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로 데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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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데 메디치
Agnolo Bronzino - Piero il Fatuo.jpg
피렌체의 군주
재위 1492년 4월 9일 – 1494년 11월 9일
전임자 로렌초 데 메디치
후임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신상정보
출생일 1471년
출생지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사망일 1503년
사망지 교황령 가릴리아노 강
가문 메디치 가문
부친 로렌초 데 메디치
모친 클라리체 오르시니
배우자 알폰시나 오르시니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Piero di Lorenzo de' Medici, 1471년 ~ 1503년)는 1492년부터 그가 추방당하는 1494년까지 피렌체의 그란 마에스토로이다.

생애[편집]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는 로렌초 데 메디치클라리체 오르시니의 장자이자 교황 레오 10세의 형이다.[1]

그는 안젤로 폴리치아노 같은 유명인물들 밑에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피렌체의 참주인 그의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교육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의 허약하고 오만하며 버릇없는 그의 성격은 그 역할에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피에로는 로렌초가 사망한 후인 1492년에 피렌체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였다. 피에로의 아버지가 힘들게 구축해놓은 이탈리아 국가들간 부서지기 쉬운 평화 균형은 잠깐의 비교적 차분한 시기를 지난 뒤, 1494년에 상속권을 주장하며 나폴리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샤를은 밀라노의 옛 섭정인 루도비코 스포르차 (루도비코 일 모로)가 하여금 그의 조카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를 몰아내고 그를 대신한 공작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이탈리아에 불러들였다.

밀라노에서의 일이 마무리 된 후, 샤를은 나폴리로 향하였다. 그는 토스카나를 통해서 지나가야만 했고, 게다가 밀라노와의 연락이 확보가 되어야만 했었다. 피에로는 중립을 취했지만, 이는 토스카나를 침공하려던 의도를 지녔던 샤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에로는 저항을 시작하였지만 광신도의 성격을 띈 도메니코회의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영향하에서 몰락한 피렌체 엘리트 계층들의 얼마안되는 지원을 받았고, 심지어 그의 친척들은 샤를의 세력에 가담했다.

피에로는 샤를의 군대가 피렌체에 인접해지고 토스카나의 주요 요새가 침략군에 포위되자, 재빨리 항복하였으며, 샤를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말았다. 그의 실망스러운 상황 처리와 협상 실패는 피렌체에 폭동을 불러일으켰고, 메디치 가문은 도주를 하였다. 가문의 궁전은 약탈되었으며, 추가적으로 피렌체 공화국의 형태의 핵심이 메디치 가문원 전체가 추방되며, 다시 세워졌다. 메디치 가문 인사는 1512년까지 피렌체를 통치하지 못했다.

필리프 드 코민의 도움으로, 피에로와 그의 가족들은 처음에는 베네치아로 도망을 갔다. 1503년에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나폴리 왕국을 두고 이탈리아에서 분쟁을 계속 벌이자, 피에로는 프랑스편에 들어 싸웠던 전투의 여파로 도주를 하던 와중에 가릴리아노 강에서 익사를 하였다.

혼인과 자녀[편집]

1486년, 피에로의 삼촌인 베르나르도 루첼라이는 피에로와 알폰시나 오르시니의 결혼을 주선했었다.[2] 피에로와 알폰시나는 1488년에 만났다. 그녀는 탈리아코초 백작 로베르토 오르시니(Roberto Orsini)와 카테리나 산세베리노(Caterina Sanseverino)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피에로와 알폰시나는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출처[편집]

각주[편집]

  1. Tomas 2003, 7쪽.
  2. Gilbert 1949, 1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