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Philobiblic/작업장/조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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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학생운동에서 국회의원 첫 당선까지[편집]

1996년, 동국대학교 생명자원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원래 1981년에 입학하였으나 1982년, 전두환 군사독재를 타도하는 내용의 교내시위를 주도하다 제적되었었다. 그는 이 일로 구속 · 수감되었다가 이듬해인 1983년 8월에 출소하였다. 이후 울산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다가 1986년 10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된 후 다음해인 1987년 9월에 출소하였다. 그는 출소하여 울산에 '신새벽서점'이라는 사회과학서점을 개설했다.

1989년, 지금은 현대중공업으로 통합된 '현대엔진'의 근로자들에 대한 테러사건('1.8 식칼테러사건')이 발생한다. 조승수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넘게 수배 생활을 했다. 신새벽서점에서는 당시 필명으로 활동하던 황광우의 책들도 판매하고 있었는데, 수사 과정에서 노조원들이 신새벽서점에서 황광우의 책을 산 것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엉뚱하게 서점으로 불똥이 튄 것이다.[1]

1991년부터는 민중당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 경험은 이후 93년부터 시작한 '진보정당추진위원회' 활동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1994년부터는 환경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1995년울산 북구에서 최연소 시의원으로 당선[2]된 이후 울산환경운동연합의 정책실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참여연대 울산지부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하였다.

1998년에는 무소속으로 나와 울산시 북구 구청장으로 선출되어, '전국 최연소 기초단체장'이란 타이틀을 얻기도 하였다.[3]

2004년에 실시된 제17대 총선에서는 울산 북구에 출마하여 친박 바람을 등에 업은 윤두환 후보를 7천 여표 차로 이기고 승리하였다. 그러나 지역구의 현안인 음식물처리시설과 관련하여 서명운동에 참여한 것이 2005년 국정감사 기간중 사전선거운동으로 선관위에 고발되어, 2005년 9월 29일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조승수 측은 이에 대해 '선거운동이 아니라 지역 민심 동향을 파악한 것으로, 뇌물 수수 등의 불법행위가 일체 없었으며 이는 진보정당 탄압의 일환'이라 주장하였다. 민주노동당과 동료의원들 역시 조승수를 구제하기 위한 탄원운동 등을 벌였지만 의원직은 되돌려지지 않았다.

분당 사태와 진보신당의 창당[편집]

조승수의 의원직 상실로 울산 북구에서도 재보궐선거가 실시되었다. 보궐선거 후보에는 정갑득이 선출되었다. 애초 민주노동당은 울산 북구민 중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다시 재선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선거를 얼마 앞두지 않고 터진 민주노총 강승규 수석부의장의 비리사건과 이 사건의 여파로 벌어진 민주노총 내 정파다툼, 그리고 이보다 앞서 터진 민주노동당 당원이던 강정구 교수의 필화사건 등 연이은 악재로 인해 민주노동당은 울산 북구 재획득에 실패한다.[4] 10월 31일에는 이에 대한 책임을 두고, 결국 대표단 전원이 사퇴하기에 이른다.[5]

이에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궐위된 직위를 채우기 위해 새 지도부 선거가 실시되었다. 새 지도부 선거에는 평등파의 지지를 받고 출마한 조승수와 자주파의 지지를 받는 문성현, 그리고 무당파를 자임한 주대환이 출마하여 3파전의 양상을 띠었으나, 사실상 당내 양대 정파의 지지를 받은 조승수와 문성현의 양자 구도로 압축되고 있었다. 2006년 1월 20일부터 1월 24일까지 나흘간 실시된 지도부 선출 투표 결과 조승수는 44.8%를 얻어, 1위인 문성현 (47.6%)와 결선 투표를 치르게 되었다. 2월 6일부터 2월 10일까지 나흘간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도 조승수는 46.38%를 획득해 53.62%를 얻은 문성현에게 패배한다. 이 과정에서 조승수와 문성현을 지지하는 당원들 사이에 당원게시판을 통해 육두문자가 오가거나, 조승수에 대한 음해성 글들이 난립하는 등 혼탁한 양상을 보였고 이는 평등파자주파 간의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6] 이후 조승수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연구소인 '진보정치연구소'의 소장을 맡게 된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실시된 당내 경선 역시, 정파선거의 형태로 벌어져 결국 당내 양대 정파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권영길을 지지했던 자주파노회찬을 지지했던 평등파 사이에 노회찬의 과거경력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더욱이 경선에서 승리한 권영길이 경선 과정에서 구호로 내건 '코리아연방공화국' 안과 '백만민중대회' 등을 두고서도 권영길자주파가 당내 정책연구소인 진보정치연구소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내세웠다 하여 젊은 연구원들의 집단적인 반발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승수는 레디앙에 기고한 글을 통해 북조선을 '군사왕조집단'이라 지칭하여 자주파 최고위원들로부터 징계를 요구받기도 하였다.[7]

한편, 대선 직후 패배의 원인을 두고 정파간 책임공방이 심화되는 동안 여기저기서 평등파 성향 당원들의 탈당 행렬이 이어졌다. 2008년 1월 8일, 경기도 구리의 지역위원회 전원의 탈당을 시작으로 11일에는 부산 지역 당원 52명이, 21일에는 조현연 등 11명이 추가 탈당하였고, 이어 광주·여수 등서도 당원들의 집단 탈당이 이어졌다. 2008년 1월 27일에는 조승수를 중심으로 민주노동당의 전 대변인이었던 김형탁과 함께 선도탈당한 홍세화, 김혜경, 김석준, 조현연 등이 참가한 '새 진보정당 운동'이 닻을 올리게 된다. 2월 1일에는 결국 조승수와 김형탁 역시 탈당하였다.

이후 종북주의의 청산을 못박은 심상정의 비대위 혁신안이 당내 다수파인 자주파에 의해 부결되자 심상정노회찬 역시 조승수의 '새 진보정당 운동'에 참가한다. 이 '새 진보정당 운동'은 창당과정을 거쳐 진보신당 연대회의로 이어진다.

국회의원 재당선[편집]

창당 이후, 녹색정치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던 조승수는 2009년 3월 12일자로 윤두환(울산 북구의 의원직 상실이 확정되자, 바로 다음날인 13일, 4.29 재보선 출마할 뜻을 밝힌다. 이에 대항해 민주노동당 측에서는 김창현을 내세워 실지(失地) 회복의 염원을 드러냈다. 진보진영의 후보가 양립할 경우 패배할 수도 있었기에 3월 24일부터 양 당 간 후보단일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양 당 간의 일진일퇴의 협상 끝에 4월 9일, 후보단일화가 합의되었으나 민주노총 조합원 총투표를 둘러싼 양 당 간의 입장차이와 총투표가 선거법을 위반할 수도 있다는 울산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으로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나 4월 11일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울산 선관위의 유권해석을 번복하는 새로운 유권해석을 내놓아 후보 단일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지속적인 입장차로 난항을 겪던 후보단일화는 결국 선거를 며칠 앞둔 4월 23일에서야 최종 합의되었고, 4월 25일부터 26일까지 주말동안 진행된 여론조사를 통해 26일 저녁 조승수 후보가 단일 후보로 선출되었다. 재보선 당일, 조승수는 49.2%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지역구인 울산 북구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한편, 이 선거로 진보신당 연대회의는 원내정당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1. 권박효원. “우원식·선병렬·조승수 의원의 공통점은? ”. 오마이뉴스. 2009년 5월 6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2. 박종석. “울산, 4당 황금분할..한나라당 '절반의 성공' ”. 오마이뉴스. 2009년 5월 6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3. 김광수. “울산 북구 조승수, 16대 패배딛고 값진 승리”. 한겨레. 2009년 5월 6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4. 오창엽 기자. “강정구, 강승규 당원 사건 여파 민주노동당 석패”. 프로메테우스. 2009년 9월 11일에 확인함. 
  5. 이지윤 기자. “"국민에게 감동 못 줘…" 민노당 지도부 전원사퇴”. 프레시안. 2009년 9월 11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6. 임세환 기자.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내는 진상보고서 제출””. 프로메테우스. 2009년 9월 24일에 확인함. 
  7. 박형숙 기자. "내 친구들에게 표 달라고 못하겠다"대선 한복판, 정파 카르텔 깬 조승수”. 오마이뉴스. 2009년 9월 24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