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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oryu-ji15s3200.jpg|호류지 중문 금강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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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30일 (수) 19:16 판

호류지
오층탑
남대문
호류지 중문 금강역사

호류지(일본어: 法隆寺, ほうりゅうじ, 법륭사)는 나라 현 이코마 군 이카루가 정에 있는 성덕종의 총본산이다. 이카루가데라(斑鳩寺, いかるがでら)라고도 한다.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즉 우마야토노키미(厩戸王)가 세운 사원으로, 창건시기는 역시 쇼토쿠 태자가 세운 사원인 오사카시텐노지가 세워진 지 약 20년 뒤인 607년이라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금당, 5중탑 등이 있는 서원(西院)과 몽전 등이 있는 동원(東院)으로 나뉘어 있다. 서원가람(西院伽藍)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중 하나이다. 호류지의 건축물은 호키지(法起寺)와 함께 1993년에 "호류지 지역의 불교건축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기원과 역사

창건

호류지에 대해서는 "일본 불교 중흥의 시조인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사원이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상식적인 견해이다. 쇼토쿠 태자는 수수께끼가 많은 인물로, 20세기말경부터는 "쇼토쿠 태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지만, 이 설에 대해서는 반론도 나와 있다.《쇼토쿠 태자의 탄생》의 저자인 오야마 세이이치(大山誠一)는 초인적인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있는 "쇼토쿠 태자"는 가공의 인물이라고 하면서도, "쇼토쿠 태자"의 모델이 된 우마야토노키미란 인물의 존재와 그 인물이 이카루가노미야(斑鳩宮) 및 이카루가데라를 세운 것은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호류지 서원가람이 7세기말~8세기초의 건립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되어 있고, 이 가람이 세워지기 이전에 소실된 전신격인 사원(이른바 약초가람)이 존재했다는 것도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쇼토쿠 태자의 이카루가노미야 유적이라 불리는 호류지 동원 지하에서도 전신격의 건물 유적이 검출되고 있다. 이상의 사실에서 쇼토쿠 태자의 인물상이 후세의 많이 윤색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델이 된 우마야토노키미에 의해서 7세기 초 이카루가 땅에 본격적인 사원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해도 좋다고 생각된다.

통설에 따르면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9년 (601년), 쇼토쿠 태자는 이카루가 땅에 이카루가노미야를 세우고, 그 근처에 세워진 것이 호류지라고 한다. 금당의 히가시노마(東の間)에 안치된 동조약사여래좌상(국보)의 광배명(光背銘)에는 "요메이 천황(用明天皇)이 스스로 병 구완을 위해 가람건립을 발원했으나, 요메이 천황이 얼마 안가 사망했기 때문에 유지를 받든 스이코 천황쇼토쿠 태자스이코 천황 15년 (607년), 다시금 불상과 절을 완성했다."는 취지의 기술이 있다. 그러나 정사인 《니혼쇼키》에는 (후술할 670년 화재의 기사는 있지만) 호류지의 창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앞에 기술한 금당 약사여래좌상에 대해서는

  1. 상 자체의 양식과 주조기법면에서 실제로 제작된 때는 7세기 후반으로 늦춰지는 것으로 보이는 점.
  2. 607년 당시 일본에서의 약사여래 신앙 존재가 의문시되고 있다는 점.
  3. 금석문 중의 용어에 의문이 더한다는 점.

등의 이유에서, 말 그대로 60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제작된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금당 중앙에 안치된 본존은 "623년쇼토쿠 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도리(止利)가 만들었다"는 내용의 광배명을 가진 석가삼존상인데, 이것보다 오래된 약사여래상이 히가시노마에 안치되어 보살상 취급을 받고 있다는 점도 의문이다.

이처럼 약간의 확실치 않은 점은 있지만, 호류지의 창건이 7세기 전반 쇼토쿠 태자 생존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발굴 조사의 결과 등에서도 명백하다. 고교쿠 천황 2년 (643년),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가 야마시로노오에노미코(山背大兄王)를 습격했을 때에 이카루가노미야는 소실되었지만, 호류지는 이때 무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니혼쇼키》27권에 "夏四月癸卯朔壬申 夜半之後 災法隆寺 一屋無餘 (덴치 천황 9년(670년)에 호류지는 한 채도 남김없이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의 진위성을 둘러싸고, 현존하는 호류지 서원가람은 쇼토쿠 태자 창건시에 세워졌다는 설과 670년에 전소된 후 재건되었다는 설이 첨예하게 대립해, 이른바 "재건·비재건 논쟁"이 일어났다(자세한 것은 후술을 참조). 덧붙여 발굴 조사와 건축용 자재 벌채 연대의 과학적 조사 등의 뒷받침 증거로부터, 현존하는 호류지 서원가람은 670년에 소실한 뒤 재건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다만, 고교쿠 천황 2년(643년)의 조구 왕가(上宮王家, 쇼토쿠 태자 일가) 멸망 후 누가 서원가람을 재건했는가 등, 재건의 사정에 대해서는 수수께끼도 많다. 소실 전의 구 가람 (이른바 약초가람)은 현존하는 서원가람의 위치가 아닌 남동쪽으로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현존하는 서원가람이 거의 남북방향의 중축선을 따라 세워져 있는 것에 비해, 구 가람의 중축선은 북서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더욱이 현 서원가람이 세워진 땅은 산등성이를 깎고 양쪽의 계곡을 메워 만든 땅이라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어째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면서까지 가람의 위치와 방위를 변경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재건시기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현존하는 서원가람의 건축을 보면, 세부의 양식 등에서 금당이 가장 이른 연대로 7세기말 지토 천황(持統天皇) 때 건립되었다고 생각된다. 5중탑이 그 뒤를 잇고 중문, 회랑은 다소 늦게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法隆寺伽藍縁起并流記資財帳》에 따르면 중문의 인왕상과 5중탑 1층에 안치된 소조조각군은 와도(和銅) 4년(711년)의 제작된 것으로, 이 즈음에는 서원가람 전체가 완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헤이안 시대에 쓰여진《七大寺年表》에는 와도 기간에 호류지가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팔각당의 몽전을 중심으로 하는 동원가람은 덴표(天平) 10년(738년)경, 교신(行信) 승도가 이카루가노미야의 옛 터에 태자를 그리워하며 건립한 것이다.

엔초(延長) 3년(925년)에는 서원가람의 대강당, 종루가 소실되고 에이쿄(永享) 7년(1435년)에는 남대문이 소실되는 등, 몇번의 화재를 겪지만, 산 전체가 소실되는 대화재는 겪지 않고 건축물, 불상을 비롯해 각 시대의 많은 문화재를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

근세에 들어서 게이초(慶長)기간(17세기 초반)에는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 의해서, 겐로쿠(元禄)~호에이(宝永) 기간(17세기 말~18세기 초)에는 에도 막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생모 게이쇼인(桂昌院)에 의해서 가람의 복구가 행해졌다.

근대에 들어서는 폐불훼석의 영향으로 절을 유지하기가 곤란해져 1878년(메이지 11년)에는 관장 千早定朝의 결단으로 쇼토쿠 태자의 화상(唐本御影도혼미에이)을 비롯한 300여점의 보물을 당시 황실에 헌납해 금 1만엔을 하사받았다. 이 보물들은 "호류지 헌납 보물"로 불려 그 대부분은 도쿄 국립 박물관의 호류지 보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34년(쇼와 9년)부터 "쇼와 대보수"가 시작되어 금당, 5중탑을 비롯한 여러 건물의 수리가 행해졌다. "쇼와 대보수"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끼고 반세기가량 계속되어, 1985년(쇼와 6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 기념 법요가 행해졌다. 이 사이에 1949년(쇼와 24년)에는 수리 해체중인 금당에서 화재가 발생해, 금당 1층 내부의 기둥과 벽화가 손상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950년법상종에서 독립했다.

1981년(쇼와 56년)부터는 "쇼와 자재부 조사"로서 절 내의 많은 문화재의 재조사가 실시되어,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견했다. 조사의 성과는《호류지의 소중한 보물 - 쇼와 자재부》란 책으로 쇼가쿠칸에서 간행되고 있다.

기타

백제관음상담징이 그린 금당 벽화가 있다. 이 중에서 금당 벽화는 1948년에 불타 버렸다.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