면
  53.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97~98
  54.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3) 1993-03-11 5면
  55. 김학규 (金學奎, 1900 ~ 1967), 백파 자서전(白波 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11) 부록(附錄) 자료 I(資料 I),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년)

    pp.588~589 (pp.6~7) ....내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중앙간부(中央幹部)가 되고 조혁군(朝革軍)의 참모장(參謀長)이 됨에 이르러서는 나는 그들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과 격렬(激烈)한 정면(正面) 충돌(衝突)을 불면(不免)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의 동지(同志)들을 많이 죽이고 또 나를 죽이려고 많이 힘썼다. 또 나도 나의 직권(職權)이 있는 한도내(限度內)에서 그들과 여하(如何)한 투쟁(鬪爭)도 불사(不辭)하여 처음에 이론(理論)으로부터 나중에는 실제행동(實際行動)에 이르기까지 치열(熾烈)한 투쟁(鬪爭)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실제행동(實際行動)이라 함은 물론(勿論) 서로 총칼을 가지고 상쟁(相爭)하였음을 말함이며, 그때 그들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책임자(責任者) 현익철(玄益哲), 조혁군(朝革軍) 총사령(總司令) 양세봉(梁世奉), 동참모장(同參謀長) 나를 가리켜 「삼대살인반동영수(三大殺人反動領袖)」라고 불렀던 것이다.

    지금 북한(北韓)의 괴수(魁首) 김일성(金日成)은 그의 원명(原名)이 김성주(金聖柱)인 바, 그가 어렸을 때에 그의 집은 장백(長白)에 있었고 그의 부친(父親)은 우리 민족진영(民族陣營)의 일원(一員)이었다. 우리 정의부(正義府)에서 학비(學費)를 공금(公金)으로 주어 길림(吉林) 육문중학(毓文中學) 2학년(學年)까지 공부를 시켰는데, 그 후 그는 조혁군(朝革軍) 제(第)1중대(中隊) 이종락(李鐘洛) 대장(隊長) 아래 있다가 공산주의(共産主義)로 사상(思想)을 전환(轉換)한 것이다. 1929년(年) 내가 길림(吉林)에 어떤 대표(代表)로 가서 있을 때에 그는 상기(上記) 육문중학(毓文中學)에서 공부하면서 길림(吉林)에 있는 소년(少年)들을 몰아가지고 소년대(小年隊)를 조직(組織)하고 그가 대장(隊長)으로 있으면서 나를 찾아 다니던 것이 기억(記憶)되며, 내가 참모장(參謀長)으로 1932년(年) 하(夏) 당취오군(唐聚五軍)과 같이 통화(通化)에 사령부(司令部)를 설치(設置)하고 있을 때 그는 무송(撫松)으로부터 한국공산청년(韓國共産靑年) 수십명(數十名)을 데리고 중국인(中國人) 유본초(劉本初)라는 사람과 동행(同行)하여 통화성(通化城)에 있는 양사령(梁司令)과 나를 찾아와, 자기(自己)네도 항일(抗日)할 터이니 무기(武器)를 달라고 요구(要求)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미 사상적(思想的)으로 우리와는 적대진영(敵對陣營)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치지불리(置之不理)해 보냈던 것도 생각난다. 공산주의(共産主義)는 그의 기도(企圖)가 세계(世界)를 정복(征服)하는데 있기 때문에 그들과 우리와는 언제든지 양립(兩立)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과 타협(妥協)이니 하는 것은 호상(互相) 자기(自己)네의 정략전략(政略戰略)에 의한 일종(一種) 시간(時間)을 쟁취(爭取)하는 수단(手段)에 불과(不過)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서두에 자신이 50년전인 1900년에 태어났다고 했으므로 1950년 무렵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56. 1929년 5월 14일자 가와코예(川越) 길림 총영사(吉林 總領事)가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朝鮮共産靑年會 組織ノ件」: 外務省 警察史 在吉林總領事館及敦化分館, 9640面
  57. 第三章 在外朝鮮人ノ狀況 / 4. 南北滿洲方面 고등경찰요사 (경상북도경찰부, 1934-03-25) p.128 : 공훈전자사료관
  58.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107~108
  59. 소화 6년 1월 19일 (길림 주재 석사(石射) 총영사 발신, 폐원(幣原) 외무대신 앞) 소화 5년 길림 지방 조선인 사정에 대한 건 / 불온단체(不穩團體) 1. 국민부(國民部) / 2. 본 국민부원의 남만한인청년총동맹 반동 간부 암살 독립운동사자료집 10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일본 외무성 보존 문서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p.476 : 공훈전자사료관
  60. [독립운동사 제5권 : 독립군전투사(상) - 2. 남만의 독립전선]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pp.618~621 : 공훈전자사료관
  61. 1930년 6월 25일자 길림총영사의 보고서 「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組織에 관한 件」 : 標題: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五巻 1.昭和五年 分割5 pp.75~78 金成柱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181300、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五巻(I-4-5-2-3_10_005)(外務省外交史料館)」
  62. 오늘의 역사: 간도와 간도 5-30 폭동 편- 2000.04.06 Radio Free Asia
  63. 間島韓人의 獨立運動과 中國의 對策 中央日報(남경, 1930.08.11) 기사 : 자료한국독립운동4(2)권 (연세대학교출판부, 1975) pp.1586~1588 (공훈전자사료관)
  64. 공산주의운동(共産主義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1) 조선공산당의 해체와<12월테제>·<9월테제> 신편 한국사 근대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4) 조선공산당의 해체와 당재건운동 (우리역사넷)
    조선 공산당 (朝鮮共産黨) 한국사 컨텐츠 (국사편찬위)
  65. 標題 : 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八巻 1.昭和五年八月ヨリ九月マデ 分割3 pp.14~20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183200、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八巻(I-4-5-2-3_10_008)(外務省外交史料館)」
  66.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180900、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五巻(I-4-5-2-3_10_005)(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五巻 1.昭和五年 分割1 p.70
  67. (文獻) 滿州事變後の在滿朝鮮人の民族主義運動 사상월보 제3권 제9호 1933-12-15 : 공훈전자사료관
  68. 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八巻 1.昭和五年八月ヨリ九月マデ 分割3: pp.14~20 재만조선공산당의 중국공산당 합류 (1930년 9월 23일 간도 총영사 보고문)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183200、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八巻(I-4-5-2-3_10_008)(外務省外交史料館)」
  69. 豊山(풍산)에出現(출현)햇든拳銃犯(권총범) 洪原(홍원)에서畢竟被捉(필경피착) 1930.09.04 동아일보 2면
    逮捕(체포)된拳銃犯人(권총범인)은 國民府員(국민부원)으로判明(판명) / 潜入目的(잠입목적)은軍資募集(군자모집) 1930.09.05 동아일보 2면
    地方法院(함흥지방법원)에서開廷(개정)된 國民府决死隊公判(국민부결사대공판) / 被告(피고)는十名(십명) 無期(무기)도求刑(구형) 1931.10.16 동아일보 2면
    豐山巡查殺害事件(풍산순사살해사건) 被告十名(피고십명)이全部控訴(전부공소) 1931.11.23 동아일보 2면
    警官三名(경관삼명)을殺傷(살상)한 國民府員四名控判(국민부원사명공판) 1932.03.08 동아일보 2면
  70. 최효일, 김형건, 박차석, 정계빈 등 판결문 1932/04/04 경성복심법원
    최효일 상고심 판결문 1932-06-06 (원문)
    무직 최효일(崔孝一) 28세 판결 소화 7년 형상 제7호 (번역) 독립운동사자료집 10 :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독립군 관계 재판 기록
  71. 최형우(崔衡宇, 1905~1950),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第一輯) (漢城, : 東方文化社, 1945년 12월 10일) p.25 : 김성주(金誠柱)가 북한 김일성임.
  72. 朝鮮○○軍(조선○○군) 男女三名(남녀삼명) 被捉(피착 동아일보 1931-03-26 2면
  73. 李鍾洛 부하 3명 又 피검 조선일보 1931.03.26 / 석간2 2 면
  74. 李鐘洛 部下 (이종락 부하) 三名(삼명)이 被逮(피체) 동아일보 1931-05-04 2면
  75. 송재윤, <文革春秋: 현대중국의 슬픈역사> 4회. “1948년 장춘 홀로코스트”(II) pennmike 2018.01.19
  76. 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八巻 1.昭和五年八月ヨリ九月マデ 分割3: pp.6~7 중국공산당 가입 - 소화5년(1930) 9월 22일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183200、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八巻(I-4-5-2-3_10_008)(外務省外交史料館)」
  77. 標題: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七巻 分割3 : 満州ニ於ケル共産黨ノ 直接行動 (朝鮮總督府 警務局, 昭和 五年 九月) pp.10~15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182500、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七巻(I-4-5-2-3_10_007)(外務省外交史料館)」
  78. 殺人과 治維違反罪로 最高十年을 求刑 국민부원 등 오명에 대한 공판 新義州裁判所에서 : 중국공산당원 崔昌杰 매일신보 1933-01-26 석간 07면 04단
  79. 『○○聯合會(연합회)』 鄭一隅氏 被殺(정일우씨 피살) 1931.01.14 동아일보 7면
  80. "한련회(韓聯會) 간부 정신(鄭信)씨 피살" 조선일보 1931.01.18 / 석간2 7 면
  81. 《아나키즘 등장하다⑩ 거성 김좌진 암살사건 : 청산리 대첩의 영웅, 공산주의 총탄에 스러지다》 중앙선데이 제285호 2012.08.26 : 이덕일 저, 『잊혀진 근대 : 다시 읽는 해방 전(前)사 1918 - 1945 (이덕일 역사평설)』 (역사의 아침, 2013.10.28) 10장에 수록.
  82. D-Story 60 : 김일성 회고록 속 동아일보 2010년 11월 30일
    최일천 (崔日泉, 1905.10.11 ~ 1950.11.05) (최형우의 본명) 북한지역정보넷
  83. 이명영(李命英, 1928 ~ 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 그 전설과 신화의 진상 규명을 위한 연구》 (신문화사, 1974) pp. 122 ~ 126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9) | 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중앙일보 1974.04.15 종합 3면
  84. 최형우(崔衡宇),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제1집 (漢城 : 東方文化社, 檀紀 4278[1945]년 12월 10일) p.31
  85. 김일성 푸르허 머슴살이의 진실 RFA 2017-03-17
  86. 김일성 내세웠다는 김혁·차광수의 진실 RFA 2017-03-24
    카륜지역에서 김일성의 활동과 노래 조선의 별 진실 북한개혁방송 2008-04-14
  87. 이윤환(李允煥)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이윤환(李允煥)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88. 標題: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十巻 分割1 p.29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183900、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十巻(I-4-5-2-3_10_010)(外務省外交史料館)」
  89. 朝革軍 首領(조혁군 수령) 李鐘洛 檢擧(이종락 검거) / 부하 두명도 가티 잡혀 / 長春驛(장춘역)에서 下車(하차)타 被檢(피검) 동아일보 1931.01.31 2면
    多數 部下 (다수 부하)를 派遣(파견) 領警(영경)과 交火(교화)도 數次(수차) 동아일보 1931.02.03 2면
    滿洲一帶(만주일대)를 攪亂(교란)하야 民主主義 國家建設(민주주의 국가건설) / 左翼民族團體(좌익민족단체)로 革命軍司令部組織(혁명군사령부조직) 1931.03.30. 동아일보 2면
  90. 嚴重한 警戒裡에 李鐘洛等九名送局 폭탄三개와 一건서류와 함께 八日新義州檢事局에 每日申報 1931년 04월 10일 07면 05단]
    滿洲를 土臺로 劃策한 大陰謀事件終豫 武器까지 購入하야 中國軍閥撲滅企圖 每日申報 1932년 05월 05일 07면 01단
  91. 韓國革命軍李鍾洛金光烈等의 被捕 <中央日報(南京) 1931년 2월 7일 기사> 자료한국독립운동4(2)권 (연세대학교출판부, 1975) pp.1588~1589 : 공훈전자사료관
  92. 이종락 수하 세금징수 분대장 김성주 RFA 2017-03-03
  93. 標題: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十巻 分割2 p.40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4013184000、日本共産党関係雑件/朝鮮共産党関係 第十巻(I-4-5-2-3_10_010)(外務省外交史料館)
  94. 1931년 3월 23일 前 正義府 幹部(전 정의부 간부) 高割信(고할신) 中國官憲(중국관헌)에 檢擧(검거) 1931.03.31 동아일보(東亞日報) 2면 : 【장춘】전 정의부(前正義府) 중요 간부이던 고할신(高割信) 一(일)명 고유천(高維天)은 지난 二十三(이십삼)일에 길림 중국관헌...
  95. 邊達煥等 最高 七年 求刑(변달환등 최고 칠년 구형) 1933-02-01 동아일보 3면
  96.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10) | 김성주의 살인벽 | 총을 쓰지 않고 타살·교살을 밥먹듯 중앙일보 1974.04.17
  97.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신문화사, 1974) p.135
  98.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권력(權力)의 역사(歷史)》 제2판 (종로서적 1989) pp.303~305
  99. 세화군(世火軍) 군정위원회(軍政委員會) 위원(委員) 김성주(金成柱) : 외사경찰보(外事警察報) 제124호(1932년 11월) pp.44~45 : 세화군에서 북한 김일성의 공식적인 이름은 김성주(金成柱)였다는 증거임. 하지만 이 무렵 김일성(金一星) 또는 김일성(金一成)의 이름을 쓰기도 한 것으로 보임.
  100. 朝鮮(조선)○○軍(군) 委員等改選(위원등개선) : 【東方司令部(동방사령부)라고 改稱(개칭)】 李鐘洛(이종락) 逮捕以後(체포이후)로 1931.5.23 동아일보(東亞日報) 2면
  101. 소화 4년 9월 12일 (통화(通化)분관 주임 발신, 폐원(幣原) 외무대신 앞) 불령선인 검거 송치에 대한 건 / 1. 남만주의 상황 독립운동사자료집 10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관한 문서 속보의 건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pp.603~619
  102. 國民府中央委員長(국민부중앙위원장) 玄益哲突然被逮(현익철돌연피체) 1931.09.02 동아일보 2면
  103. 소화 6년 9월 9일자 (관동청(關東廳) 경무국장 발신, 외무차관 수신, 통보 요지) 봉천(奉天)에서 체포된 국민부 수령 현익철(玄益哲)의 경력에 관한 것 독립운동사자료집 10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일본 외무성 보존 문서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pp.628~630 : 공훈전자사료관
  104.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4. 抗日遊擊隊 國史館論叢 第4輯, (국사편찬위원회, 1989-10-09)
  105. 김일성의 고동뢰(高東雷) 소대장 일행 10명 살해
  10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3권 한국독립당 Ⅰ > 기관지 > 『震光』 > 『震光』 제6호(1934년 9월호)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그리고 同年(1932년) 2月 上旬에 柳河縣 境內에 駐屯이든 朝鮮革命軍 第3中隊 副官 黃奎淸이란 놈이 該 中隊長 沈龍俊 同志가 出他한 機會를 타서 敵에게 投降하고 走狗가 되어, 通化 倭領事에 가서 走狗輩 及 日僞軍警을 몰고 上記 柳河駐屯地로 드러가서 自己가 親手로 經理하던 武器 一部 20餘柄을 들추어 倭敵에게 주엇으며, 또 該隊 小隊長 車用陸 駐屯當所를 襲擊하야 車隊長 以下 兵士同志 李秉學 · 崔鎭英 · 白○○ 等 6名이 被逮되엿는데, 上 車用陸 同志는 被捕當時 飛彈에 中擊되야 面部가 破裂重傷되엿는데, 上 同志는 本來 運動線에 十餘 星霜의 아름다운 歷史를 所有햇음으로 朝中人士가 欽佩하던 터이라. 놈들 없는 짬을 타서 自己 面部傷處에 鮮血이 흐르는 肉塊와 骨碎를 뜯어내어 白紙上에 ‘朝中民衆은 合作하야 抗日하자’는 等 數 十種의 血書를 서서 各 中國人士에게 돌려 주엇다. 本來 9 · 18事變에 刺戟을 받은 中國人士들의 腦海에는 비록 外族일망정 敵手에 끌리여가는 立場과 環境이 同一한 사람의 告別의 血書를 받은 그 刹那 사이의 感慨無量한 쎈쎄이슌을 禁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可想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上 走狗 黃奎淸은 興京縣에서 第3中隊 小隊長 高東雷 一行의 義彈에 銃殺되엿다.

  107.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권], (지원출판사, 2017년 01월 25일) : 고동뢰 사건 pp.186~188; pp.225~228
  108. 김일성의 첫 무장활동은 조선혁명군 심용준 (沈龍俊) 중대 무기 약탈
  109.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 비명(匪名)『김일성(金日成)』을 습명(襲名) / 중학(中學)을 중퇴(中退)하고 18세(十八歲)부터 녹림생활(綠林生活)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4/18, 6면
  110. 세기와 더불어 7권 19장 2절 : 족제비 사냥군 - 심룡준
  111. 眞僞 金日成 列傳 (13회)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112.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 정치위원 呂政(여정) 手記(수기) (1회) 1990.04.22 동아일보 3면 / 呂政(여정, 본명 강수봉), 「붉게 물든 대동강」, (동아일보사, 1991.07.01) : 유격대 입대 당시 그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였음.

    이국진(李國鎭, 1905 ~ 1980) 前(전) 국가최고검찰장의 증언.

    "1932년에 들어와서야 中國(중국)공산당이 직접 이끄는 反日(반일) 유격대가 조직되기 시작했소. 항일홍군유격대라고 불린 이 유격대는 처음에는 인원이 많아야 10명 내외였으며 총도 몇 자루 없었소. 1932년 초겨울 安圖(안도) 유격대에 金成柱(김성주)라는 학생옷 차림의 청년이 참가했는데 그는 원래 3년제 소학교에서 글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소. 이 사람이 바로 金日成(김일성) 동지요. 그 당시 유격대를 지휘한 이들은 중국인 周保中(주보중) 楊靖宇(양정우) 李廷祿(이정록) 董章榮(동장영) 등과 조선인인 李紅光(이홍광) 李東光(이동광) 崔庸健(최용건) 金策(김책) 李光(이광) 등이었소. 부대 명칭은 처음에 반일홍군유격대였고 33년1월 중국 공산당이「만주의 각급 당조직과 전체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다시 36년 2월 중국공산당 공산국제주재대표단의「동북항일연군통일군대건제선언」이 발표된 뒤 해방될 때까지「동북항일연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소"

  113. 중국 공산당기록 김일성 혁명사 전무 아시아투데이 2015. 04. 03
  114. 4.25 북한군 창설 85주년은 날조된 것 올인코리아 2017/04/24
  115. 북한의 인민군 창건일 날짜 변경 의도 평가, 세종연구소 정성장 실장 spnews 2018.01.23
  116. 김일성 혁명역사 강좌 (7) 민생단 사건의 진실과 김일성의 역할 북한개혁방송 2008-04-29
  117. 장세윤(張世胤),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연구(硏究) : 3. 조선혁명군과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의 관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년) pp.332 ~ 337.
  118.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三) 일단(一旦)은 귀순(歸順)을 결심(決心), 집요(執拗)한 양정우(楊靖宇)의 특무대(特務隊)에 일신(一身)을 도피(逃避) 滿鮮日報 1940/04/21, 6면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四) 양정우(楊靖宇)의 포위협위(包圍脅威)로 귀순공작(歸順工作)은 수포화(水泡化), 공작원(工作員)의 하나인 이종락(李宗洛)을 사살(射殺)! 滿鮮日報 1940/04/23, 6면
  11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민특위 조사 기록 : 김창영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중에서 "김창영 > 피의자신문조서(제2회) : 단기 4282년(1949) 4월 19일"에 소화 15년[1940] 1월 중순 박차석이 김일성 부대에 들어가서 귀순 조건을 받아 온 후 이종락이 협상차 들어갔다가 양정우가 부하 400명을 이끌고 들이닥쳐 협상이 파탄나고 이종락은 죽은 것으로 나옴.
  120. 세기와 더불어 7권(계승본 1편) 제19장 시련의 언덕을 넘어 (1937년 11월 ~ 1938년 11월) 8. 남패자의 수림 속에서
  121. 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统计表 :《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1942年——1945年7月)》甲65卷 pp. 115 ~ 137。
    东北抗联 第二, 三路军 越境人员统计表 :《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1942年——1945年7月)》甲65卷, p.191
  122. 고학력자 빨찌산 서철(徐哲, 1907~1992)
  123. 김일성(金日成), 안길(安吉), 서철(徐哲)이 왕신림(王新林)에게 올린 보고서
  124. 东北抗联B野营一九四一年、一九四二年被派遣各分队人员名单(1944年10月13日)《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1942年——1945年7月)》 甲65卷 p.297
  125. 《西望长安》的现实版——对所谓八十八旅老战士刘义权身份的质疑 : 유의권(劉義權, 刘义权, 1930~)의 당시 이름은 刘玉全임.
  126.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032038500、満州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A-6-2-0-2_8)(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5 昭和16年4月18日から昭和16年6月11日 : p.45 : 5월 15일 훈춘에서 김일성 부하 주명증(周明增, 28세) 체포 - 4월 초순 김일성 이하 28명 입만.
  127. 金日成, 抗联第一路军略史 (抗聯第一路軍略史), 东北抗日联军 史料(下), 东北抗日联军 史料 编写组, 中国共産党史 资料出版社, 1987, pp.665~679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번역)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pp.403-414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7) 東北항일聯군 활동기 金日成 자필 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종합 8면
  128. <a href="http://podvignaroda.ru/?#id=46172039&tab=navDetailManAward" target="_blank">Цзин Жи-чэн 1912г.р.</a>  : 김일성에 대한 적기 훈장 수여 문서
  129. 한재덕(韓載德, 1911 ~ 1970), 「조선해방 위하여 혈투 20년 : 민주 건국을 말하는 김일성 장군(金日成 將軍)」,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 95
  130. 한재덕(韓載德), 金日成(김일성)을 告發(고발)한다 : 〈金日成(김일성) 直屬記者(직속기자)의 手記(수기)〉 (2회) 1962.05.05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發(고발)한다 (3회) 1962.05.06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發(고발)한다 (4회) 1962.05.07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發(고발)한다 (5회) 1962.05.08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發(고발)한다 (6회) 1962.05.09 동아일보 2면
  131. 한재덕(韓載德), 「평양시 민중대회 성황 (평양민보 창간호 1945년 10월 15일자)」,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 101 ; 연설 요지 p.106
  132.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p.88~89
    김일성 환영대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년 09월 05일
  133.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0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 66
  134. 한재덕(韓載德),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5회) 1962.05.18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6회) 1962.05.19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7회) 1962.05.20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8회) 1962.05.21 동아일보 2면 /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19회) 1962.05.22 동아일보 2면 /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 조선노동당 치하의 북한 회고록』, 서울, 내외문화사(內外文化社), 1965
  135. 한재덕(韓載德), 「가족환영위안회에서 김일성 장군(金日成 將軍) 정견 발표」(평양민보 1945년 10월 20일자),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109
  136. 한재덕(韓載德),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빗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찻어서」,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 1946.07.25) p.81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 빛나는 혁명가(革命家)의 집을 찾어서」, 『김일성 장군 개선기(金日成 將軍 凱旋記)』 (평양, 민주조선출판사, 1947.11.20) p. 67
  137. 오영진(吳泳鎭, 1916-1974) 저(著), 『蘇軍政下의 北韓: 하나의 證言』 (서울 : 國民思想指導院, 1952. 06. 10) / 蘇軍政下의 北韓 : 하나의 證言 (서울 : 中央文化社, 1983, 1952년 초판의 재발간) p.96 ~
  138. 孫世一의 비교 評傳 (83)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朝鮮民主黨의 創黨과 新義州學生들의 蜂起 월간조선 2011년 2월호
  139.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140. Kbs News 2010.06.24 (22:03)
  141. 'Stalin Had Final Say in NK's Plan to Take S. Korea' KBS World Radio 2010-06-25 08:58:29
  142. Kim Donggil, Stalin’s Korean U-Turn: The USSR’s Evolving Security Strategy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24, no. 1 (June 2011,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p.91 : Stalin had ardently opposed a North Korean invasion of the South, turning down leader Kim Il Sung’s forty-eight requests for permission to att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