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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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 髙)씨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성씨이다.

한국의 고씨

고(高)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435,839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22위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장흥(長興)·개성(開城)·횡성(橫城) 등 30여본이 있으나, 고구려계인 횡성(橫城)과 중국계인 광녕(廣寧)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제주(濟州)의 분관이다. 한국의 고씨는 크게 고구려계와 탐라(제주)계가 있다.

고구려

고구려 계통의 고씨는 중국 요양 (遼陽)에 본관을 두고 있는데, 후연의 고운, 고구려 왕족, 당나라 장군 고선지 후예들이 본관이며, 만주와 발해 지역에 고씨들은 대부분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 고씨는 고구려 왕족과 국민에서 나온 성씨로서, 4세기 무렵 고구려가 지린에 수도을 두다가 평양으로 옮길 때 국호룰 고려로 고치면서, 그 무렵 부터 고씨 성을 사용하였다. 또한 고구려 왕조 시대에 장군이나 국민들도 국호을 따라 고려라는 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한국 고씨에는 왕족과 무장 계급, 일반 국민들이 모두 포함돼 있다.

탐라

탐라 계통의 제주 고씨탐라개국설화에 등장하는 고을나(髙乙那)를 시조로 한다. 제주 고씨와 분파 성본들은 계통을 달리하는 고구려계 등 다른 고(高)씨 성본과 구별하기 위해서 한자를 표기할 때 高와 髙를 혼용한다.

횡성 고씨

횡성 고씨(橫城 高氏)의 시조는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高朱蒙)이다. 중시조는 고구려 보장왕의 둘째 아들 고인승(高仁勝)이다. 그의 동생인 안승은 고구려 본기에는 보장왕의 서자, 외손으로 되어 있고, 신라 본기에는 연정토의 아들로 되어 있다. 후손은 고려 말기 밀직사를 지낸 고민후(旻厚)이다. 횡성 고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남한에 4,27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의 요양(遼陽) 고(高)씨는 고구려의 20대 왕인 장수왕의 후손으로, 요령성(遼寧城) 태안현(台安縣)의 한 작은 읍인 大高麗房鎭(대고려방진)에 2천여명이 있다.[1][2]

제주 고씨

제주 고씨(濟州 髙氏)의 시조는 탐라개국설화에 등장하는 고을나(髙乙那)이다. 탐라개국설화에 한라산 북쪽 기슭 삼성혈(三姓穴) 또는 모흥혈(毛興穴)에서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 등 세 신인(神人)이 출현하였으며 그 후 제주도로 표류해 온 상자에서 세 명의 여자, 오곡종자(五穀種子), 가축이 나와 이들과 함께 섬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1세조는 고려 태조 때 인물 고말로(高末老)이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보면 시조 고을나의 15세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고계(高季) 세 사람이 신라에 내조(來朝)하여 성주(星主), 왕자(王子), 도내(徒內)라는 칭호를 받고 탐라(耽羅)라는 국호(國號)를 받았으며, 고려 태조 때에는 고을나의 45세손 고자견(高自堅)의 태자 고말로(高末老)가 내조(來朝)하여 성주(星主)‧왕자의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3] 제주 고씨의 2000년 인구는 325,950명이다. 고말로의 직손이 제주 고씨, 고말로의 증손 고공익(高恭益)은 상당 고씨(上黨高氏), 또 다른 증손 고영신(高令臣)은 개성 고씨, 고말로의 10세손 고중연은 장흥 고씨(長興高氏), 후손 고종필(高宗弼)은 연안 고씨(延安高氏), 고말로의 23세손 고응섭(高應涉)은 안동 고씨(安東高氏)로 분적하였다.

개성 고씨

개성 고씨(開城 高氏) 시조 고영신(高令臣)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1097년(고려 숙종 2) 우찬선대부(右贊善大夫), 1099년 이부낭중추밀원우승선(吏部郎中樞密院右承宣)을 역임하고, 1101년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고 이어 형부시랑우간의대부(刑部侍郎右諫議大夫)에 올랐다. 1105년 예종이 즉위하여 비서감직문하성(秘書監直門下省)이 되고, 1108년(예종 3) 상서로서 서북면병마사가 되고 이듬해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이부상서지추밀원사(吏部尙書知樞密院事)에 올랐으며, 1113년 검교사공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政事)가 되었다. 개성 고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2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11,833명이다.

장흥 고씨

장흥 고씨(長興 髙氏) 시조 고중연(高仲{木+筵})은 제주 고씨 1세조 고말로(高末老)의 10세손으로 고려홍건적의 제2차 침입 때 고려 공민왕을 호종하여 호종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졌다. 장흥 고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8명을 배출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 고경명이 있다. 2000년 인구는 19,316가구, 61,626명이다.

광녕 고씨

광녕 고씨(廣寧 高氏)의 시조는 명나라 한림원의 태학사였던 고한봉(高翰鳳)의 5대손 고유보(高有寶)이다. 그는 명, 청 교체기에 청나라 지배를 받기를 거부하고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조선의 척화파를 따라 조선에 들어와 평안북도 상원에 정착하였다. 고유보는 송(宋)나라 진종(968~1022) 때 인물 고경(高瓊)의 후손으로, 6대조는 명나라 예부시랑을 지냈다. 본관은 중국 함평로 광녕이다. 2000년 인구는 8가구, 27명에 불과하다.

중국의 고씨

중국의 고씨는 강씨의 강성(姜姓) 계통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제나라 왕 강태공의 9세손 제 문공의 증손자 강혜(姜傒)가 고혜(高傒)로 고씨성으로 변경하였고, 이후 제나라의 노현(盧縣)에 봉읍을 받으면서, 후손들이 봉읍의 이름에서 따서 노씨(盧氏)를 성으로 삼았다. 강혜는 중국 고씨의 시조이자 중국,한국 노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중국 강성계 고씨는 한국의 고씨와는 연관이 없으며, 고씨는 중국에서는 성씨 인구순위 15위에 랭크되어 있을 정도로 큰 대성(大姓)이다.

대만의 고씨

한국에는 대만계 화교들이 있다. 대만에는 대만 원주민을 고산족으로 불렀는데, 오래전부터 고씨 성을 사용해 왔다. 고산족은 고대 부터 일찍이 일본인을 매우 씷어 하는 성향을 보였는데, 일본인들도 반일본 성향을 가진 고산족을 좋아 하지 않아 갈등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대만에서 일본인들이 고대 부터 갈등 관계에 있었던 대만 고산족을 매우 탄압하였다. 대만 고산족을 일본 고씨의 원류로 보는 일부의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실제 사실과 전혀 다르다. 높을 고을 쓰는 일본 고씨는 80% 이상이 일본의 토착인이며, 소수로는 진나라의 중국 통일 때 고대 제나라에서 일본으로 넘 어 간 성 고씨와 한나라 제후 세력인 씨 들이 집안 싸움을 하다가 일본으로 도망쳐 성을 고친 경우가 있다. 따라서 대만 고씨는 일본 고씨와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오랜 숙적 관계이다.

일본의 고 씨

일본의 고 씨

일본의 고 씨(틀:Ja-y)는 다카시나 씨(틀:Ja-y)의 일족인 다카시나노 고레아키(틀:Ja-y)를 시조로 한다.

기타

중국에는 강성 고씨가 있는데, 고씨에서 노씨가 계출되어, 강성 고씨는 노씨의 직계 인척인데, 진나라의 통일 전쟁 때 희성과 강성 계열의 호족들이 한반도와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백제 시대에는 중국 고씨가 고안무가 한자 전파을 위해 잠씨 머물렀다가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대부분의 일본 고씨 대부분 중국 한족이나 한국인과는 무관한 사람들로서 순수 일본 국민과 막부 시대 사무라이 들이 창성한 성으로써, 근현대에도 베이징, 서울, 부산 등에 이주하고 있다. 일본에는 높을 고를 쓰지 않지만 고라는 발음으로 시작하는 성씨들이 많은데, 그들이 한국이나 중국으로 이주할 경우 발음을 기준으로 다른 한자로 성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예을 들어 한국인이 일본에 이주하면 비슷한 발음이 나는 일본 한자를 쓰는 경우와 같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