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모리 아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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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모리 아키나
中森明菜
Nakamori Akina in 1985.jpg
1985년경의 나카모리 아키나
기본 정보
출생 1965년 7월 13일(1965-07-13) (48세)
일본 도쿄 도 오타 구
직업 가수, 배우
장르 J-pop
활동 시기 1982년 ~ 1989년, 1990년 ~ 2010년
레이블 워너 파이오니어 (1982년 ~ 1991년),
MCA빅터 (1993년 ~ 1997년),
가우스 (1998년 ~ 1999년),
Music@Nifty (2000년 ~ 2001년),
유니버설 뮤직(2002년 ~ )
소속사 켄온 (1982년 ~ 1990년)
Collection (1990년 ~ 1991년),
Continue (1992년),
NAPC (1993년 ~ 1999년),
FAITH (2000년 ~ )
웹사이트 nakamoriakina.com

나카모리 아키나(일본어: 中森明菜 (なかもり あきな), 1965년 7월 13일 ~ )는 일본의 여성 가수이자 배우이다. 도쿄 도 오타 구에서 태어났으나 곧 기요세 시로 이사간 후 줄곧 그곳에서 자랐다. 1981년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에서 우승하여 이듬해 싱글 〈슬로우 모션〉(スローモーション)으로 데뷔한 이래 1980년대에 가장 유명했던 일본 여가수 중 하나로 오리콘 차트에서 15 싱글곡 연속 1위를 하기도 하였다. 데뷔한 후 청순한 분위기의 발라드곡과 〈소녀A〉(少女A)같은 어두운 분위기의 노래를 번갈아 부르는 것이 당시 은퇴하지 얼마 안되었던 야마구치 모모에를 닮았다 하여 데뷔 초기에는 줄곧 “제2의 야마구치 모모에”로 불렸다.[1][2] 그녀는 자신이 직접 노래의 기획과 안무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노래만 하는 가수가 아닌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다져 1980년대 일본의 유행을 선도하였으며 특유의 깊고 낮은 음색과 파워풀한 보이스, 풍부한 감정처리 등으로도 잘 알려져있다.[3]

1984년, 자신의 10번째 싱글인〈장식이 아니야, 눈물은〉(飾りじゃないのよ涙は)을 기점으로 기존 아이돌들과의 음악성 차별화를 꾀하였다. 더불어 1985년에 〈미 아모레〉(ミ・アモーレ / Meu amor e…)로, 이듬해인 1986년에는 〈DESIRE -정열-〉(DESIRE -情熱-)로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2년 연속 대상을 차지하고 1983년, 1985년에서 1987년 3년 연속 레코드 판매 1위를 기록하는 등 초기의 아이돌 이미지에서 인기와 가창력을 겸비한 실력파 여가수로 거듭났으며 여가수에게 붙이는 최고의 칭호인 가희(歌姬)로도 불리었다.[4] 그러나 1989년 전 연인이었던 곤도 마사히코와의 치정관계로 그의 집에서 자살미수를 시도한 후 약 1년간 활동정지를 하였으나 이듬해 성공적으로 복귀, 계속 싱글과 앨범을 발매하고 매년마다 콘서트 투어를 열어 음악 활동을 이어나갔다. 또한 1992년 후지 테레비에서 방영한 드라마 《솔직한 그대로》(素顔のままで)에서 주연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드라마에도 주연 또는 비중있는 조연으로도 출연하고 연예오락 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오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나 2010년 10월, 자신의 연말 디너쇼를 취소하고 건강 악화로 무기한 활동정지를 발표한 이래 지금까지 활동을 쉬고 있다.

생애[편집]

데뷔 이전: 1965년 ~ 1981년[편집]

1965년 7월 13일, 도쿄 도 오타 구에서 나카모리 아키오(中森明男)와 나카모리 치에코(中森千惠子)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5][6] 위로는 두 명의 언니와 두 명의 오빠, 그리고 연년생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 아키나(明菜)를 비롯한 그녀의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아버지의 이름인 아키오(明男)를 따라 지은 것이다. 아버지는 정육점을 운영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따로 살아야 했다. 이러한 가정형편 때문에 일부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그녀의 일가가 재일동포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에 대해 뚜렷한 증거는 없으며 본인 또한 직접적인 언급을 한 적은 없다.[3][7][8] 나카모리가는 아키나가 태어나고 얼마 후에 기요세 시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나카모리 아키나는 언니를 따라 4살 때부터 10년간 발레를 배웠고 어릴 때부터 TV나 라디오 등에서 노래를 들으며 가수의 꿈을 꾸어왔다.[9] 6살 때 소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에는 학교 수필에 장래희망으로 가수를 적었으며 노래를 부르는 것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10] 주로 일본 음악에서는 마쓰토야 유미 등을, 서양 음악으로는 카펜터스를 주로 들었으나 언니들과 오빠들의 영향으로 디스코소울 음악도 즐겨 들었다.[11]

13살이었던 1978년에 니혼 테레비에서 방영하던 예능신인 발굴 프로그램 《스타 탄생!》(スター誕生!)에 출연하여 이와사키 히로미의 〈여름에 안기어〉(夏に抱れて)를 불렀으나 "나이에 비해 음색이 너무 어른스럽다"는 이유로 본선에서 탈락하였다.[12] 2년 후인 1980년에는 훗날 자신의 가장 큰 라이벌이 되는 신인가수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青い珊瑚礁)를 부를 때는 심사위원이 노래는 잘 부르는데 얼굴이 아이 같아서 차라리 동요를 부른는게 낫다며 혹평을 했는데, 이에 나카모리는 이 프로그램에서 동요는 부를 수 없지 않냐고 반문하였으나 다시 한번 본선에서 떨어졌다. [13] 그러나 이듬해인 1981년 7월 11일, 야마구치 모모에의 〈몽선안내인〉(夢先案内人)으로 세 번째 도전 끝에, 프로그램 방송사상 최고 점수인 392점을 얻으며 우승하게 된다.[14] 제작 스태프 중에서는 이미 본선에서 두 번이나 떨어진 나카모리의 재출전에 난색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15] 그러나 나카모리는 1,2차에서의 굴욕을 말끔히 씻어내었고, 우승 후 1개월동안 니혼 테레비 음악학원에서 간단한 보컬트레이닝과 댄스 수업을 받았다. 뒤이어 같은 해 11월 29일, 연말 결승전에 해당하는 결전대회 사전심사를 거치고, 12월 6일에 방송된 연말 결승전에 해당하는 결전대회 방송에서 역시 야마구치 모모에의 〈몽선안내인〉을 불렀다.[16] 이후 11개의 연예기획사와 레코드 레이블 사무소가 플랜카드를 올려 나카모리를 스카우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나카모리 아키나는 연예기획사는 켄온과, 레코드 레이블워너 파이오니어와 계약을 맺었다. 계약을 체결한 이후에는 주로 보컬 트레이너의 전담 하에 발성 연습과 가창력 향상에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다.[17]

데뷔 이후와 아이돌 노선: 1982년 ~ 1984년[편집]

데뷔 직전 소속사인 켄온에선 본명 대신 모리 아스나(森アスナ)라는 예명을 지어 데뷔시키려 하였으나 나카모리 아키나는 단호히 거절하고 본명으로 데뷔할 것을 고집하였다.[17]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워너 뮤직 녹음실에서 첫 싱글과 첫 앨범에 들어갈 곡들을 녹음하고 1982년 5월 1일 〈슬로우 모션〉으로 데뷔하게 된다. 〈슬로우 모션〉은 소녀의 순정을 표현한 곡으로 처음에는 그리 반향이 없었으나 이후 나카모리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오리콘 차트에 39주 동안 순위권을 유지하였다.[18] 당시 여자 아이돌들은 데뷔 직후 캐치프레이즈도 같이 소개하였는데 나카모리는 여러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캐치프레이즈를 “조금 야한 밀키 소녀”(ちょっとエッチな美新人娘 (ミルキーっこ))라고 하였다.[19] 본인은 이 캐치프레이즈를 소개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으나 소속사에서 정해준 방침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신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소개해야했다고 털어놓았다.[20] 이 때 그녀와 데뷔한 아이돌 동기로는 대표적으로 나카모리와 가장 절친한 친구인 고이즈미 교코가 있고 이밖에도 호리 치에미, 하야미 유등이 있다.[21] 이들을 한데 모아 이른바 “꽃의 82년조”(花の82年組) 또는 “꽃의 57년조”(花の57年組)라고 불렀다. [주해 1][21] 데뷔와 함께 음악활동 매진을 위해 당시 다니고 있던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에 휴학계를 제출, 곧 중퇴하였다.[22]

같은 해 7월 1일에는 자신의 첫 정규 앨범인 《프롤로그 〈서막〉》(プロローグ〈序幕〉)을 발매하였다. 이어서 7월 28일, 나카모리 아키나는 두 번째 싱글인 〈소녀A〉(少女A)를 발표하였다. 당시 마츠다 세이코를 위시로 한 대부분의 여자 아이돌들이 지고지순하고 청순한 이미지의 노래를 부르던 것과 달리, 〈소녀A〉는 과격하고 어른스러운 가사로 기존 아이돌들과의 이미지 차별을 꾀하였다. 이 곡과 함께 그녀는 여러 공중파 방송국의 심야 음악 프로그램인 《더 베스트텐》(ザ・ベストテン, 도쿄방송)이나 《밤의 히트 스튜디오》(夜のヒットスタジオ, 후지 테레비) 등에 처음 출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방송협회에서는 가사가 성적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음악방송 프로그램 출연과 곡의 방송을 불허한 적도 있었다.[23] 하지만 나카모리는 이때부터 인기의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하고 4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그 해 여러 가요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였다.[24] 동년 10월, 두 번째 정규 음반인 《베리에이션 〈변주곡〉》을 발매하고 한 달 후인 11월 10일에 나온〈세컨드 러브〉(セカンド・ラブ)는 〈슬로우 모션〉을 이은 청순 발라드 곡으로서 나카모리에게 오리콘 주간차트 첫 1위의 영광을 안겨주었으며 77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톱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24] 이듬해인 1983년 2월에는 자신의 첫 전국 콘서트 투어를 개최하였고, 3월과 8월에는 세 번째, 네 번째 정규 음반인 《판타지 〈환상곡〉》, 《NEW AKINA 에트랑제》를 출시했는데, 《NEW AKINA 에트랑제》로 처음 1983년도 일본 레코드 대상 시상식에 출전하여 그 해의 베스트 앨범 톱10 상을 수상하였다.[25] 또한 1983년도 브로마이드 총매상에서도 여자 가수 중에서는 그녀가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하기도 했다.[26]

나카모리 아키나의 초기 디스코그래피는 청순하고 가련한 여자를 그리는 발라드와 과격한 가사와 터프한 안무 등이 섞인 불량청소년, 즉 츳바리(つっぱり) 컨셉트 두 가지로 이루어져있었다. 이후로도 두 컨셉트를 번갈아가며 활동하다가 1983년 NHK에서 주최하는 홍백가합전에 츳바리 컨셉트의 〈금구〉(禁区)로 처음 출장하였다.[27] 그녀의 초기 발라드 곡들은 키스기 에츠코, 키스기 다카오 남매가 전담한 반면, 츳바리 노선의 곡들은 모두 작사가 우리노 마사오에게 곡을 받아 활동했다.

1984년 1월 1일에 발표한 〈기타 윙〉(北ウイング)을 시작으로 나카모리 아키나는 서서히 노선에 변화를 주기 시작하였다. 주로 맑은 미성으로만 노래하기보다는 허스키하고 굵은 중저음으로 음색을 내기 시작하며 더불어 노래를 소화하는 감정처리 능력과 가창력도 점차 늘어났다. 이때에 이르러 그녀는 자신 특유의 창법인 ‘아키나 비브라토’를 개발, 곡의 대부분을 중저음으로 부르다 마지막 부분에서 압도적인 롱톤과 고음으로 시원시원한 마무리를 줌으로서 자신만의 노래 스타일을 확실하게 개척하기에 이른다.[28] 이어서 5월에는 데뷔 2주년을 맞아 다섯 번째 정규 음반 《ANNIVERSARY》를 발매하였고, 싱글곡 〈서던 윈드〉, 〈십계 (1984)〉를 마지막으로 아이돌 노선을 마무리지은 나카모리는 같은 해 11월에 발표한 유명 싱어송라이터 이노우에 요스이 작사, 작곡의〈장식이 아니야, 눈물은〉으로 자신의 이미지 변화에 성공하였다. 이 곡의 성공으로 역대 자신의 싱글 중〈세컨드 러브〉에 이어 가장 많은 63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24]

전성기, 그리고 자살미수 사건: 1985년 ~ 1989년[편집]

일본무도관. 나카모리 아키나는 이곳에서 개최된 1985년과 1986년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였다.

1985년 3월, 나카모리 아키나는 자신의 11번째 싱글인〈미 아모레〉를 발표하였다. 라틴삼바 리듬을 가미한 이 곡은 큰 인기를 얻었고 더불어 라이벌로 회자되던 마츠다 세이코는 그 해 결혼을 발표하고 육아에 매진하면서 잠시 인기의 정점에서 내려와 있었다. 이 곡으로 그녀는 연말의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20세의 나이로 대상을 차지하면서 최연소 대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29] 이후로도 발표하는 싱글마다 계속 오리콘 주간 차트에서 1위를 달성하는 등 인기를 이어나가던 나카모리는 이듬해인 1986년 2월 3일에 발표한 14번째 싱글 〈DESIRE -정열-〉로 본인 가요 인생의 최절정기를 맞는다. 스스로 고안한 미국풍으로 어레인지한 기모노를 무대의상으로 입고 봅 가발을 쓰며 이전의 아이돌 가수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패션을 선도하였고 노래만 하는 아이돌을 넘어선 아티스트로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이 곡으로 그녀는 같은 해에 다시 한번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영예의 대상과 최고 아티스트상을 수상,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자 가수가 되었으며, 1987년 3월에는 일본 레코드 협회에서 개최한 제1회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에서 최고상인 ‘Grand Prix Artist of the Year’를 수상하는 등 많은 상을 받았다.[30][31] 1986년 8월에 발표한 아홉 번째 정규 음반 《불사의》는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을 맡아 음반의 컨셉트와 분위기를 진두 지휘하는 등 아티스트로서의 예술성을 발휘했다.

더불어 나카모리 아키나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위시한 노래를 자주 부르기 시작하였다. 삼바 리듬의 〈미·아모레〉를 시작으로 아랍풍 리듬의 〈SAND BEIGE ~사막으로~〉, 〈AL-MAUJ〉등을 발표하였다.[32] 이 중 1987년 2월에 발표한 그녀의 17번째 싱글 〈TANGO NOIR〉에서는 어릴 때 배운 발레를 십분 활용, 곡을 부르면서 유연한 탱고 동작도 같이 소화하여 그 해 오리콘 연간 차트 2위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 9월 30일, 나카모리 아키나는 〈난파선〉(難破船)을 발표, 이전까지는 시도한 적이 없는 단조 계열의 슬픈 발라드를 불렀다. 본래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가토 도키코가 이미 1984년에 내놓은 곡이었으나 가토가 나카모리에게 자신의 곡을 커버한 것을 부탁하여 발매한 것이었다.[33] 이 노래 역시 큰 반향을 몰고 왔는데 당시 사귀고 있던 연인인 곤도 마사히코와의 불화설과 곤도와 다른 여성과의 스캔들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올 때였고 나카모리가 이 곡을 부르는 무대 도중에 눈물을 자주 보이는 것이 마치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하는걸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34] 이 때부터 나카모리의 음반 판매 실적은 점차 하향곡선을 탔으나 여전히 그녀의 곡들은 오리콘의 각종 차트에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카모리는 1987년의 연간 세일즈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1983년, 1985년, 1986년까지 합쳐 총 4번의 연간 세일즈 차트 정상을 차지하였는데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88년에 발매한 〈TATTOO〉에서도 그 동안 잘 입지 않았던 미니스커트를 입고 무대에 오르는 등 여전히 곡의 기획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이 곡으로 그녀는 76만장의 판매고를 올린〈세컨드 러브〉 이래 최고의 판매량을 올렸으며 그녀의 싱글과 앨범 총판매량도 1000만장을 넘겼다. 그러나 곤도와의 불화설로 이미 심신이 지쳐있던 나카모리 아키나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의 여동생 나카모리 아키호(中森明穗)가 언니와 아무런 말도 없이 연예 잡지와 계약을 맺고 누드 사진첩을 발간했다는 소식에 매우 경악했고 이로 인해 한동안 기자들에게 시달려야 했으며 격한 스트레스로 체중이 크게 떨어졌다.[35] 더불어 가족들 역시 자신에게 의지하여 돈을 마음대로 쓰는 등 아버지와 형제간의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6]

1989년 2월, 곤도 마사히코가 뉴욕의 한 호텔에서 동료 가수 마츠다 세이코와 밀회를 한 것이 파파라치에게 발각되었다. 마츠다는 이미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으나 이혼을 발표하지 얼마 안된 상태로 뉴욕에 체류하며 미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소식을 접한 나카모리 아키나는 큰 정신적 충격에 휩싸였다. 이미 이전부터 나카모리와 곤도의 불화설이 자주 흘러나왔기 때문에 일본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점차 대형 스캔들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나카모리는 이런 언론의 스캔들 보도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여전히 싱글을 발표하고 방송 활동을 왕성히 하였으나 계속되는 곤도와의 갈등 끝에 그 해 7월 11일, 곤도의 집에서 왼쪽 손목의 신경을 칼로 그어 자살을 기도하였다.[36] 하지만 기도 직후 발견한 친구의 발빠른 대처와 신고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 이 이유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1년간 활동을 중지했다. 활동중지 기간 동안 곤도는 나카모리에게 사과의 의미로 약혼을 제안했고 나카모리는 그 말을 믿고 그 해 12월 31일에 약혼 기자회견을 열려 하였으나 곤도의 소속사 자니즈 사무소의 술수로 그 기자회견은 자살미수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한 사과 기자회견으로 변질되었다.[37][38] 이 자리에서 나카모리는 자신이 연예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불미스러운 일로 걱정을 끼친 것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으나 그녀와 곤도 모두 자살미수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다.[39] 곤도는 나카모리를 응원하며 그녀의 연예계 복귀를 전력을 다해 도울거라고 하였다. 이후 기자들은 곤도에게 다음해인 1990년 쯤에 결혼이나 약혼을 할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으나 곤도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잘라 말하는 등 나카모리와 곤도의 연인관계는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으며 끝이 났다.[39]

복귀와 재기: 1990년 ~ 1994년[편집]

자살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1년 뒤인 1990년에, 나카모리 아키나는 자신의 24번째 싱글 〈Dear Friend〉로 연예계에 복귀하였다. 불미스러운 일 이후로 복귀하여서인지 명랑하고 밝은 스타일의 곡으로 복귀하기를 원하였고 오리콘 주간차트에 다시 1위를 하는 등 나카모리의 인기가 아직 식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어서 〈물에 꽂은 꽃〉(水に挿した花)까지 오리콘 주간차트 1위를 하는 등 가수로서의 입지를 성공적으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오리콘 차트 1위를 탈환하지 못하였는데 그녀의 활동 중지 이후 음악계 역시 재편되었고 나카모리와 마츠다의 위명에 가려져있던 신인 아이돌들이 대거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다.

〈Dear Friend〉 발매 직전, 나카모리는 10년 가까이 소속되어 있는 켄온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이듬해인 1991년에 새로 개인사무소인 Collection(콜렉션)을 세웠으나 곧 소속사의 임원들과의 트러블 때문에 다시 나오고 1992년 자신의 개인 소속사인 Continue(컨티뉴)를 다시 세웠다.[40] 또한 워너 파이오니어와도 음악제작과 컨셉트상 자주 충돌이 있어오던 끝에, 나카모리는 워너 파이오니어에서 독립하여 MCA와 새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레이블 이적료의 분배를 두고 나카모리와 소속사 Continue간의 법정 공방이 이어졌고 분개한 나카모리는 다시 소속사를 NAPC로 옮기는 등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40] 이러한 소속사, 레이블과의 갈등으로 1992년 여름에 낼 예정이던 새 싱글과 앨범은 결국 해를 넘겨 새 소속사와 레이블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은 후에야 발매할 수 있었다.[41]

1993년, 나카모리 아키나는 새 레이블 사무소로 MCA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이후, 싱글과 앨범의 제작에 박차를 가하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고 이듬해인 1994년 3월에는 처음으로 커버앨범인 《우타히메》(歌姬)를 발표하였다. 주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풍미한 여가수들의 곡들을 자신의 색깔로 커버하였다. 당시 메이저 가수로서는 선배 가수들의 곡을 커버한 일이 별로 없었지만 대중과 음악평론가들의 긍정적 평가를 이끌어냈다. 이후 《우타히메》는 시리즈화되어 총 3개의 앨범이 제작되었다.

한편으로는 처음으로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진출, 후지 테레비 드라마 《솔직한 그대로》(素顔のままで)의 주연을 맡았고 최종회에서는 31.9%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드라마에까지 성공적으로 진출하였다.[42] 이후 1994년 후지 테레비 드라마 《후루하타 닌자부로》시즌 1 첫회에 범인으로 특별출연하였다.

중견 가수로서의 발돋움: 1995년 ~ 2002년[편집]

1995년, 16번째 정규 음반 《La Alteracion》을 발매하였는데 《불사의》 이후 자신이 프로듀싱을 직접 맡았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제작과 곡 후반 작업까지 대부분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품이었다. 이어서 그녀는 베스트 음반인 《true album akina 95 best》를 출시, 여태까지 나온 싱글곡들을 각각의 테마에 맞게 추려서 새로 편곡한 버전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도중 어머니인 나카모리 치에코가 같은 해에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 금전 문제로 다시 아버지와 언니, 오빠들과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어머니의 장례식을 끝으로 모든 가족과 절연을 선언하는 등 험악한 관계로 치닫았다.[6]

이전부터 디너쇼를 열어보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 적이 있던 나카모리 아키나는 이듬해인 1996년, 처음으로 디너쇼 투어를 개최했고 이후로도 활동을 중단할때까지 연말마다 주요 도시를 돌며 디너쇼 투어를 진행하였다.[43]

이후로도 1998년에는 니혼 테레비 드라마 《차가운 달》(冷たい月) 에 주연으로 극을 이끄는 등 가수와 배우의 병행활동을 이어나갔다.[24] 2000년에 이르러 나카모리 아키나는 새로운 개인 소속사인 FAITH를 발족하고 공식 팬클럽인 FAITHWAY를 창단하였다. 2002년에는 데뷔 20주년을 맞이해 레코드 레이블을 유니버설 뮤직으로 옮기고 20번째 정규 음반 《Resonnacia》를 발매했는데, 이때 새 레이블 사무소인 유니버설을 뮤직은 그녀의 음반 컨셉트를 “일본의 제니퍼 로페즈”라고 소개하였다.[10] 또한 우타히메 시리즈의 두 번째 앨범인 《ZERO album-우타히메 2》를 발표해 히트하였는데, 이 앨범에는 라이벌로 불리던 마츠다 세이코의 〈유리빛의 지구〉(瑠璃色の地球)나 동경하던 야마구치 모모에의 〈코스모스〉(秋桜)등이 수록되어 화제가 되었다. 또한 88년 이후 14년 만에 NHK 홍백가합전(제53회)에 다시 나가기도 했다. 이 날 방송에서는 1984년에 발표한 본인의 10번째 싱글곡으로 자신의 곡을 새로 셀프커버한 〈장식이 아니야, 눈물은〉을 불렀다.

공연 활동 매진: 2003년 ~ 2009년[편집]

2000년대에 들어서 나카모리 아키나는 음반 활동보다는 주로 라이브 콘서트 투어에 매진하며 연예 활동을 지속해나갔다. 한편 2004년 나카모리는 대한민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올인》의 주제가 〈처음 그 날처럼〉을 커버한 싱글〈붉은 꽃〉(赤い花)을 발매하였다.[44] 그러나 곡만 수입한 것일뿐 멜로디의 분위기와 가사는 원곡과는 달랐으나 이후 《올인》이 NHK BS2 위성 채널에서 수입되어 방영되자 원곡에 가까운 가사를 덧붙여 〈처음 만난 그 날처럼〉(初めて出逢った日のように)으로 새로 발매하였고 주제가로서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였다.[45] 이 곡들로 나카모리는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는데 일본의 중량감 있는 메이저급 가수가 자국 드라마가 아닌 해외 드라마의 주제가를 부르는 일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45]

2006년에는 데뷔 25주년을 맞이해, 7년 만에 니혼 테레비의 드라마 《프리마담》(プリマダム)에 출연했다. 나카모리 자신이 어릴 때 배웠던 발레를 주제로 한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한때 세계를 평정했던 프리마돈나이자 발레 재단 이사장 역을 맡아 호연을 펼쳤으며 엔딩곡인 〈꽃이여, 춤춰라〉(花よ踊れ)를 부르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에는 대형 파칭코 메이커인 다이이치상회(大一商会)에서 그녀를 모티브로 한 파칭코 기계 〈CR나카모리아키나・우타히메덴세쓰〉(CR中森明菜・歌姫伝説)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2007년에는 이전의 엔카곡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커버한 《염화-Enka-》(艶華 -Enka-) 앨범을 발매하는 등 계속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 19년만에 일본 레코드 대상 시상식에서 기획상을 수상하였고 이듬해 3월 개최된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에서는 더 베스트 엔카 아티스트 상도 수상하였다.[46][47]

무기한 활동정지와 최근: 2010년 ~ 현재[편집]

그러나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40대를 맞은 나카모리 아키나는 건강상태가 점차 나빠져갔다. 자신의 생일이기도 한 2010년 7월 13일, 나카모리는 이미 론칭했던 파칭코기계의 후속작 홍보행사도 참석하였으나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과 몸으로 여러 기자들로부터 건강에 문제가 생긴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으나 본인은 괜찮다며 말을 듣지 않았다.[3] 결국 3개월 뒤인 2010년 10월 28일, 나카모리 아키나의 소속사와 레코드 레이블은 그녀의 연말 디너쇼와 2011년에 예정되어 있던 라이브 공연 모두를 취소하고 나카모리의 연예계 활동 무기한 활동정지를 발표하였다.[3][48]

이후 자택에서 칩거 생활을 계속하며 몸을 추스리는데 전력하는 중이다. 그러던 중 다시 한번 가정적인 불행을 겪었다. 여동생인 나카모리 아키호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여 장애를 입었고 그녀의 조카는 백혈병 투병 중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5] 무기한 활동중단을 발표하며 무대에서 모습을 감춘지 3년 만인 2013년 11월 7일,《여성 세븐》이라는 잡지에서 나카모리 아키나가 그녀의 매니저 소유의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고 근력 운동을 하며 복귀에 착실히 준비 중이라 하였다.[4] 2014년 1월 1일, 일본의 여러 언론에서 나카모리 아키나가 도쿄 모처의 신사 신직과 결혼을 전제로 교제 중이며 연내에 결혼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49] 2014년 3월 18일에는 자신의 팬클럽인 FAITHWAY 4월 회보에 직접 쓴 자필 편지가 실렸는데 팬들에게 자신의 무대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면서 2014년내 복귀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었다.[50]

예술가적 기교[편집]

가창력[편집]

나카모리 아키나는 자신의 음악에 대해 주로 베이스베이스 드럼같은 중저음으로 효과를 낸다고 말했다.[11] 이는 자신의 가창력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데뷔 초의 맑은 미성으로 노래를 불렀던 나카모리 아키나는 점차 아이돌 특유의 맑고 순수한 창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가창력을 연마하였다. 전성기인 1980년대 중후반에는 중저음의 음색이 자리를 잡았고 노래 초입부에는 낮은 음색으로 시작하다가 엔딩에서는 자신 특유의 창법인 “아키나 비브라토”로 롱톤의 압도적인 고음을 파워풀하게 처리하였다.[28][32] 그러나 차분하게 읊조리는 듯한 발라드 계열의 노래도 자주 앨범에서 선보였다. 이처럼 상반된 분위기의 노래를 모두 자유자재로 소화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음악 라이터인 마카이노 모토히로는 나카모리 아키나의 최대 특징은 바로 “노선”을 정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서 가창력의 역량보다는 풍부한 감정표현으로 성량을 기어 체인지와 같이 바꾸어 특유의 비브라토 창법을 확립하였다고 지적하였다.[51] 그러나 《CD저널》은 그녀가 당시 수많은 아이돌 가수 중에서도 최고의 가창력과 평가를 받았다고 호평했다.[52] 또한 1989년 자살미수 사건 이후 복귀하고 선보인 음반 《UNBALANCE+BALANCE》에서는 그녀가 역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다시 인식시켜줬다고 평했다.[53] 같은 잡지의 평론가 고토 유키히로 역시 서양 음악적인 요소 속에서 일본어 가사를 이렇게 다양하면서도 아름답게 울리게 하는 가수는 아키나가 마지막이라 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54] 음악평론가 노지 유코는 음악 잡지 《WHAT'S IN?》에서 그녀의 커버 음반 《가희》를 두고 디바로서의 활력이 온몸에 넘치는것 같다고 지적, 기량 이전에 재능이 넘치는 가수로 평하였다.[55] 음악 잡지 《뮤직 매거진》의 칼럼니스트 호보 다이자부로는 그녀를 두고 영혼의 심연에서 굉장한 흡입력으로 듣는 사람을 끌어 당기게 한다고 말했다.[56] 또한 이마모토 도요시는 나카모리를 일러 희대의 보컬리스트로, 대중들이 알고 있는 그 흔한 사실을 음반에서는 기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비평하였다.[57]

기획력[편집]

데뷔 초때부터 자신의 싱글과 앨범의 기획에 적극 참여하였고 자신의 일곱 번째 싱글을 제작할 때엔 곡 제목에 지명을 넣자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관철되어 나리타 국제공항의 제1터미널의 별칭을 딴 기타 윙으로 결정되었다.[58] 특히 14번째 싱글인 〈Desire ―정열―〉로 활동할 때에는 기모노를 서양식으로 어레인지한 무대 의상을 직접 만들어 선보였고 봅 가발까지 착용하여 비평가들로부터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호평을 받았다.[59] 이후로도 이국적인 싱글곡들의 컨셉트에 맞게 자신이 직접 스태프들과 회의를 하여 의상과 안무 등을 직접 체크하였다. 〈BLONDE〉로 활동할 때도 에르메스 스카프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스스로 무대 의상과 신발을 지어 그 옷을 입고 곡을 소화하기도 했다.[60] 나카모리와 여러 차례 작업을 같이 했던 음악감독 후지무라 카즈미는 자신이 상상했던 이미지와 노래를 포함한 표현을 뛰어넘었다고 평하며 그 당시의 레이디 가가와 같은 존재였다고 술회하였다.[61]

나카모리 아키나는 같은 스타일과 컨셉트의 곡에 안주하기 보다는 계속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도 평론가들의 호평을 샀다. 자신의 9번째 앨범이자 자신이 직접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불사의》(不思議)는 출시 직후 화제가 되었는데 바로 신비롭고 몽환적인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믹싱에서 곡의 보컬보다는 멜로디인 MR을 더욱 강조하여 가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희미하게 들렸다는 점이다. CD 저널은 “처음 들으면 무언가 부족해 보이는 듯한 의문과 불안에 휩싸여 복잡한 기분이 들기 위해 의도한 작품 같다.”라고 하였다.[62] 또한 이러한 파워하우스 창법은 심리묘사에 기울어진 가사에 맞춰 선정적이면서도 주술적이라 코멘트하였고 가수인 나카모리의 목소리도 악기의 일부로 해석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59]

나카모리는 첫 정규 음반인 《프롤로그 〈서막〉》에서부터 애니메이션 음악 작곡을 주로 하던 오노 유지(大野雄二)나 일렉톤 연주자 출신의 츠카야마 에리코(塚山エリコ)에게서도 곡을 받았는데, 이렇듯 데뷔 초부터 작사가, 작곡가의 유무명이나 분야에 상관 없이 모두 기용하였다.[59]

작사[편집]

나카모리 아키나는 1984년 자신의 5번째 정규 음반인 《ANNIVERSARY》의 수록곡 〈꿈을 꾸게 해〉(夢を見させて)의 가사를 직접 쓴 이후 조금씩 작사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95년 자신의 32번째 싱글 〈Tokyo Rose〉에서도 공동 작사가로 참여, 2002년 자신의 20번째 앨범 《Resonancia》의 수록곡 〈Deseo〉부터는 자신의 본명을 밝히는 대신 Miran:Miran이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영향[편집]

나카모리 아키나의 등장은 이후 일본 아이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초창기의 그녀는 당시 어른스러운 이미지로 인기를 얻다 결혼과 함께 은퇴한 대형 아이돌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다시피 했다. 그러나 나카모리는 야마구치보다 더 과격한 내용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동시에 야마구치와 차별화를 꾀하였다. 특히 이노우에 요스이와 작업한 〈장식은 아니야, 눈물은〉으로 아이돌 이미지에서 탈피함과 동시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후대 아이돌에게 영향을 줬다.[32][59] 이 이후, 나카모리의 특색있는 가창력과 노래의 어두운 분위기는 당시 불안과 절망에 빠져있는 젊은이들, 특히 여성들의 공감을 사며 인기를 누렸다. [63] 이 때 그녀가 확립한 불량청소년, 즉 츳바리 이미지는 한동안 구도 시즈카, 나카야마 미호 같은 후배 아이돌에게 이어졌으며 그녀의 컨셉트 역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일본 가요계를 제패한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 등에게 영향을 끼치며 여성 아이돌 붐의 발판이 되었고, 나카모리의 등장 이후 여러 신인 가수들도 그녀를 동경하여 일본 연예계에 데뷔했다.[64] 특히 하마사키 아유미와 AKB48의 멤버 다카하시 미나미도 나카모리 아키나를 동경하고 존경한다고 밝혔다.[65]

해외에서도 나카모리의 인기는 높았다. 특히 홍콩에서는 198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 문화가 전면 개방되었고 당시 일본 음악이 가장 많이 팔렸던 해외 시장이었던 만큼 그녀와 여타 일본 아이돌 가수들의 인기가 높았으며, 장국영, 장학우를 비롯한 홍콩의 유명 가수들은 나카모리의 곡을 번안, 음반을 출시하기도 했다.[66][67] 대만에서는 진루이야요(金瑞瑤), 양린(楊林) 등 당시 많은 젊은 가수들도 그녀의 음악에 영감을 받아 모방하기도 하였다.[68][69]

대한민국의 경우 당시 일본 문화를 허용하지 않았던 터라 직접적인 영향은 끼친 적이 없었지만, 1980년대 후반 음악계에는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록그룹 백두산의 리더인 유현상은 일본에서 나카모리 아키나가 공연한 라이브 콘서트를 보고 영감을 받아 연예사무소를 설립, 처음으로 양성한 가수가 바로 이지연이었다고 술회하였다.[70]

일본의 만화가인 마츠모토 이즈미는 자신의 작품 《새콤달콤 오렌지 로드》의 여주인공 아유카와 마도카(鮎川まどか)의 모델이 바로 나카모리 아키나였으며, 나카모리가 〈소녀A〉를 부를 때의 모습을 모티브로 따왔다고 밝혔다.

음반 목록[편집]

정규 음반 싱글
  • 〈물에 꽂은 꽃〉(水に挿した花, 1990년)
  • 〈후타리시즈카 - [천하전설살인사건]으로부터〉(二人静 -「天河伝説殺人事件」より, 1991년)
  • 〈Everlasting Love〉・ 〈NOT CRAZY TO ME〉 (1993년)
  • 〈짝사랑〉(片想い)・〈애무〉(愛撫, 1994년)
  • 〈밤 어딘가에서 ~night shift~〉(夜のどこかで 〜night shift〜, 1994년)
  • 〈월화〉(月華, 1994년)
  • 〈태초에, 여자는 태양이었다〉(原始、女は太陽だった, 1995년)
  • 〈Tokyo Rose〉(1995년)
  • 〈MOONLIGHT SHADOW - 달에 짖어라〉(MOONLIGHT SHADOW-月に吠えろ, 1996년)
  • 〈APPETITE〉(1997년)
  • 〈귀성 ~Never Forget~〉(帰省 〜Never Forget〜, 1998년)
  • 〈오늘밤, 유성〉(今夜、流れ星, 1998년)
  • 〈헤메이다〉(とまどい, 1998년)
  • 〈오페리아〉(オフェリア, 1999년)
  • 〈Trust Me〉(1999년)
  • 〈It's brand new day〉(2001년)
  • 〈The Heat 〜musica fiesta〜〉(2002년)
  • 〈Days〉(2003년)
  • 붉은 꽃〉(赤い花, 2004년)
  • 처음 만난 그 날처럼〉(初めて出逢った日のように, 2004년)
  • 〈낙화유수〉(落花流水, 2005년)
  • 〈꽃이여, 춤춰라〉(花よ踊れ, 2006년)
  • 〈DIVA Single Version〉(2009년)
  • 〈Crazy Love〉(2010년)

공연[편집]

콘서트 투어 디너쇼 투어
  • Akina Milkyway '83 봄바람을 느껴(Akina Milkyway '83 春の風を感じて, 1983년)
  • RAINBOW SHOWER(1983년)
  • 보고싶은 아키나 만날 수 있을까 아키나 나카모리 아키나 음악감상회
    (逢いたい菜 逢えるか菜 中森明菜音楽鑑賞会, 1984년)
  • BITTER & SWEET(1985년)
  • LIGHT & SHADE(1986년)
  • A HUNDRED days(1987년)
  • Femme Fatale (1988년)
  • Felicidad(1997년)
  • SPOON(1998년)
  • 나카모리 아키나 2000 ~21세기로의 여행~(中森明菜 2000 〜21世紀への旅立ち〜, 2000년)
  • ALL ABOUT AKINA 20th Anniversary IT'S BRAND NEW DAY(2001년)
  • MUSICA FIESTA TOUR 2002(2002년)
  • AKINA NAKAMORI LIVE TOUR 2003 - I hope so -(2003년)
  • AKINA NAKAMORI A-1 tour 2004(2004년)
  • AKINA NAKAMORI LIVE TOUR 2006 〜The Last destination〜(2006년)
1996년 5월 초연. 같은 해 12월 개최이후 2009년까지 매년 연말에 개최.

출연[편집]

NHK 홍백가합전[편집]

텔레비전 드라마[편집]

미니시리즈[편집]

  • 《솔직한 그대로》(素顔のままで, 1992년 4월 13일 - 6월 29일, 후지 테레비) - 츠키시마 칸나 역
  • 《차가운 달》(冷たい月, 1998년 1월 12일 - 3월 16일, 니혼 테레비) - 시나 키다이가 역
  • 《보더 범죄 심리수사 파일》(ボーダー 犯罪心理捜査ファイル, 1999년 1월 11일 - 3월 8일, 니혼 테레비) - 스기시마 도에 역
  • 《프리마담》(プリマダム, 2006년 4월 12일 - 6월 21일, 니혼 테레비) - 쿠라하시 난코 역

특집극, 단막극[편집]

  • 《달려라 청춘 42.195km 눈물과 땀의 마라톤 사나이》({{lang|ja|走れ青春42.195㎞ 涙と汗のマラソン野郎, 1984년 4월 11일, 테레비 도쿄)
  • 《트라이앵글 블루 스페셜 II》(トライアングルブルースペシャルII, 1987년 1월 2일, 테레비 아사히) - 아키나 역
  • 《베스트 프렌드, 「인간교차점」보다》(ベスト・フレンド 「人間交差点」より, 1987년 4월 15일, 도쿄방송) - 카지마 아야 역
  • 《나카모리 아키나의 스파게티 사랑이야기》(中森明菜のスパゲティー恋物語, 1988년 4월 14일, 후지 테레비) - 노무라 아유미 역
  • 《악녀 A·B》(悪女A・B, 1991년 8월 30일, 후지 테레비) - 마미야 카스미, 구니모토 신코 역

영화[편집]

  • 《사랑 여행》(愛・旅立ち, 1985년) - 고이즈미 유키 역
  • 《달려라 메로스》(走れメロス, 1992년) - 라이사 역 (목소리 출연)

라디오[편집]

  • 《첫 번째 이별》(ひとつめのサヨナラ, 1982년 12월 - 1984년 12월, 분카 방송)
  • 《FIFTY OFF》(1992년 4월 5일 - 1993년 12월 26일, FM 도쿄)

수상 목록[편집]

  • 1983년
    • 16회 일본 레코드 세일즈 대상 - 세일즈 대상, LP대상
  • 1984년
    • 제10회 니혼 테레비 음악제 - 그랑프리
    • '84 당신이 선정한 전일본가요음악제 - 골든 그랑프리
  • 1985년
    • 제14회 FNS 가요제 - 그랑프리
    • 제18회 일본 레코드 세일즈 대상 - 아티스트 세일즈 대상, 싱글 부문: 대상
    • 제27회 일본 레코드 대상 - 대상, 금상, 우수앨범상
  • 1986년
    • 제19회 전일본유선방송대상 (상반기) - 그랑프리
    • 제12회 니혼 테레비 가요제 - 그랑프리
    • 제19회 일본가요대상 - 대상
    • 제15회 FNS 가요제 - 그랑프리
    • 제19회 일본 레코드 세일즈 대상 - 아티스트 세일즈 대상, 싱글 부문: 대상, LP 부문: 대상
    • 제28회 일본 레코드 대상 - 대상, 금상, 베스트 아티스트상
  • 1987년
    • 제1회 일본 골드디스크 대상 - The Grand Prix Artist of the Year, The Best Artist of the Year, The Best Single of the Year
    • 제20회 일본 레코드 세일즈 대상 - 아티스트 세일즈 대상

저서와 사진집[편집]

  • 中森明菜写真集. 近代映画社,1982년 11월 5일.(일본어)
  • BOMB!アイドル・フォトパックシリーズ ひとりじめ 中森明菜. 学習研究社,1982년 12월 9일.(일본어)
  • 気になる視線 私をつかまえて. ワニブックス,1982년 12월 15일. ISBN 4-584-20053-X (일본어)
  • ポップ・アイドル 8 中森明菜. オリジナルコンフィデンス,1983년 2월 25일. ISBN 4-87131-010-8 (일본어)
  • 本気だよ 菜の詩・17歳. 小学館,1983년 5월 1일. ISBN 4-09-363121-2 (일본어)
  • 中森明菜ポスターパッ. 近代映画社,1984년 9월 15일. (일본어)
  • 中森明菜写真集 VINGTANS ―20 Years Old―. ケン企画,1985년 12월 24일(일본어)
  • 中森明菜写真集 VISUAL BOOK Cross My Palm. ほんの木,1987년 12월 24일. ISBN 4-938568-03-9 (일본어)
  • CRUISE 中森明菜ファッションブック. ほんの木,1989년 7월 13일. ISBN 4-938568-06-3 (일본어)
  • MY LIFE 1990 A・K・I・N・A NAKAMORI. ほんの木,1990년 11월 30일. ISBN 4-938568-15-2 (일본어)
  • 中森明菜 FIFTY OFF ESSAY with PHOTO. エフエム東京,1993년 12월 15일. ISBN 4-924880-21-3 (일본어)

주해[편집]

  1. 1982년은 일본 연호로 쇼와 57년이었다.

주석[편집]

  1. 中森明菜 ポシビリテイ. 芽瑠璃堂. 2013년 11월 21일에 확인.
  2. "紅白に出てほしい80年代アイドル」ランキング女性編", 《女性自信》, 2013년 9월 12일 작성. 2013년 11월 19일 확인.
  3. 한성숙. "재일동포 일본 여가수 나카모리 아키나 건강 악화로 은퇴 위기", 《스포츠한국》, 2010년 10월 28일 작성. 2013년 11월 21일 확인.
  4. "なぜ、中森明菜待望論が巻き起こるのか?【前篇】「すべてを背負う潔さ」", 《夕刊ガジェット通信》, 2013년 11월 12일 작성. 2013년 11월 20일 확인.
  5. (일본어) "中森明菜 断絶した家族に続く災厄…「妹は交通事故で障害が」", 《Livedoor News》, 2013년 9월 24일 작성. 2013년 11월 18일 확인.
  6. (일본어) "中森明菜 父が告白「誤解が生んだ“家族との断絶”18年", 《Livedoor News》, 2013년 10월 22일 작성. 2013년 11월 18일 확인.
  7. 김태은. "일본 연예계 70%는 한국계?", 《스타뉴스》, 2006년 8월 13일 작성. 2013년 11월 19일 확인.
  8. 이상연. "해외에서 빛나는 한국인 ⑥ - 야스다 나루미", 《경향신문》, 1995년 9월 16일 작성. 2013년 11월 19일 확인.
  9. (일본어) ポポロ編集部 (1994년 12월 27일). 《中森明菜 心の履歴書 不器用だから、いつもひとりぼっち》. 麻布台出版社, 60-61쪽. ISBN 4-90-067808-2
  10. Nippop. Nippop. 2014년 4월 17일에 확인.
  11. ポポロ編集部. 1994년. 102-104쪽.
  12. (일본어) 나카모리 아키나(中森明菜) (1983년 5월 1일). 《本気だよ 菜の詩・17歳》. 小学館, 124-127쪽. ISBN 4-09-363121-2
  13. 나카모리 아키나, 1983년. 129쪽.
  14. 나카모리 아키나, 1983년. 131-134쪽.
  15. ポポロ編集部. 1994년. 124-125쪽.
  16. 나카모리 아키나, 1983년. 134-140쪽.
  17. 나카모리 아키나, 1983년. 146쪽.
  18. (일본어) 츠츠미 쇼지(堤昌司) (2009년 6월 10일 작성). 〈コンプリート・シングル・コレクションズ〜ファースト・テン・イヤーズ<ライノ・プレミアム・エディション>의 앨범 노트 [4×12cmCD]〉. ワーナーミュージック・ジャパン. (WPCL-10681/84). 4쪽.
  19. (일본어) "驚きの80年代アイドルのキャッチコピーランキング", 《goo ランキング》, 2011년 9월 25일 작성. 2013년 11월 20일 확인.
  20. (일본어) HEY!HEY!HEY!MUSIC CHAMP (텔레비전 프로그램). フジテレビ.
  21. ポポロ編集部. 1994년. 131쪽.
  22. 나카모리 아키나, 1983년. 109-112쪽.
  23. NHKで放送禁止の歌. 芽瑠璃堂放送事故タレコミコーナー (2007년 2월 22일). 2013년 11월 21일에 확인.
  24. 中森明菜のプロフィール·ヒストリー - オリコン芸能人事典-ORICON STYLE. オリコン. 2013년 11월 16일에 확인.
  25. 第25回日本レコード大賞. 日本作曲家協会. 2014년 3월 27일에 확인.
  26. 日刊スポーツ・特集・芸能連載. 《第12回 中森明菜 デパートの屋上で「少女A」》. 日刊スポーツ新聞社. 2014년 3월 30일에 확인.
  27. NHK紅白歌合戦ヒストリー. 《第34回》. 일본방송협회. 2014년 3월 27일에 확인.
  28. (일본어) 마키아노 모토히로(馬飼野元宏) (2006년 7월 20일). 《Hotwax presents 歌謡曲 名曲名盤ガイド 1980's》. シンコーミュージック・エンタテイメント, 64-65쪽. ISBN 4-40-175106-X
  29. 第27回日本レコード大賞. 日本作曲家協会. 2013년 11월 19일에 확인.
  30. 第28回日本レコード大賞. 日本作曲家協会. 2013년 11월 19일에 확인.
  31. 第1回日本ゴールドディスク大賞 / Gold Disc Hall of Fame 1st. 日本レコード協会 (2005년 9월 12일). 2013년 11월 20일에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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