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Regurus/정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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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주의[편집]

  • 이 외에 민족문화, 전통, 애국심, 애향심, 예절, 부모공경, 경로사상, 일부일처제, 낙태반대, 동성혼인반대 등 기존 가족제도도 옹호하는 입장이다.[1], 1896년 7월 2일 한성부에서 서재필·이상재·이승만·윤치호 등 개화파가 주도하고 안경수·박정양 등 정부 고위관료와 남궁억·안창호 등 지식인이 참여한 독립협회가 결성, 조직되었다. 이완용도 몸 담았던 적 있으나 제명당하였다. 독립협회의 결성을 주도한 개화파는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반청(反淸) 입장에 섰으며, 미국·러시아·프랑스·일본 등에 우호적이며 서구의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이들은 '정동파' 또는 '외국인파'로도 불렸다. 당시 개화파는 '진보'라는 말을 좋아해 기회 있는 대로 진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2],1945년 8월, 일본 제국의 항복과 동시에 중도좌파 성향의 여운형과 중도우파 성향의 안재홍이 협력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건준의 본질적인 중도적 정치노선 성향은 박헌영공산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잡아 주도해 나아감에 따라 변질되어갔고, 그 상태로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됐다.[3],자신의 뿌리를 현대정당사에서 찾는다면 자유당(1951)을 주로 지목한다.[4]->뉴데일리 출처 삭제:신뢰할 수 없는 출처.
  • [5]->출처 삭제:조갑제닷컴, 조갑제, 백:신뢰
  • "...파괴자와 건설자가 어떻게 합동되며 애국자와 매국자가 어떻게 한 길을 갈 수 있을까. (중략) 이후에 우리가 국권을 회복한 후에는 이 분자들에게도 친일분자와 같은 대우아래 우리 민족의 재판마당에서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물을 말이 있을 것이다."[6]->인용태그 추가 및 볼드 삭제:인용문임.
  • 호형호제 하던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단정단선론 대 납북협상론의 노선 차이로 대립관계에 놓였으며, 이승만 세력과 한민당 관계는 1948년 내각인선 과정에서의 갈등, 1950년 농지개혁법, 그리고 1951년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을 계기로 완전히 파탄났다.->파탄났다를 깨졋다로 고침:자극적 표현 삭제.
  • 1948년 3월 8일 김구가 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정에 출석하자,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김주석 부하에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범죄로 김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7]->인용부분 삭제:불필요하다고 판단.
  • 1948년 4월 19일~21일, 김구, 김규식남북협상(남북연석회의) 참가를 위해 북한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남한 내 우익의 분열과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하여 우익세력의 맹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먼 훗날인 1994년에 '레베데프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연석회의의 배후에 스티코프, 레베데프 등 소련군정 핵심인사들이 깊숙히 개입했던 것으로 드러나 <조선인들간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주체적 노력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오늘날에도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내부 삭제:백:독자
  • 훗날 좌파 수정주의학자들은 6.25 전쟁의 원인에 대해 내란확전설, 전쟁유도설, 북침설 등의 가설을 내놓으며 사실왜곡과 역사조작을 일삼았다.->좌파 삭제: 좌파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비록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 무리가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의 손으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가 최초로 마련되었다.->삭제:백:독자의심.
  • 사실 사사오입이라는 논리 자체는 오늘날의 헌법에도 적용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은 임신 22주 내외'라고 설정하고 임신부의 자기결정권에 따라 그보다 어린 태아는 죽여도 합법이라는 2019년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있다.[8]->삭제:사사오입 개헌은 정족수 미달임에도 반올림의 논리를 내세워 개정시킨 것인데, 이것과 낙태와의 연관성을 알기 어렵습니다.
  • 1991년 진 K. 로버츠슨은 하버드 대학교 석사논문 작성을 위해 대한민국 40세 이상의 어른들 467명을 상대로 '1961년에 5.16이 났을 때 지지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응답자의 46%는 지지, 19%는 반대, 나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연령층을 확대하여 808명을 상대로 '5.16 혁명의 한국 발전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응답자의 62%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5.16혁명은 필요했다'고 답했고 17%는 '방해가 되었다'고 했으며 21%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응답했다. '박정희의 독재적 통치가 한국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69%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답했고 11%는 '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했으며 20%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응답했다.[9]->혁명->군사정변으로 용어수정
  • 민주당계 정당과 그 지지세력은 역사수정주의 성향이 강하다.<ref>“하태경 "文대통령, 이산가족 상봉 역사 왜곡…사과하라". 뉴스1. 2019년 9월 14일. ->삭제:단 한 번으로 모든 정당을 싸잡아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 또한 이 내용은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문서에 서술되어야 마땅하다고 판단.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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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에 들어갈 내용이 아니라 판단해 삭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