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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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대식(閔大植, 1882년 ~ ?)은 일제강점기의 은행가이다.

생애[편집]

유명한 갑부이며 조선귀족민영휘의 소생 중 맏아들로 한성부 출신이다. 본래 대한제국 군인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1903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 전역 후 1920년 민영휘의 뒤를 이어 은행업에 뛰어든 뒤 조선 실업계의 거물로 활동했다. 민대식은 1931년에 호서은행을 합병하여 동일은행을 창설하고 은행장격인 두취가 되었다.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1][2] 이 책자에 따르면 "재계의 동향을 살펴 실무를 통제하는 일은 그의 독무대"였으며 "재계에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그가 나서서 조정역을 맡아 힘쓰지 않은 일이 없다"고 하여 민대식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조선신탁회사, 조선맥주주식회사 취체역과 경성전기사회 감사역을 지냈고, 조선금융제도조사위원회 촉탁으로도 활동했다. 1930년에는 경기도 도평의회에 관선 평의회원으로 들어갔고, 그 후 경성부 상공회의소 부대표로도 선출되었다.

1920년대부터 동민회, 조선불교단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3] 《조선공로자명감》에 실린 인물평에 따르면 소극적인 은행가가 아닌 용맹심을 갖춘 분투가, 정력가로 묘사되어 있어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아버지의 재산을 많이 물려받고도 장례를 초라하게 치러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4]

광복 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발효되었을 때 생존해 있어 반민특위의 조사 대상자였으나, 반민특위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무혐의 판정이 내려져 처벌은 받지 않았다.

사후[편집]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경제 부문에 선정되었고, 곧이어 최종명단에도 등재되었다. 다만 요절한 동생인 민천식 및 민천식의 양자 민병도는 무혐의로 등재에서 제외되었다. 민병도는 가업을 이어 은행업에 종사하여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5]

한편, 1937년강원도 춘천부 동면에서는 면민들이 성금을 모아 민형식과 민대식, 민규식 형제의 송덕비를 세웠으며, 2008년에 친일 행적 논란으로 비석이 철거되었다.[6]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성강현 (2004년 3월 18일).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일요시사. 2008년 6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3월 6일에 확인함. 
  2. 성강현 (2004년 3월 18일).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일요시사. 2008년 6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3월 6일에 확인함. 
  3.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27일).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237,570쪽쪽. ISBN 8995330724. 
  4.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민영휘 : 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서영희)〉.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5. 박미숙 (2006년 3월 21일). ““군사정권에 저항한 한은 총재” - 5일 타계한 故 민병도 전 한국은행 총재”. 《이코노미스트》 (제829호). 
  6. 민족문제연구소 (2008년 8월). “초등학교에 서 있던 친일인사 송덕비 기증 받아”. 《민족사랑》: 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