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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라 (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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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라(만주어: ᡠᠯᠠ Ula, 한국 한자: 烏拉 오랍)는 해서여진훌룬 구룬의 네 부족 중 하나로 곧 기존의 후룬 구룬이 해릉왕 시기에 쑹화강(송화강, 만주어: ᠰᡠᠩᡤᠠᡵᡳ
ᡠᠯᠠ
Sunggari Ula) 하안(河岸)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생긴 지명인 울라 홍니(烏拉洪尼勒, Ula Hongni)에 이주한 것이었다. 훌룬(呼倫, 만주어: Hūlun)국은 울라(烏拉, 만주어: ᡠᠯᠠ Ula), 호이파(輝發, 만주어: ᡥᠣᡳᡶᠠ Hoifa), 하다(哈達, 만주어: ᡥᠠᡩᠠ Hada), 여허(葉赫, 만주어: ᠶᡝᡥᡝ Yehe)의 4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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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룬 구룬(우라)의 시조인 나치부루(만주어: ᠨᠠᠴᡳᠪᡠᠯᡠ Nacibulu)는 본래 호이파와 우라 지역 사이의 키르사 강(만주어: ᡴᡳᡵᠰᠠ
ᠪᡳᡵᠠ
Kirsa Bira)의 상류 유역에서 성씨없이 홀로 살고 있던 인물이었는데, 이후 쑹화강(숭아리강) 유역으로 이주하여 우라 부족의 수장이 되었다.[1]

나치부루 이후 아들 샹갼 도르호치(만주어: ᡧᠠᠩᡤᡳᠶᠠᠨ
ᡩᠣᡵᡥᠣᠴᡳ
Šanggiyan Dorhoci)가 수장을 계승했는데, 우라의 마지막 인 부잔타이(만주어: ᠪᡠᠵᠠᠨᡨᠠᡳ Bujantai)의 후손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족보인 《오랍합살호패륵후배당책(烏拉哈薩虎貝勒後輩檔冊)》에 따르면, 그는 1,000여 리에 달하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며 후룬 구룬을 경영했다고 한다. 도르호치의 사후 아들 갸마카 쇼주구(만주어: ᡤᡳᠶᠠᠮᠠᡴᠠ
ᡧᠣᠵᡠᡤᡡ
Giyamaka Šojugū)가 우라의 수장이 되었다.[2] 갸마카는 1443년 명나라로부터 올자전위(兀者前衛)의 지휘(指揮)에 임명되었다.[3]

도르호치 쇼주구 사후 아들인 둘기(만주어: ᡩᡠᠯᡤᡳ Dulgi)가 후룬의 수장을 계승했다.[4] 둘기는 성화 연간(1464-1487)에 명나라로부터 올자전위도독(兀者前衛都督)에 임명되었다.[5]

둘기의 사후 후룬의 명목상 국주는 그의 차남 구더이 주얀(만주어: ᡤᡠᡩᡝᡳ
ᠵᡠᠶᠠᠨ
Gudei Juyan)에게 계승되었지만 명나라에게 탑산전위도독(塔山前卫都督)으로 임명된 것은 갸마카 쇼주구의 다른 아들인 수허터(만주어: ᠰᡠᡥᡝᡨᡝ Suhete)였고, 이후에는 갸마카 쇼주구의 4남 수이툰의 아들인 커시너(만주어: ᡴᡝᠰᡳᠨᡝ Kesine)가 도독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커시너 도독과 그 아들 처처무(만주어: ᠴᡝᠴᡝᠮᡠ Cecemu)가 또다른 일족 사람인 바다이 다르한(만주어: ᠪᠠᡩᠠᡳ
ᡩᠠᡵᡥᠠᠨ
Badai Darhan)에게 살해당했다. 후룬 연맹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던 커시너(만주어: ᡴᡝᠰᡳᠨᡝ Kesine)가 피살되면서 손자 왕타이는 시버부의 수하이성(만주어: ᠰᡠᡳᡥᠠ
ᡥᠣᡨᠣᠨ
Suiha Hoton)으로 도주했고, 차남 왕주 와이란(만주어: ᠸᠠᠩᠵᡠ
ᠸᠠᡳᠯᠠᠨ
Wangju Wailan)과 그 아들 볼콘 셔진(만주어: ᠪᠣᠯᡴᠣᠨ
ᡧᡝᠵᡳᠨ
Bolkon Šejin) 등은 하다(만주어: ᡥᠠᡩᠠ Hada)를 건립했다.[6] 이후 커시너를 죽인 바다이 다르한(만주어: ᠪᠠᡩᠠᡳ
ᡩᠠᡵᡥᠠᠨ
Badai Darhan)을 제거한 구더이 주얀(만주어: ᡤᡠᡩᡝᡳ
ᠵᡠᠶᠠᠨ
Gudei Juyan) 사후 후룬의 수장은 그의 아들 타이란(만주어: ᡨᠠᡳᡵᠠᠨ Tairan)에게 계승되었고, 그 후 타이란의 아들 부얀(만주어: ᠪᡠᠶᠠᠨ Buyan)으로 이어졌다. 1561년, 부얀은 우라제부를 통합하고, 쑹화강(송화강) 연안에 있는 홍니(만주어: ᡥᠣᠩᠨᡳ Hongni)에 우라성과 궁궐을 축조한 뒤 버이러를 자칭했다.[7] 부얀의 사후 아들 부간(만주어: ᠪᡠᡤᠠᠨ Bugan)이 수장을 계승했다. 이 무렵 부얀의 종형제 하다의 완 한 왕타이의 세력이 강성하여, 여진의 각 부의 패주가 되었으며, 우라도 하다에 종속되었다. 우라는 하다에 협력하여 공동의 이익을 취함으로써 왕타이의 패권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명나라와도 하다를 거쳐 교류하였다.[8] 하다의 왕타이가 죽은 뒤 후계자인 후르간(만주어: ᡥᡡᡵᡤᠠᠨ Hūrgan)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병사하여 후계자 분쟁이 벌어져 하다가 혼란에 빠지자, 우라는 여세를 몰아 하다의 통제에서 벗어나 예허와 수완, 시버 2부를 분할하고, 원래 우라의 지배를 받았던 수이하성을 탈환했다.[9] 부얀의 사후 아들 부간(만주어: ᠪᡠᡤᠠᠨ Bugan)이 수장을 계승했다. 이 무렵 부얀의 종형제 하다의 완 한 왕타이의 세력이 강성하여, 여진의 각 부의 패주가 되었으며, 우라도 하다에 종속되었다. 우라는 하다에 협력하여 공동의 이익을 취함으로써 왕타이의 패권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명나라와도 하다를 거쳐 교류하였다.[10] 하다의 왕타이가 죽은 뒤 후계자인 후르간(만주어: ᡥᡡᡵᡤᠠᠨ Hūrgan)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병사하여 후계자 분쟁이 벌어져 하다가 혼란에 빠지자, 우라는 여세를 몰아 하다의 통제에서 벗어나 예허와 수완, 시버 2부를 분할하고, 원래 우라의 지배를 받았던 수이하성을 탈환했다.[11] 부간의 사후 아들 만타이(만주어: ᠮᠠᠨᡨᠠᡳ Mantai)가 후계자가 되었는데,[12] 만타이 부자 두 사람이 변경에 있는 마을인 솨얀 시란(만주어: ᠰᡠᠸᠠᠶᠠᠨ
ᠰᡳᡵᠠᠨ
Suwayan Siran)이란 곳으로 가서 그곳을 수선하고 해자를 파도록 했는데, 이때 부자가 마을의 부녀자를 두 명을 탐하여 결국 밤에 그들의 남편에게 살해당했다.[13]

만타이 사후에 우라의 수장은 누르가치에게 4년간 억류돼있던 만타이의 아우 부잔타이(만주어: ᠪᡠᠵᠠᠨᡨᠠᡳ Bujantai)가 계승하게 되는데, 그는 누르가치가 보낸 툴쿤 황잔(만주어: ᡨᡠᠯᡴᡠᠨ
ᡥᡡᠸᠠᠩᠵᠠᠨ
Tulkun Hūwangjan)과 볼콘 퍙구(만주어: ᠪᠣᠯᡴᠣᠨ
ᡶᡳᠶᠠᠩᡤᡡ
Bolkon Fiyanggū) 휘하 병력의 보호를 받으면서 숙부 힝냐(만주어: ᡥᡳᠩᠨᡳᠶᠠ Hingniya)의 암살 시도를 피하여 한으로 즉위하게 된다.[13] 그는 예허와 몽골의 제부와의 관계를 강화하고,[14] 1597년에 예허와의 혼인동맹을 이용하여 동해여진의 와르카의 안추라쿠 일대의 로툰(만주어: ᠯᠣᡨᡠᠨ Lotun)을 비롯한 세 부족의 신속을 받아냈으며,[15] 1603년~1605년 무렵에는 조선 함경도 종성의 동관진과 온성의 유원진을 공격하여 조선군과 충돌하고,[16][17][18] 건퇴에 병력을 유둔시켜 인근 조선의 번호였던 동해여진 부족들을 신속시켰다.[19][20] 마침내 부잔타이는 1605년 조선 조정으로부터 당상(堂上)의 직첩을 전달받아낼 수 있었다.[21]

원문

○朔甲午/建州衛胡酋老乙可赤, 與忽刺溫大戰於鍾城 烏碣巖大破之。

— 선조수정실록 41권, 선조 40년 2월 1일 갑오
해석

건주위(建州衛)의 호추(胡酋) 노을가적(老乙可赤)이 홀라온(忽剌溫)과 종성(鍾城) 오갈암(烏碣巖)에서 크게 싸워 대파시켰다.[22] 

1607년 2월 말에 부잔타이의 우라는 현성(縣城) 일대의 동해여진 부족들을 두고 누르가치의 세력과 조선 함경도 종성 오갈암(烏碣巖)에서 충돌했고, 우라의 1만 병력은 누르가치의 병력에 대패하였고, 그해 4월에도 누르가치의 장차남인 추옌다이샨의 병력과 동해여진 와르카부 첨터허(만주어: ᡮ᠋ᡝᠮᡨᡝᡥᡝ Ts'emtehe)의 표(만주어: ᡶᡳᠣ Fio) 성의 주민들 두고 충돌했다가 5,000필과 갑옷 3,000벌을 노획당했다.[23]

부잔타이는 예허와 협력하여 누르가치에 대항했지만, 추옌과 조카 아민(만주어: ᠠᠮᡳᠨ Amin) 타이지에게 병력 5천을 주어 우라성 인근의 이한산성(만주어: ᡳᡥᠠᠨ
ᠠᠯᡳᠨ
ᡥᠣᡨᠣᠨ
Ihan Alin Hoton)을 공격하여 함락하였고, 우라 병력 1,000명이 전사했다.[24] 1613년, 누르가치는 우라를 친정하여 우라군 1만이 전사하고 갑옷 7천 벌을 노획했고,[25] 부잔타이는 예허로 망명하여 이로부터 우라는 멸망했다.[26]

씨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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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라나라(烏拉那拉, 만주어: ᡠᠯᠠ
ᠨᠠᡵᠠ
Ula Nara)는 오라씨(烏喇氏)라고도 한다.[27][28] 울라나라는 무쿤(穆昆, Mukūn)과 할라(哈拉, Hala)의 연칭으로, 울라(烏拉, Ula)는 무쿤(穆昆: 종족)이요, 나라(那拉, Nara)는 할라(哈拉: 성씨)이다. 만주족의 씨족 중 하나로 16세기 후반 후룬이 울라기야(烏拉街, 만주어: ᡠᠯᠠ
ᡤᡳᠶᠠᡳ
Ula Giya) 일대로 이동하면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명말에 여진족 울라부 수장을 배출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대부분의 우라나라씨는 한성(漢姓)인 조(趙)씨로 가장했고, 일부는 동(桐), 강(相) 성을 사용했다.[29]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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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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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 저오; 오르타이; 쉬유완멍; 푸민 (1744). 《팔기씨족통보23. erei da mafa nacibulu. hoifai cala. ulai ebele. kirsa birai sekiyen de emhun tehebi...monggoso tafara be nakafi. si ai hala seme fonjiha de. anggai ici nara seme jabuha. tereci nara hala obume hūlame deribuhe...ulai ba i niyalma. bira de gurgu gasha i funiyehe. funggaha eyere be sabufi. orin niyalma tucibufi tuwanabume unggihe. nacibulu ini abalafi baha gurgu gasha yali sukū dethe funggaha be. etere be tuwame bufi unggihe. tere orin niyalma bederefi geren de alaha manggi. geren acafi hebešefi okdome gamafi. aiman i da obuha. 
  2. 홍 저오; 오르타이; 쉬유완멍; 푸민 (1744). 《팔기씨족통보23. (nacibulu i) jui šanggiyan dorhoci sirame ulai aiman i da oho. šanggiyan dorhoci akū oho manggi. jui giyamaka šojuku siraha. 
  3. 《英宗睿皇帝實錄》 卷一百 正統八年 正月 二十七日 1번째 기사, "○癸未命故兀者前衞指揮同知哈必荅哈必荅:抱本荅作合。子加木哈阿剌山衞指揮僉事忽魯忽納忽魯忽納:抱本作忽魯納。子沙魯斡蘭河衞指揮僉事亦薛哥子卜兒哈忽里吉山衞指揮僉事只魯哈只魯哈:廣本只作吉。子兀劄哈木蘭河衞指揮僉事不哈孫加哈你俱襲職禾屯吉衞指揮僉事粉甫老疾以其子哈魯代之"
  4. 《滿洲實錄》, "giyamaka šojugū de banjihangge suitun suitun de banjihangge dulgi"
  5. 《憲宗純皇帝實錄》 卷二百五十九 成化二十年 十二月 二十七日 3번째 기사, "○陞兀者前衞都指揮同知都里吉為都督僉事故事夷官授職二十五年始進一級頃都里吉以都指揮僉事求陞都督兵部已議陞都指揮同知至是復申前請且鄰壤皆為奏保而遼東守臣亦言其部落甚多眾心信服遂陞之"
  6. 《滿洲實錄》, "哈達國 哈達國汗姓納喇名萬本呼倫族也 後因住哈達處故名哈達乃烏拉部徹徹木之子納齊卜祿第七代孫也 其祖克錫納都督被族人巴岱達爾漢所殺萬遂逃住錫伯部綏哈城 其叔旺住外蘭逃至哈達部為部長後哈達部叛旺住外蘭被殺 其子博爾坤殺父仇人請兄萬為部長萬於是遠者招徠近者攻取其勢愈盛遂自稱哈達汗", "hadai gurun i wan han i hala nara gurun i da gebu hvlun amala hada gebungge ba de gurun tehe seme gurun i gebu be hada sehe ulai gurun i beisei da mafa nacibului nadaci jalan i omolo wan i mafa kesine dudu be ini uksun i badai darhan wara jakade wan burulame tucifi sibei aiman i hanci suiha gebungge hoton de tehe wan i eshen wangju wailan geli burulame genefi hadai aiman de ejen oho amala hadai aiman facuhvrafi wangju wailan be waha manggi wangju wailan i jui bolkon xejin amai bata be wafi ahvn wan be suiha hoton de ganafi uthai aiman de ejen obuha wan hanciki be dailame goroki be dahabume etenggi oho manggi wan enculeme han ofi"
  7. 《滿洲實錄》, "古對珠延生太蘭 太蘭生布顏盡收烏拉諸部率眾於烏拉河洪尼處築城稱王 布顏卒其子布干繼之 布干卒其子滿泰繼之", "gudei juyan de banjihangge tairan tairan de banjihangge buyan buyan ulai aiman be gemu dahabufi ulai birai dalin i hūngni gebungge bade hoton arafi tefi enculeme beile sehe buyan de banjihangge bugan bokdo buyan beile akū oho manggi jui bugan siraha bugan beile akū oho manggi jui mantai siraha"
  8. 赵东升; 宋占荣(1992). 《乌拉国简史》. 中共永吉县委史办公室. p.16
  9. 赵东升; 宋占荣(1992). 《乌拉国简史》. 中共永吉县委史办公室. pp. 20, 90
  10. 赵东升; 宋占荣(1992). 《乌拉国简史》. 中共永吉县委史办公室. p.16
  11. 赵东升; 宋占荣(1992). 《乌拉国简史》. 中共永吉县委史办公室. pp. 20, 90
  12. 홍 저오; 오르타이; 쉬유완멍; 푸민 (1744). 《팔기씨족통보23. bugan akū oho manggi. jui mantai siraha. 
  13. 《太祖武皇帝實錄》 1. 1636. 先,陣前所擒布占太,恩養四載,至是七月,太祖欲放歸, 令禿兒空黃占、撥兒孔非英佔二人護送。 未至其國時,布占太兄滿太父子二人往所屬拴煙濕攔處修邊鑿壕, 父子淫其村內二婦,其夫夜入,將滿太父子殺之。 及布占太至日,滿太叔父興泥牙貝勒謀殺布占太,欲奪其位。 其護送二大臣保守門戶甚嚴,不能加害,於是興泥牙投夜黑而去。 布占太遂繼兄位為兀喇國主。 護送二人辭回。 十二月,布占太感太祖二次再生,恩猶父子,將妹滹奈送太祖弟黍兒哈奇貝勒為妻,即日設宴成配。 
  14. 阎崇年 (2006). 《努尔哈赤传·正说清朝第一帝》. 北京出版社. 59쪽. ISBN 9787200016598. 
  15. 《太祖武皇帝實錄》 1. 1636. 其布占太亦因與夜黑通,將滿太妻都都庫氏所玩銅錘,遣使送與納林卜祿。又將滿洲所屬斡兒哈部內按褚拉庫、內河二處酉長落吞、剛石吞、旺吉諾三人許獻夜黑,請其使而招服之。 
  16. 선조실록》 166권, 만력 31년 9월 2일 을묘 1번째 기사, "○乙卯/備邊司啓曰: "伏見北兵使及巡察使狀啓, 則賊胡雖小退, 而留屯豐界, 至造木柵, 爲久駐之計。 又犯於潼關, 接我而退, 其勢似爲鴟張。 前頭邊患之寢息, 恐未易爲期。"
  17. 선조실록》 166권, 만력 31년 9월 3일 병진 2번째 기사, "○咸鏡北道兵使李用淳馳啓曰: "忽賊之圍潼關也, 接戰將士等, 皆曰: ‘前與忽溫相戰已熟, 今見此賊, 則長甲、大劍, 鐵騎奔馳, 旗麾進退之狀, 大非忽溫。"
  18. 선조실록》 169권, 만력 31년 12월 22일 계묘 4번째 기사, ○備邊司啓曰: "忽溫之賊, 累次衝突, 去秋來犯鍾城, 今者又犯柔遠, 移屯於穩城江邊, 搜索藩胡, 其勢鴟張, 誠非細慮, 而兵使方在行營, 距穩城僅一日程之地。 必能臨機策應, 似無可虞, 但此賊胡, 雖不直犯鎭堡, 每次搶掠藩胡, 使我藩籬, 盡撤無餘, 其志似不在小。 若使邊將, 抄發精銳, 或乘夜斫營, 或設伏歸路, 相機要擊, 少挫其勢, 則必不至於如是凌轢。 令兵使, 十分設策, 使我兵威稍挀, 賊勢稍戢。 且自會寧, 歷鍾城、穩城, 已爲侵犯, 其勢必將及於慶源、慶興。 防備瞭望等事, 更加申飭, 俾無疏虞, 賊兵去留探問, 連續馳啓事, 監司處, 發馬行移何如?" 傳曰: "依允。"
  19. 선조실록》 186권, 만력 33년 4월 16일 경신 11번째 기사, ○ 啓曰: "所謂伊項、牛虛部落, 爲賊爪牙, 我國動靜, 無不通於忽酋, 潼關之變, 此賊爲之向導云。 金宗得徵聚六鎭及三邑之軍, 先爲掩殺, 此必剪去羽翼, 以爲漸圖件退之計矣。 但自我境, 抵件退, 四息餘程, 其間部落, 叛附於忽賊者, 亦有四、五處, 必盡爲除去, 然後行師, 動兵深入, 似非其宜。 都巡察使徐渻想已進到, 相與十分商確, 務在愼重, 毋貽後悔之意, 急遣宣傳官, 馳諭于監、兵使處, 何如?" 傳曰: "允。"
  20. 선조실록》 186권, 만력 33년 4월 25일 기사 4번째 기사, ○巡察使徐渻馳啓: "金宗得牒呈: ‘柔遠鎭境深處胡人, 自忽溫出來言: 「件退, 曾留騎軍三百餘名, 又騎軍一百五十餘名, 今已到件退。」 云。’ 當此農民布野之時, 聲息如此, 衝東擊西之患, 極爲可慮。 會寧、穩城諸胡, 皆懷貳心, 稍稍撤去, 水上、下三百餘里, 當盡爲添防, 兵分勢弱, 糧亦垂渴, 將來之憂, 極爲危急。"
  21. 선조실록》 190권, 만력 33년 8월 29일 신미 3번째 기사, ○以備忘記傳于右承旨柳夢寅曰: "忽賊職牒, 予之初意, 雖可盡許, 不欲一時許之。 然僉意如彼, 百牒竝許, 亦或可矣。 至於阿叱耳之職, 則已授堂上, 使人纔還, 豆滿之波, 未乾於馬足, 而無端旋陞嘉善, 將卒之竝爲堂上, 職秩無等, 雖似未穩, 然此等之節, 則在我不須致慮, 必待彼更請然後, 不得已勉許可也。
  22. 조선왕조실록 (선조40년 2월 1일). “건주위의 호추 노을가적이 홀라온과 종성 오갈암에서 싸워 대패시키다”. 《sillok.history.go.kr》. 2019년 7월 20일에 확인함. 
  23. 《太祖武皇帝實錄》 2. 1636. 不意兀喇國布占太發兵一萬截於路。 虎兒憨見之, 將五百戶眷屬紮營于山嶺, 以兵百名看守, 一面馳報眾貝勒, 一面整兵二百, 佔山列營, 與敵兵相持。 經一夜, 次日兀喇兵來戰, 大將楊古里率眾奮力交鋒, 殺兀喇兵七人, 我兵止傷一人, 敵兵退回, 渡河登山, 畏懼無復敢來, 兩軍紮營相持。 是日未時,三王率兵齊至, 見之, 烘把土魯、 帶善二王策馬奮怒曰: 「吾父素善征討, 今雖在家, 吾二人領兵到此, 爾眾毋得愁懼, 布占太曾被我國擒捉, 鐵鎖擊頸, 免死而主其國, 年時未久, 布占太猶然是身, 其性命從吾手中釋出,豈天釋之耶? 爾勿以此兵為多, 天助我國之威,吾父英名夙著, 此戰必勝。」 眾皆曰:「吾等願效死力」, 遂奮勇渡河。 烘把土魯、帶善二王各領兵五百,二路登山而戰, 直衝入營, 兀喇兵遂敗。 有波可多貝勒,被帶善王左手捉其盔殺之, 其子亦被殺, 生擒常朱父子並戶力布, 殺兵三千, 獲馬五千匹, 甲三千副。 時追殺敗兵之際, 黍兒哈奇貝勒原率五百兵落後立於山下, 至是方驅兵前進, 又被大山所阻, 及繞山面來, 未得掩殺大敵。 是日晴明, 霎然陰雲大雪, 其被傷敵兵凍死甚多。及班師, 太祖賜弟黍兒哈奇名為打喇漢把土魯, 出燕奮勇當先, 賜名阿兒哈兔土門, 帶善與兄並力進戰, 殺波可多, 賜名為古英把土魯, 常書、 納奇布二將負太祖所託, 不隨兩貝勒進戰破敵, 領兵百名與打喇漢貝勒立於一處, 因定以死罪。 打喇漢把土魯懇曰: 「若殺二將,即殺我也。」 太祖乃宥其死, 罰常書銀百兩, 奪納奇布所屬人民。 
  24. 《太祖武皇帝實錄》 2. 1636. 戊申年三月, 太祖令子阿兒哈兔土門及侄阿敏台吉, 領兵五千往兀喇部, 圍異憨山城, 克之, 殺千餘人,獲甲三百副,盡收人畜而回。 時兀喇布占太與蒙古廓兒沁瓮剛代貝勒合兵, 出兀喇城約二十里, 遙見我兵之勢難敵, 遂回。 是年太祖欲與大明國和好,謂群臣曰: 「俗言一朝為惡而有餘, 終身為善而不足, 今欲與大明國昭告天地以通和好。」 言畢, 遂會遼陽副將撫順所備御, 宰白馬祭天, 刻誓辭於碑曰:「各守皇帝邊境, 敢有竊逾者, 無論滿洲與漢人, 見之即殺。 若見面不殺, 殃及於不殺之人。 大明國若負此盟, 廣寧巡撫、總兵, 遼陽道副將, 開原道參將等官, 必受其殃。 若滿洲國負此盟, 滿洲必受其殃。」 誓畢,沿邊立碑以為記。 布占太遣大臣來求曰: 「吾累次背盟,獲罪於恩父,誠無顏面,若得恩父之女與我為妻,吾永賴之。」 太祖復將生女木庫石公主妻之,遣侍臣以禮儀往送。 
  25. 満文老檔》. 1778. ula i bujantai han i ilan tumen cooha be gidafi tumen niyalma waha. tereci funcehe cooha hecen de dosime jabdurahū seme. sonjoho mangga cooha be juleri unggifi hecen de dosifi duka be jafafi. sure kundulen han i beye amala genefi. tere hecen i leose i dele tafafi tehe. tere ilan tumen dain be gidafi tumen niyalma waha. nadan minggan uksin gaiha. ula gurun de ududu jalan halame han seme banjiha doro be efulefi. amba hecen be baha. 
  26. 《太祖武皇帝實錄》 1. 1636. 布占太見勢不能敵,遂衝突而走,折兵大半,余皆潰散,布占太僅以身免,投夜黑國去。 
  27. 金毓黻 编; (清) 杨同桂 辑 (1985). 《《辽海丛书·沈故》》. 辽沈书社. 327~328쪽. 
  28. 昭梿 (1980). 《啸亭杂录》. 中华书局. 316쪽. ISBN 9787101017519. 
  29. 赵力 (2012). 《满族姓氏寻根词典》. 辽宁民族出版社. 404쪽. ISBN 9787549702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