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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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날짜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장소 견내량, 한산도 앞바다
결과 조선군의 승리
교전국
Flag of the king of Joseon.svg
조선
Toyotomi mon.png
일본
지휘관
충무공 이순신
원균
이억기
권준
정운
무의공 이순신
어영담
김완
이영남
송희립
황세득
한백록
우치적
신호
Wachigai.svg 와키자카 야스하루
Wachigai.svg 와키자카 사헤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마나베 사마노조
병력
전선 56척 전선 73척
수군 4~5000명
피해 규모
전선 일부가 파손이나
전투에는 지장 없음.
3명 전사, 10여 명 부상.[1]
47척 침몰, 12척 나포
총 59척 전선 상실, 약 4000명 전사
마나베 사마노조 할복(자살)


한산도 전투(閑山島 戰鬪) 또는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배경[편집]

1592년(선조 25)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7월 18일(음력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조선은 일본 육군에 계속 패전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8월 12일(음력 7월 6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49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였다. 8월 13일(음력 7월 7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렀고, 이곳에 정박하였다. 이때 일본 함대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였다.

경과[편집]

견내량거제도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4km이며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좁은 해협이라 전투하기에 매우 좁았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들의 행선에 지장을 줄 것이 분명했던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 6척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견내량, 한산도, 한산대첩 전투 해역

조선 수군의 작전은 성공하였다. 13척으로 구성된 적의 소규모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이들을 조선 수군의 모든 함대라고 착각하여 전 함대가 그들을 추격하였다. 일본 함대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대기하던 함대와 함께 전 조선 함대가 뱃길을 돌려 학익진을 펼쳤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육전에서 사용하던 전형적인 포위-섬멸전의 형태다. 전 병력이 사방에서 포위하여 일제히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일본의 전선들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고(따라서 후방은 비워져 있었지만,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일본 함대의 정면에 배치된 함대는 많은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조선 함대는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이 불리한 점을 극복하였다. 또 하나 고작 56척의 함선이 3방향에서 포위하는 관계로 종심이 얇아 한 군데가 포위망이 뚫릴 수도 있었지만(이 경우가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 바로 일본 함대의 정면),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병력 4~5000명(고려선전기 등을 토대로 마치 한산해전에 1500명이 참전했다는 식으로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떤 일본 사료에도 그러한 말은 없다. 아다케급 함선부터가 7척 참여했는데 1500명이 참전했다는 것은 너무나 큰 무리수이다.) 중 상당수가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사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이순신 장계에는 400명, 협판기에는 200여 명)은 군량이 없어 13일간 해초를 먹으며 무인도에서 떠돌다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이때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자결)하였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때의 3대 대첩의 하나로,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주석[편집]

  1. "임진장초", 이순신, 충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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