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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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료(張遼, 169년? 170년? 171년?[1] ~ 222년)는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문원(文遠)이며 병주(幷州) 안문군(雁門郡) 마읍현(馬邑縣) 사람이다.

이름 장료(張遼)
시대 후한
생몰 169년? 170년? 171년? ~ 222년
문원(文遠)
본관 · 출신 병주 안문군 마읍현
관직
작위
소속 하진정원동탁
여포조조문제

생애

장료

장료의 선조는 전한섭일(聶壹)로, 섭일이 흉노(匈奴)를 해치려 했던 일 때문에 원수를 피하여 성씨를 고쳤다.

젊어서 군리가 되었으며, 병주자사 정원(丁原)이 종사로 삼아 군을 이끌고 수도로 가게 했다. 대장군 하진(何進)은 장료를 하북으로 보내 병사 천 명을 모았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에는 하진이 십상시에게 암살당하고 정국이 혼미한 틈을 타 동탁(董卓)이 조정과 중앙군을 장악한 상태여서, 장료도 동탁에게 속했다. 동탁이 패망한 후 여포(呂布)를 좇아 서주까지 갔으며, 노국의 상에 임명되었다. 조조(曹操)와 유비(劉備)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여포가 패망하자, 노국에 주둔하고 있다가 부하들을 이끌고 항복했다.

조조가 원가를 칠 때 종군하여, 별도로 군대를 이끌고 기주 조국과 상산군을 공략하고, 여러 산적들과 흑산적 손경(孫輕)의 항복을 받았다. 원담(袁譚)을 칠 때에도 종군하여 원담을 깨트리고, 별도로 군대를 이끌고 바닷가 지역을 공략하고, 요동의 도적 유의 등을 깨트리고 (鄴)으로 돌아와 탕구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다시 별도로 형주를 공격해 강하군의 여러 현을 평정하고 돌아왔다. 이때 도정후에 봉해졌다. 조조를 따라 오환과 손잡은 원상(袁尙)을 쳤는데, 백랑산에서 갑자기 오환과 조우하자 심히 기백을 떨치며 조조에게 싸울 것을 권하고, 조조로부터 대장기를 수여받으며 이를 공격해 대파하고 오환의 선우 답돈(蹋頓)을 베었다.

건안 13년 겨울, 적벽대전 때, 조조를 모시고 도망치던 도중 이를 추격하던 손권(孫權)의 부하 황개(黃蓋)를 활로 쓰러뜨렸다고 한다. 이후 장료는 오와의 전투, 특히 합비에서 크게 활약했다. 조조가 한중을 정벌하러 대군을 이끌고 가자, 합비를 노린 손권이 10만 군을 이끌고 출정한다. 장료는 오의 기세를 꺾기 위해 800명의 병사만 이끌고 손권을 급습하여 오군의 기세를 누른다. 이 후 합비의 전병력을 들어 퇴각하는 손권의 뒤를 친다. 여몽이 서성, 반장 등을 이끌고 저지하려 하나 성공하지 못했고, 여몽의 저지선을 뚫은 장료는 능통의 정예병까지 전멸시키며 큰 공을 세운다. 이 전투로 인해 오나라에서는 장료라는 이름만 들으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멈추었고, 오의 군사들이 장료를 두려워 하여 이 후 합비로 진출하려는 오의 전략에 큰 차질을 빚게 하였다.

222년, 위의 황제 조비가 오를 정벌하기 위해 삼군을 일으켰고, 투병 중이던 장료 역시 조휴, 장패와 더불어 무창 지역으로 진군한다. 오는 위를 기습하려 하지만 도중에 태풍이 일어 여범의 수천 군사가 물에 빠져 죽는 등, 큰 타격을 받자 조휴는 총공격을 명한다. 이에 장료 역시 참전하지만 이 전투 후 병이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2] (실제 '울던 아이 장문원 온다는 말에 울음 그친다'라는 속담이 동오에서 유행하였다.)

삼국지연의》의 장료

여포를 섬기기 전의 행적은 나오지 않으며, 여포가 서주에 있을 때에 사서에서는 노상으로 있어 여포 휘하에서 활약이 보이지 않는 것과 달리 여포를 항상 따라다녔다. 여포가 패망할 때, 장료는 여포와 함께 사로잡히고, 끝까지 발악하는 여포를 꾸짖었다. 조조는 장료도 죽이고자 했으나, 관우(關羽)와 유비가 장료의 의로움을 잘 알고 관우와 유비의 설득을 받아, 장료는 살려서 거두게 된다.

원술(袁術)을 죽이고 서주에서 자립한 유비를 조조가 쳐 몰아내고 하비성에 남은 관우를 궁지에 몰았을 때, 장료가 나서서 관우를 설득하여 관우가 세 조건을 들어 항복하게 했다. 관우가 유비를 찾아 떠나면서 다섯 관을 뚫고 여섯 장수를 죽이고 마침내 하후돈(夏侯惇)과 싸우게 되었을 때, 조조의 명을 받고 관우 일행이 안전하게 유비에게 가도록 하여 둘의 싸움을 말렸다.[3]

합비 전투에서 태사자(太史慈)가 사인 송과와 함께 모의해서 합비성을 함락시키고자 하는데, 장료는 이 계책을 간파하고 반격하여 성 내에 매복하였다가 난입한 태사자 군을 공격하였다. 태사자는 화살을 맞고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222년에 서성(徐盛)의 위성계(僞城計)에 걸려들어 화공에 크게 당한 조비(曹丕)를 구출하려 하다가, 정봉(丁奉)의 화살에 맞고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장료의 친족 관계

주석

  1. 여포가 서주를 차지한 후 노국상에 임명 되었을 때 장료의 나이는 28세였다. 여포가 서주를 차지한 시기는 196년부터 198년이므로 169년부터 171년 중 하나이다.
  2. 진수: 《삼국지》권17 위서 제17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중 장료전
  3. 삼국지 연의

틀:삼국지 중요 등장 인물

틀:Link 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