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누란에서 나온 조각된 목재(3-4세기) 고대 서구문명의 영향을 보인다.

누란(樓蘭, Loulan)은 현재 중국령인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고대의 작은 도시 국가였다. 그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국가를 누란국이라 하였다. 서역의 남도와 이어져 공작하 하류의 로프누르 호의 서안에 위치하며 비단길 교역의 중요한 도시였다. 약 1,600년 전 누란국은 소실되었고 옛 성터의 유적만 남아 있다.

기원전 77년에 한나라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면서 나라 이름을 선선(鄯善)으로 개칭하였지만 그 후에도 누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역사[편집]

누란으로 불리는 도시 또는 국가가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옛날 신석기 시대로부터 거주가 시작되었던 것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고 있어 이른바 「누란의 미녀」로서 알려진 미이라는 입고있던 의복의 탄소연대측정에 의해서 BC 19세기 무렵의 인물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문헌에 '누란'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사기》 '흉노열전'에 수록된 편지 중에서 발견된 것이 최초(기원 전 2세기)이며, 그 사이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 편지는 흉노의 지배자 묵돌선우전한문제에게 보낸 것으로, 이 편지에서 모돈 선우는 월씨에게 승리해, 누란·오손·호게 및 근처의 26국을 평정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편지는 문제 4년(BC 176년)에 보내진 것이므로, 누란은 적어도 BC 176년 이전에 형성되어 월씨의 세력권에 있던 것이다. 그리고 BC 176년경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한서》 ‘서역전’에 의하면, 서역을 전체를 지배하에 둔 흉노는 언기, 위수, 위려의 사이에 동박도위를 두어 누란을 포함한 서역 여러 나라에 세금을 부과하고, 하서회랑에 수만의 군세를 두어 그 교역을 지배했다.

소국과 대국의 사이에[편집]

BC 141년에 한 무제가 즉위하면서 한나라는 대 흉노 정책을 강경책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에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서 서방으로 이동하고 있던 월씨(대월지)와 동맹을 맺기 위해 장건이 파견되어 그의 견문록에서 누란도 접할 수 있다. 그 여행에서 장건은 두 번이나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 당시 서역에 대한 흉노의 지배가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나라는 기원 전 121년에 표기장군 곽거병의 지휘로 대규모의 흉노 정벌군을 출정시켰다. 곽거병은 기원 전 119년에는 막북의 흉노 본거지를 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이 결과 한은 본격적으로 서역 경영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기원 전 115년에 설치한 서역사군은 한나라의 서역 진출의 단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서역의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게 된 한나라는 서역 여러 나라와 서방까지 견사나 대상을 많이 파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역의 증대로 한나라 사람들(이 중에는 신흥 교역시장에 활로를 찾아낸 빈민도 많았다고 한다)과 서역 여러 나라와의 사이에 충돌이 빈번하게 발발해 서역 여러 나라에서는 반한 감정이 증대했다. 특히 누란과 고사는 한의 진출을 싫어해 흉노와 가깝게 지내며 한나라 사신의 왕래를 방해하는 등의 방해정책을 펼쳤다. 이을 우려한 한 무제는 기원 전 109년, 종표장군 조파노와 누란에 견사로 파견된 경험이 있는 왕회에 명해 군사 수만명을 동원해 누란과 고사에 무력을 행사했다. 기병 700기와 함께 선행한 조파노의 공격을 받아 누란은 점령되고 국왕은 사로잡혔다. 이에 누란은 왕자 1명을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한나라에 복속 당했다. 서역의 요충지 누란이 한나라에 복속되자 흉노는 좌시할 수가 없었다. 흉노도 누란을 재차 공격하자, 누란은 흉노에게도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게 된다.

이러한 한과 흉노의 서역 주도권 행사를 위한 싸움은 오랜 기간 계속되었고, 누란의 정치는 그 상황에 따라 좌우되었다. 다시 한의 군사 개입을 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제는 대완한혈마를 얻고 싶어 사자를 대완에 파견했지만, 대완은 한나라 사신의 무례한 태도에 분개하여 되돌려 보내고 말았다. 그 사신은 귀향하는 길에 대완 동쪽의 욱성성(郁成城)에서 습격을 당해 살해당하고 재물은 빼앗겼다. 분개한 한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이광리 장군의 지휘 아래 두 차례 걸쳐서 대군을 파견했다(BC 104년 - BC 101년). 한나라의 대완 원정 길에 누란왕은 다시 한나라에 사로잡혀 무제의 힐문을 받게 된다. 무제는 누란이 흉노에게도 인질을 보내 복속된 일을 꾸짖었다. 누란왕은 "소국은 대국의 사이에서, 양속되어 안심할 수 없다"고 답하고 양속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나라 영토에 이주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여 누란왕은 귀국을 허락 받았다. 한나라가 누란 방면의 군세를 계속 강화하자, 흉노의 영향력은 점점 약해지게 되었다.

선선국[편집]

기원 전 92년에 상술의 누란왕이 사망하자, 누란은 한나라에 인질로 보낸 왕자의 귀국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자는 한나라의 법을 어겨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한나라의 귀국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인물이 왕이 되어, 그도 한나라에 왕자 위도기를 인질로 보내고, 흉노에게도 왕자 안귀를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이 왕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 흉노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왕자 안귀가 귀국해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이에 대해 한나라는 입조를 요구하고 사자를 보냈지만, 안귀왕의 후처 등은 한이 인질로 보낸 왕자를 귀국시키지 않았던 사실을 이유로 들며 입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변함 없이 계속 되는 한나라 사신과의 충돌로 인해 누란에서 한나라 사절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나라는 BC 77년 대장군 곽광의 지시에 의해서 평악감 전개자에게 친흉노파 안귀왕 암살을 사주하여, 인질로 장안에 있던 왕자 위도기를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했다. 또 국명을 선선(鄯善)으로 바꾸고, 한나라군이 누란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도기에게는 인장과 함께 궁녀를 아내로서 주었다. 여기서 「鄯」이라고 하는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 누란의 이름을 바꾸고, 인장과 아내를 준 것은 누란 왕국이 한의 괴뢰가 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내부에의 한나라군이 주둔한 것은 위도기가 자신의 기반이 약한 것을 걱정해 스스로 한에 의뢰했다고 전해진다. 한군은 위도기왕의 진언에 따라 이순성에 주둔하였고, 이곳은 곧 서역남도에 있어서의 한나라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가 되었다.

누란이 한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나서, 흉노의 동박도위인 일축왕이 당시 정길을 통해 한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BC 60년). 이 결과 한은 서역 남도에서 서역 북도까지 전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러, 새롭게 서역도호를 두고 정길을 도호로 삼았다. 이후 한나라의 서역 지배는 왕망에 의해서 전한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 선선으로 이름을 고친 누란도 괴뢰 왕국으로서 그 지배하에 계속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서역 전쟁[편집]

한나라의 번영으로 인한 동서 무역의 발전은 서역의 경제를 윤택하게 하였다. 26~36개의 서역 여러 나라가 전한 말에는 55개국으로 증가하였다. 이것은 기존의 왕국이 분화된 것이 아니라, 교역의 활황에 따른 새로운 오아시스 도시 국가가 형성된 것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나라의 힘에 의한 정치 안정도 이러한 경제의 활황에 박차를 가했다.

한나라에서 왕망의 반란의 인해 새롭게 신나라가 성립되었다. 왕망의 서역 정책은 누란을 포함한 서역 여러 나라들의 반감을 사서 대부분(사차, 야르칸드는 제외) 다시 북쪽의 흉노로 돌아서게 되었다.(신나라는 오래가지 못하고 전복되어 후한이 성립된다). 그러나 북쪽 흉노는 서역 여러 나라들이 한의 지배하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던 것을 문제 삼아 조공품을 내세웠기 때문에 서역 여러나라들은 다시 한나라에 복속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또 서역 여러 나라 중 가장 강세를 자랑한 사차의 국왕 현은, 처음부터 선선왕 안 등과 함께 후한에 조공을 실시해, 광무제로부터 서역도호의 인수를 받았지만, 둔황 태수 배준이 「미개인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를 내세워 다시 빼앗았다. 이 때문에 현은 한나라와 적대하게 되어, 독자적으로 대도시호를 칭해, 북쪽 흉노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서역 여러 나라를 복속시켰지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서역의 18국이 한나라로 복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서역 여러 나라에서 한나라의 지원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한의 광무제는 내정의 불안정을 이유로 적극적인 개입은 하지 않았다. 둔황 태수 배준은 마치 한나라가 새롭게 서역도호를 파견한 것 같이 위장 공작을 펼쳤지만 효과는 없었고, 현은 한의 개입이 없는 것을 확신하고, 한에 가까운 선선에 대해 한나라와의 국경 교통로를 봉쇄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중계 무역으로 나라를 이루는 선선은 이를 거부하고, 선선의 국왕 안은 사차국의 사자를 참살하고 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사차 왕 현은 선선을 공격해 1000명 남짓을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선선의 국왕 안은 남쪽의 산악으로 피해 한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광무제가 다시 군사파견을 거정하는 답신을 보냈기 때문에, 선선국은 다른 여러 나라와 함께 흉노와의 동맹을 재개했다.

서기 61년에 사차왕 현이 우국(호탄)과의 싸움 중에 암살되면서 서역의 정세는 일변했다. 사차국의 지배하에 있던 제국은 대부분 독립해 서로 싸웠지만, 선선은 이 싸움에서 여러 나라를 병합해 서역의 일각에 세력을 쌓는 데 성공했다. 같은 시기에 우국, 차사국(투르판), 구자국(쿠차), 언기국(카라샤르) 등이 강국으로 할거 했다. 이 시기에 선선에서 작성된 한문 문서에는, 옛 지명인 누란을 사용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후한의 서역경영[편집]

세력을 확대한 선선은 로프 노르 호반에서 서쪽 정절국(체드타)까지, 서역 남도 변경 영역을 동서 900km 넘게까지 지배하게 되어, 1세기말 무렵부터 전성기를 맞이했다. 교역도 활발하게 되어, 발견된 유물은 이 시기의 경제적 번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선선의 번영은 3세기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나 국력의 증대로 정치적 지위는 상승했지만, 한이나 흉노의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그 후 한나라의 개입이 본격화하면, 선선은 그 패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광무제가 뒤를 이은 명제(57년-75년)의 시대가 되면, 다시 한나라는 서역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서기 73년에 한은 흉노를 공격하였고, 거의 같은 시기에 서역에도 출병해 차사국을 제압하였다. 서방에 견문을 남긴 감영을 파견한 것으로 유명한 반초가 활약한 것도 이 시기이며, 그의 일화로 알 수 있는 당시 선선(누란)의 상황은 복잡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후한서》 반초전에 의하면, 73년에 반초가 36명의 부하와 함께 선선에 파견되었을 때, 선선왕 광은 처음에는 반초를 정중하게 대접을 하였는데, 흉노의 사자가 선선에 방문하면서, 광은 흉노 사자의 심기가 불편해질 것을 두려워 하여 반초의 대우를 떨어뜨렸다. 흉노 사자 때문에 대우가 악화된 것을 들은 반초는 격분하여, 어느날 밤 은밀하게 흉노사자의 파오를 불질러 급습하고 그 사자 33명과 하인 100여 명을 학살했다. 이 때의 남긴 유명한 반초의 말이,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를 잡을까?"라는 말이었다. 다음 날 아침 흉노 사자의 목을 발견한 선선왕 광은 경악하여, 한에 대한 충성을 약속하고 허락을 청하였다. 이 결과 선선은 다시 한나라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게 되었다. 반초는 서역 제국의 대부분을 지배하에 넣었고, 이 공적으로 인해 서역도호로 31여년을 서역 경영에 종사하였다. 선선은 그 패권 하에서 왕통을 이었다. 후한의 서역 경영은 반초의 사후 잠시 단절되었다가, 123년에는 반초의 아들 반용에 의해서 지속되었다. 반초의 임기에도, 반용의 임기에도 본토에서 투입한 병력은 적고, 가끔 오는 본국의 원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역 여러 나라에서 자체적으로 군사를 임용하고 군사활동에 충당하고 있었다.

카로슈티 문자의 시대[편집]

2세기 초반 이후, 누란(선선)에 관한 기록이 부족한 시대가 계속 된다. 상술같이 이 시대의 선선은 후한의 영향 하에서 경제적으로는 번영했다. 2세기 후반에 들어가면, 후한 말의 동란(이른바 삼국시대) 때문에, 서역에 대한 중화 왕조의 영향력은 저하되었다. 이 때문에 한문 서적에 선선의 정보가 드물게 되었고, 3세기 전반에 들어가면 선선 자체 문자로 된 사료가 풍부하게 출토하게 된다. 이것들은 프라크리트어의 일종인 간다리어카로슈티 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문서의 양식이나, 그 중에 등장하는 왕호가 쿠샨 왕조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 선선(누란)이 쿠샨계의 이주자에 의해서 정복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실태는 불명확 하지만, 중화 왕조의 영향력의 저하나 쿠샨왕조의 융성에 따라, 누란이 서방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카로슈티 문자의 해석으로 이 시기의 선선이 로프노르 호수 주변에서 정절국(체드타)에 이르는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한문으로 된 실용 문서도 다수 발견되고 있어 삼국시대의 소란에도 한나라 상인들은 선선을 방문해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문서는 상업 문서나 명령서, 징세기록 등이 대부분이고, 정치적 사건의 기록은 부족해 3세기의 선선의 정치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선선 서쪽 근처의 우전(호탄, 당시의 문서에서는 코탄나)과 국경에서 자주 분쟁을 일으킨 티베트계 강족의 일파인 스피의 침입과 약탈로 골머리를 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실용문서와 출토품으로 당시 선선의 국정이나 사회상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선선의 멸망[편집]

삼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3세기 후반 진나라도 한과 같이 서역에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는 누란에서 출토된 한문 문서 안에는 진대의 물건이라고 볼 수 있는 호적의 단편이 발견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진나라는 곧 화북의 지배권을 잃어버리고, 이른바 오호십육국 시대가 도래했다. 이 시대에 양주의 지배자가 된 전량은 서역으로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서기 335년 전량의 장군 양선의 공격을 받은 선선은 구자국(쿠차) 등과 함께 전량에 입궐하였고, 당시의 선선왕 원맹은 여자를 조공하였다고 한다. 전량은 서역장사를 두고 이 지방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후 선선은 뒤이은 북량의 지배자에게도 입조를 계속했다.

전량은 전진(前秦)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선선왕 휴밀타는 스스로 서역도호 설치를 요구해 382년에 전진에 입궐하게 된다. 휴밀타의 다음의 왕, 고원질은 전진후진의 싸움에서 전진에 원군을 보냈다. 422년에는 선선 비룡이 북량에 입궐했다.

그러나 북량은 후에 선선의 적이 되었다. 439년에 북위의 북량 침공이 시작되면서 북량은 패배하였고, 그 지배자 저거무휘(沮渠無諱)나 저거안주(沮渠安周)는 둔황을 경유해 가오창으로 후퇴하려고 했다. 이 결과 그 도상의 중요 거점인 선선(누란)을 제압하려, 441년에 안주가 선선을 공격했다. 누란은 최초의 공격은 격퇴했지만, 다음 해 저거무휘가 수만의 군세를 이끌고 선선으로 쇄도하자, 패배를 깨달은 선선왕 비룡은 4000가 남짓되는 인원과 함께 차말(체르첸)로 피했다. 《위서》에 의하면 이것은 누란 인구의 약 반수에 이르는 수였다고 한다.

본국에는 공자 진달 등이 남아, 북량의 지배 아래 왕호를 칭했지만, 북량의 선점령에 의해서 교역로가 봉쇄되는 것을 두려워한 북위는 장군 만번귀의 지휘 아래에 445년에 선선을 점령하였고, 선선왕 진은 도망을 하였다. 그리고 448년에 교지를 내려 한목이 선선왕에 봉해졌다. 그 통치형식은 군현을 설치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독립 왕국으로서의 선선(누란)의 역사는 완전히 끝나게 된다. 누란의 도시 자체는 7세기 무렵까지는 존속하고 있었지만, 이미 지난 날과 같이 서역의 여러 나라를 통치하는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참고 문헌[편집]

  • 『楼蘭王国史の研究』(長澤和俊 雄山閣 1996년)
  • 『楼蘭王国 -ロプ・ノール河畔の四千年-』(赤松明彦 中央公論新社 2005년)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