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8 바이트 제거됨 ,  3년 전
잔글
봇: 문단 이름 변경 (주석 → 각주)
 
=== 문화인류학적인 식인 ===
특정 사회의 경우 대상의 고기를 섭취함으로써 자신에게 특별한 힘 또는 영예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경우가 있다. 으레 그 사회의 종교관(특히 [[토테미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식문화보다 문화인류학, 민속학에 속하는 의제이다. 자신의 동료를 먹는 족내(族內) 식인과, 자신들의 적을 먹는 족외(族外) 식인으로 크게 구분된다.
 
족내 식인의 경우 죽은 자에 대한 애착에서 영혼을 이어받는다는 의식적 의미가 있음이 지적된다. 즉 친족이나 지인들이 죽은 자를 먹음으로서 죽은 자의 영혼이나 육체를 나누어 갖고, 죽은 자가 생전에 가졌던 지혜와 능력마저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모든 육신을 땅에 묻거나(매장) 불태워버리면(화장) 현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므로 이를 애석하게 여겼던 행위로 볼 수 있다. 일본어에 남아있는 「뼈 씹다(骨噛み)」라는 단어도 이런 의미가 포함된 풍습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인신공양]](人身供養)으로 볼 것인가 장례 의식의 일부로 볼 것인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지만, [[뉴기니 섬]]의 한 부족들 사이에 유행했던 '쿠루병'이라 불린 인간 광우병은 이러한 족내 식인이 원인이 되었음이 알려져 있다.
기호로서의 식인, 즉 인육 기식(嗜食)은 특수한 심리상태에서 이루어진 살인 사건에서 가끔 보이는, 긴급성도 없고 사회적 뒷받침(필요성)도 없는 행위이다. 대부분의 엽기 살인에 수반되는 시체 훼손 등으로 나타나며, 문명 사회에서는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시체 훼손 등으로 죄를 물을 뿐 아니라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행위 터부의 음식으로 금기시된다. 금기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다룬 문학이나 예술이 많다. [[소설]]에서는 푸른 두건, 스위트니 토드, 한니발 렉터 등이 알려져 있다.
또한 식인은 종종 성적 환상을 가지고 받아들이며 그러한 페티시즘을 보이는 사람도 다수 존재한다. 실제로 성작인 식인을 한 사례는 연쇄살인범 알버트 피쉬, 에드 게인스, 제프리 다머, 프리츠 할먼, 안드레이 치카치로 등이 있으며, 성적인 환상을 베이스로 하면서도 보다 '식인'의 측면을 중시한 게오르그 카를 그로스만(Carl Großmann), 니콜라이 듀마 가리에프(Nikolai Dzhumagaliev)는 희생자 또한 많았다. 파리 인육 사건의 경우 범인인 [[사가와 잇세이]](佐川一政)는 자신의 책에서 자신이 프랑스 유학 중에 살해해서 그 시체를 먹은 프랑스인 여대생의 고기를 「굉장하다」거나 「맛있다」고 기술하는 등, 피해자에 대한 증오는커녕 동경을 보이고 있어, 사건 당시 사가와 자신의 정신상태는 성적 환상 속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2001년]]에는 [[독일]]에 사는 아르민 마이우에스가 식인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서 자신에게 먹히고 싶은 남자를 모집하고 이에 응해서 찾아온 남자를 죽여 그 시신을 먹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2007년]]에는 프랑스 북부 뤼앙의 감옥에서 35세의 남성 수형자가 다른 남성 수형자를 살해하고 흉부 고기와 폐 등 사체 일부를 감방에 비치되어 있던 주방과 스토브에서 요리해 먹는 사건이 일어났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젊은층에서 식인 사건이 빈발하고 있는데, [[2008년]]에는 악마 숭배를 표방한 소년 소녀 8명이 또래 4명을 참살하고 그 고기를 먹는 사건이, [[2009년]]에는 메탈 밴드를 결성한 유리 모지노프 등 두 청년이 자신들의 팬이었던 소녀를 죽여 그 고기나 내장을 먹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모두 범행 동기는 "악마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거나 "만취한 상태에서 배가 고팠다" 등 이해할 수 없는 진술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인육을 먹은 것은 아니지만, [[1805년]]의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한 영국 해군 제독 [[호레이쇼 넬슨]]의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럼주]]가 든 통에 담가져 본국으로 옮겨졌지만, 위대한 넬슨을 닮고 싶어한 수병들이 안에 시체와 함께 든 럼주를 훔쳐 마시는 바람에 막상 귀국했을 때에는 통이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이 일화에서 럼주를 '넬슨의 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북미 대륙으로 이주해 온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이 제임스 타운에서 식인을 했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신세계에 이주해 온 식민지 이주자들이 엄격한 생활 환경에 따라 식인 행위를 강요당했을 가능성은 오래전부터 지적된 것이다.
 
「성적인 식인」 항목에서 언급했던 프리츠 하루만, 게오르그 카를 그로스만 등의 범행이 행해진 시기의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던 때였다. 극도의 인플레이션에 휩싸인 독일에서는 만성적으로 고기가 부족했는데, 그 와중에 벌어진 두 사람의 범행은 성적인 것이 주를 이루는 한편으로 약간의 경제적 목적을 추구한 면도 있었다(그 경제적 목적으로 인육을 시장에 유통시키기 위한 카를 덴거의 '상품 개발' 과정에서 범행이 드러나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들 세 사람의 범행은 전후 부랑자로 득시글거리던 당시 독일에서 수십 명 단위의 희생자가 나올 때까지도 발각되지 않았다.
 
그 뒤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수용소 안에서 수감자들이 인육을 먹는 일이 있었음이 [[빅토르 프랑클]]의 『밤과 안개』에 수록되어 있다. 우이크토르는 유대인 의사로 실제로 나치에 의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이것은 그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저서 《역사》에서, 앤도로파고이라는 부족의 식인 풍습이나, 미디아 왕국의 왕 아스튜아게스가 장군 하르파고스에게 그의 자식을 먹게 한 일화를 수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설적이나마 유럽의 관점에서 아시아인(을 비롯한 이민족)의 식인에 관한 기술로 꼽힌다.
 
[[인도]]에서는 시바교의 일파인 아고리의 행자가 식인을 한다. 그들은 신통력을 얻기 위해 [[갠지스 강]]에 수장된 시신을 건져 그것을 먹는다.
 
사회적 행위가 아닌 경우로는 [[2009년]]에 하리야나 주에서 화장터 직원들이 타고 남은 사체로 저녁 반주를 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도노 모노가타리 습유(遠野物語拾遺)》제296화와 제299화에서는 도노마치(遠野町)에서 5월 5일에 스스키모치(薄餅)라는 떡을, 7월 7일에 훗타 소면(筋太の素麺)을 먹는 풍습의 유래에 대해서 죽은 애처의 살과 힘줄을 먹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또한 중국이나 한국의 식인에서 보이는 '할고'의 풍속은 일본에서도 《명량강범(明良綱範)》 등에서 보이고 있는 이야기다.
 
[[센고쿠 시대]]의 자료인 《신장공기(信長公記)》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돗토리 성(鳥取城)을 병량공격할 때 성안의 병사들이 풀뿌리며 우마를 잡아먹다 못해 성을 탈출하려다 오다군의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을 먹으려 다투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에도 시대의 수필 《신저문집(新著聞集)》에는 [[겐로쿠]](元禄) 연간에 증상사(増上寺)의 승려가 장례식에서 죽은 자의 머리를 깎이다가 실수로 두피를 약간 긁어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것을 감추느라고 자신의 입에 넣었는데, 그것을 몹시 맛있다고 생각하고는 자주 묘지로 나가 무덤을 파고 시체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으며, [[보신 전쟁]](戊辰戦争) 때에는 막부측의 총지휘관이었던 마쓰다이라 마사타다(松平正質)가 적병의 볼살을 구워 술안주로 먹었다거나, [[사쓰마 번]](薩摩藩)의 병사들이 시체에서 간을 꺼내 삶아 먹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가장 확실한 기록은 에도 시대의 4대 대기근 때에 인육을 먹었다고 하는 것이다. [[덴메이 대기근]] 때인 [[덴메이]](天明) 4년([[1784년]]) 히로사키(弘前)에서 식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다치바나 난케이(橘南渓)가 《동유기(東遊記)》에 적고 있다.
 
인육을 민간요법에서의 치료약으로 활용한 기록에 대해서, 에도 시대 처형된 죄인의 시체를 상대로 [[일본도]](日本刀)의 성능을 시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던 야마다 아사고에몬(山田浅右衛門)이라는 사람이 시체에서 빼낸 간을 말린 것을 약으로 팔고 있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이것은 정당한 약재로 인정받았으며, 야마다 집안은 이를 통해 [[다이묘]]와도 맞먹을 재력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는 [[메이지]](明治) 3년([[1870년]]) 4월 15일자로 사람의 간, [[뇌수]], 음경 등의 밀매를 엄금하는 변관 포고를 내렸다. 그러나 이들 인체에 대한 밀매는 여전히 성행하여 자주 사건으로 입건된 일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작가 하세가와 시구레(長谷川時雨)는 메이지 중기의 이야기로서 "폐병에는 죽은 사람의 물, 화장된 사람의 뼈단지 밑에 고인 물을 먹으면 좋은데 이건 뇌를 태운 것"이라며 보여준 「영약(霊薬)」 꾸러미를 보고 새파래졌던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한 적도 있다. 쇼와(昭和) 40년대까지 일본 각지에서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속설을 믿고 매장된 시신을 파서 간이나 내장을 적출하여 불태운 것을 고가에 팔거나 병자에게 먹이거나 한 혐의로 체포된 일이 신문에 종종 보도되었다.
 
이같이 인간의 내장을 약으로 삼았던 것에 대해서 아직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마나세 도산(曲直瀬道三)의 양자였던 마나세 겐사쿠(曲直瀬玄朔)는 의학서 「일용식성(日用食性)」에서 동물의 고기를 수프나 찜, 회 등으로 조리해 먹으면 각종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해설하고 있으며, 육식 자체가 약 처방으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방약(동양의학)에서 곰의 쓸개(웅담)는 담석증, 담낭염, 위궤양 진통, 진정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최고급 약품으로 치부되었다. 에도 중기의 고방파(古方派) 의사였던 고토 간산(後藤艮山)은 웅담환(熊胆丸)이라는 약을 조제 처방하기도 했다. 이러한 약학적인 생각은 중국이나 인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불교 설화 등에도 의약적인 인간의 내장 섭취에 대한 기술이 있다.
 
== 주석각주 ==
{{공용분류|Cannibalism}}
<references/>

편집

1,342,467

둘러보기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