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
이덕무(李德懋, 1741년 7월 23일(음력 6월 11일) ~ 1793년 3월 7일(음력 1월 25일))는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이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소위 간서치(看書癡)로 유명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조선 제2대 임금 정종의 막내 아들인 무림군 이선생(李善生)의 10대손이다. 자(字)는 무관(懋官)이고[1] 호(號)는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 등이다.[2] 별호는 선귤자(蟬橘子).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이른바 조선 시대 국민 간서치(朝鮮 時代 國民 看書癡)로도 유명하였다.
일생
[편집]경사(經史)를 비롯하여 기문이서(奇文異書)에 걸쳐 여러 방면에서 박식을 자랑하였으나, 서얼 출신인 관계로 관직에서 중용되지는 못했다.[3] 일찍이 유득공·박제가·이서구와 함께 사가시집(四家詩集) 《건연집(巾衍集)》을 내어 문명을 떨쳤으며, 담헌 홍대용과도 교분이 두터웠다.[4]
1778년(정조 2년)에는 당시 서장관 심염조(沈念祖)를 수행하여 청나라에서 기균(紀均)·반정균(潘庭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 등의 석학과 교류하였다. 또한 청나라에서 여러 자료 및 고증학 관련 저서를 가져와 그의 학문을 발전시키게 된다. 귀국 후 북학을 제창하였다.
박제가·유득공·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그들과 함께 4검서관(四檢書官)으로 이름을 떨쳤다. 재직 중에 규장각 도서 편찬에 적극 참여하여 《도서집성》, 《국조보감》, 《대전통편》, 《규장각지》, 《홍문관지》, 《규장전운(奎章全韻)》 등 많은 서적을 정리·교감하였다.
그의 저술은 아들 이광규에 의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로 집성되었으며, 사후 이덕무 본인이 정선한 《아정유고》(雅亭遺稿)가 정조 임금의 특명으로 간행되었다. 이덕무의 일생을 기록한 행장(行狀)을 연암 박지원이 지었다.[5]
경력
[편집]- 1741년(영조 18년) 6월 11일, 출생[6] (1세)
- 1774년(영조 50년) 가을, 증광(增廣) 초시(初試) 합격[7] (34세)
- 1779년(정조 3년) 6월 1일, 외각(外閣, 교서관) 검서관 (39세)
- 1781년(정조 5년) 1월 21일, 내각(內閣, 규장각) 검서관 (41세)
- 1781년(정조 5년) 3월 18일, 6품 승진
- 1781년(정조 5년) 12월 27일, 사근도 찰방 겸 규장각 검서관
- 1783년(정조 7년) 11월 22일, 광흥창 주부 (43세)
- 1784년(정조 8년) 2월 25일, 사옹원 주부 (44세)
- 1784년(정조 8년) 6월 12일, 교서관 박사
- 1784년(정조 8년) 6월 29일, 적성(積城) 현감 겸 규장각 검서관
- 1787년(정조 11년) 2월 8일, 규장각 검서관 (47세)
- 1787년(정조 11년) 5월 9일, 적성 현감 겸 규장각 검서관[8]
- 1787년(정조 11년) 8월 22일, 4품 승진
- 1788년(정조 12년) 6월 10일, 검서관 면직[9] (48세)
- 1789년(정조 13년) 6월 20일, 와서(瓦署) 별제 (49세)
- 1790년(정조 14년) 6월 17일, 와서 별제 겸 규장각 검서관 (50세)
- 1790년(정조 14년) 7월 4일, 사도시 주부 겸 규장각 검서관[10]
- 1791년(정조 15년) 3월 18일, 장원서 별제 겸 규장각 검서관[11] (51세)
- 1793년(정조 17년) 1월 25일, 별세[12] (53세)
가계
[편집]- 증조부 : 이상함(李尙馠, 1647년 5월 10일 ~ 1678년 6월 20일), 통덕랑
- 증조모 : 거창(居昌) 신씨(慎氏, 1647년 2월 19일 ~ 1698년 12월 15일), 신이중(慎爾中)의 따님
- 조부 : 이필익(李必益, 1660년 1월 18일 ~ 1730년 4월 16일), 강계부사, 방어사
- 조모 : 순흥(順興) 안씨(安氏, 1655년 3월 6일 ~ 1717년 1월 18일), 안홍선(安弘善)의 따님[13]
- 부 : 이성호(李聖浩, 1718년 ~ 1793년 2월 23일),[14] 통덕랑
- 모 : 반남(潘南) 박씨(朴氏, 1720년 ~ 1765년 5월 1일), 아산현감 박사렴(朴師濂)의 따님[15]
- 본인 : 이덕무(李德懋, 1741년 6월 11일 ~ 1793년 1월 25일), 검서관, 현령
- 아내 : 숙인(淑人) 수원(水原) 백씨(白氏, 1741년 2월 27일 ~ 1817년 3월 21일), 동지중추부사 백사굉(白師宏, 1721년 ~ 1792년)의 따님[16]
- 자 : 이광규(李光葵, 1765년 6월 21일 ~ 1818년 12월 1일), 검서관,[17] 현감
- 자부 : 동래(東萊) 정씨(鄭氏, 1764년 ~ 1839년 2월 9일)
- 손자1 : 이규경(李圭景, 1788년 8월 5일 ~ 1856년 5월 16일)[18]
- 손자부1 : 함안(咸安) 조씨(趙氏, 1786년 8월 25일 ~ 1833년 1월 29일), 조수진(趙秀鎭)의 따님
- 손자2 : 이규정(李圭井, 1796년 11월 4일 ~ 1834년 3월 9일), 무과[19]
- 손자부2 : 안동(安東) 김씨(金氏, 1786년 8월 25일 ~ 1833년 1월 29일), 현감 김최행(金最行)의 따님
- 손자3 : 이규달(李圭達, 1801년 3월 21일 ~ 1860년 2월 27일)
- 손자부3A : 경주(慶州) 이씨(李氏, 1802년 ~ 1833년 5월 26일)
- 손자부3B : 평산(平山) 신씨(申氏, 1812년 2월 17일 ~ 1876년 윤5월 1일)
- 손녀1 : 전주(全州) 이씨(李氏), 손녀사위 정승환(鄭昇煥)
- 손녀2 : 전주(全州) 이씨(李氏), 손녀사위 조직순(趙直淳)
- 장녀 : 전주(全州) 이씨(李氏), 사위 유선(柳烍)
- 차녀 : 전주(全州) 이씨(李氏), 사위 김사황(金思黃)
- 남동생1 : 이공무(李功懋, 1757년 3월 7일 ~ 1825년 12월 27일), 검서관, 양천현령[20]
- 남동생2 : 이언무(李彦懋, 1763년 2월 8일 ~ 1838년 2월 3일), 무과, 강원감영 중군[21]
- 여동생1 : 전주(全州) 이씨(李氏), 남편 검서관 원유진(元有鎭)
- 여동생2 : 전주(全州) 이씨(李氏), 남편 현감 서리수(徐理修)
저서
[편집]- 《관독일기》(觀讀日記)
- 《기년아람》(紀年兒覽) : 이만운과 공저
-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 《사소절》(士小節)
- 《앙엽기》(盎葉記)
- 《열상방언》(洌上方言)
- 《영처문고》
- 《영처시고》
- 《예기고》(禮記考)
- 《이목구심서》
- 《입연기(入燕記)》
-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 《청비록》(淸脾錄)
- 《편찬잡고》
- 《한죽당섭필》
- 《협주기》(峽舟記)
- 《건연집》 :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와 공저
이덕무를 연기한 배우
[편집]드라마
[편집]영화
[편집]- 차태현 - 2012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각주
[편집]- ↑ 이는 28세가 되던 1768년 1월 1일에 바꾼 자(字)이다. 초기 자는 명숙(明叔)이다.
- ↑ 이외에 단좌헌(端坐軒), 주충어재(注蟲魚齋), 학초목당(學草木堂), 향초원(香草園), 매탕(蕩宕), 사이재거사(四以齋居士), 학상촌부(鶴上村夫), 한죽당(寒竹堂), 이암거사(以菴居士) 등의 호도 사용하였다.
- ↑ 본인이 아닌, 아버지 이성호(李聖浩)가 서얼이었다. 서얼의 후손은 서얼 신분이다.
- ↑ 《아정유고(雅亭遺稿)》 부록, 〈선고부군유사(先考府君遺事)〉
- ↑ 《연암집(燕巖集)》 제3권, 〈형암행장(炯菴行狀)〉
- ↑ 한성부 중부 관인방(寬仁坊) 대사동4가(大寺洞四街)에 있던 본가에서 태어났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70권 〈선고적성현감부군연보상(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 ↑ 영조가 나라를 다스린 지 50년이 되고 정순왕후와 가례를 올린 지 16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여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시행된 특별 시험이다. 11월 4일에 초시를 시작하여 전시(본과)는 11월 28일에 시행되었다. 이덕무는 이 시험의 초시에 합격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과거 공부 및 응시를 하지 않았다.
- ↑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정조 임금에게 청하여 현감 직책을 유임시켰다.
- ↑ 친동생 이공무(李功懋)가 신임 검서관이 되면서 이덕무의 검서관 겸직이 면직되었다.
- ↑ 유득공(柳得恭)과 본직을 맞바꿔 교체되었다.
- ↑ 이덕무의 최종 품계는 정3품 통훈대부 또는 종3품 중직대부, 중훈대부이다. 이덕무의 아내가 정3품 당하관 또는 종3품 품계 보유자의 처에게 주어지는 숙인(淑人)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 ↑ 한성부 태묘동(太廟洞) 본가에서 별세하였다. 1월 18일부터 감기, 가래, 기침이 심해졌다고 한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71권 〈선고적성현감부군연보하(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 ↑ 이덕무의 아버지 이성호가 첩 소생이기 때문에 이성호의 생모는 아니다. 즉, 이필익의 적처(適妻).
- ↑ 이익필의 일곱 째 아들이다. 이성호의 아버지 이익필의 친자식 여섯 명은 이성기(李聖驥), 이성봉(李聖鳯), 이성유(李聖濡), 이성준(李聖駿), 이성옥(李聖沃), 이성호인데, 모두 첩 소생이다. 이익필은 큰아버지 이필태(李必泰)의 아들 이성린(李聖麟)를 양자로 들였다.
- ↑ 이덕무의 외할아버지 박사렴의 신분도 서파(庶派, 서얼)이다. 박사렴의 아버지는 숙녕옹주(淑寧翁主)의 남편인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이다. 《승정원일기》 영조 11년 을묘년(1735년) 12월 22일 기사
- ↑ 백사굉의 서얼 아들, 즉 이덕무의 처남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한 백동수(白東脩, 1743년 ~ 1816년)이다.
- ↑ 이덕무 사후에 검서관으로 특별히 발탁되었다.
- ↑ 아명은 이문길(李文吉)이다.
- ↑ 이덕무의 남동생 이공무의 둘째 아들 이은섭(李殷燮)의 양자로 갔다.
- ↑ 이덕무의 친동생이다. 이성옥(李聖沃)의 양자로 갔다.
- ↑ 이덕무의 친동생이다. 1791년(정조 15년) 9월 27일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성유(李聖濡)의 양자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