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다자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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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원조로 북벌을 준비하던 [[쑨원]]의 사후 국민당과 공산당, 코민테른 사이의 관계는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국민 혁명으로 전역의 정권을 잡은 [[장제스]]는 [[1927년]] 상하이에서 [[4.12사건]]을 일으켜 코민테른 성원에 대한 숙청에 나서게 된다. 4.12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리다자오도 이때 [[베이징]]에서 다른 동료 19명과 함께 감금되었고 [[소련]]과 내통해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죄로 [[4월 28일]] [[중화민국]] 베이징을 관할하던 군벌 장쭤린의 명령으로 처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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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5일 (월) 07:47 판

리다자오 탄생100주년 기념우표

리다자오(이대교 혹은 리대소, 중국어 간체자: 李大钊, 정체자: 李大釗, 1888년 10월 29일 - 1927년 4월 28일)는 중국 지식인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소개하고 천두슈와 함께 중국 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생애

리다자오는 허베이 성 탕산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3년톈진 시의 북양정법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13년부터 1917년까지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과에서 공부하고 중국에 돌아갔다. 1917년~1918년부터 국립 베이징대학교의 역사학, 경제학 교수 겸 도서관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였고 볼셰비키소비에트 연방의 혁명을 지지한 최초의 중국 지식인이었다.

그는 많은 중국인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하는 한편, 중국의 적잖은 인민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는데 마오쩌둥에게 대학 도서관의 보조사서로 일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사람도 바로 리다자오이다. 리다자오는 중국의 농민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보았는데 그런 점에서 마오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많은 관련 지식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열렬한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자였고 초기 사상의 뿌리는 크로포트킨의 공산사상과도 무관치 않았으며, 1917년 10월 특히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고 나서부터는 5.4운동 전후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경도되었다. 그는 1918년 11월 《신청년》에 발표한 <볼셰비즘의 승리> 등의 대표적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으로 큰 영향을 끼쳤으며 천두슈와 함께 《매주평론》을 창간,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일으켰다.

1921년 리다자오는 천두슈와 함께 중국에 공산당을 창립했는데 이때 비로소 비공식적이고 문단적인 성격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선전가에서 비로소 공식적인 중국 공산당 조직의 지도 계열 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위해서이었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있었던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에는 마오쩌둥도 참가하였다. 천두슈와 리다자오의 지휘 아래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이 지도하는 코민테른과의 협력관계를 키워갔으며 1922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 국민당과 연계하게 되고 이것이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이어졌다. 리다자오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1924년 마오쩌둥 등 다른 공산당원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기도 했고,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레닌의 원조로 북벌을 준비하던 쑨원의 사후 국민당과 공산당, 코민테른 사이의 관계는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국민 혁명으로 전역의 정권을 잡은 장제스1927년 상하이에서 4.12사건을 일으켜 코민테른 성원에 대한 숙청에 나서게 된다. 4.12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리다자오도 이때 베이징에서 다른 동료 19명과 함께 감금되었고 소련과 내통해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죄로 4월 28일 중화민국 베이징을 관할하던 군벌 장쭤린의 명령으로 처형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