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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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추 또는 쿠쿠추(闊闊出, 몽골어:Хөхчү, 페르시아어:كوكچو, Kūkuchū, ? ~ 1313년 2월)는 몽골 제국(예케 몽골 울루스)과 원나라의 황족으로, 성씨는 보르지긴이다. 쿠빌라이 카안의 아홉번째 서자이다. 영원왕(寧遠王)과 영왕(寧王)에 봉해졌다.

1276년 이복 형 노무간을 따라 카이두와 교전하러 출전했다가, 몽케 칸 계열 왕자들에게 사로잡혀 킵차크 한국에 보내져 감금당했다가 1284년 풀려났다. 1298년 겨울 카이두와의 교전 중 막사에서 음주하다가, 카이두의 일파인 두아의 공격으로 참패하고 해임되었다. 1307년 원 성종 사후 그는 다르마발라의 차남 아유르바르와다(후일의 원 인종)를 지지했으나, 퀼리그 칸 카이산이 원 무종으로 즉위했다. 1310년 모반을 꾀하다가 삼보로의 밀고로 아내 완자와 측근 24인이 사형당하고, 그는 추방되었다. 원 인종 즉위 후 1312년 석방되어 돌아오던 길에 죽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몽골 제국의 대칸 쿠빌라이 카안의 아홉째 서자이고, 모비는 후슈친 황후 허루친씨(烏式眞 皇后 許兀愼氏)이다. 생년월일과 출생지 등 정확한 출생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원사의 종실세계표에는 그의 생모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디만, 페르시아계 사서인 집사(集史)에 의하면 칭기즈칸의 공신 중 한명인 보로클의 딸 후슈친 황후 허루친씨(烏式眞 皇后 許兀愼氏)였다 한다. 휴슈친 황후는 개국공신인 보로클의 딸이었으나 정실, 첩실소생 여부는 알수 없고,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쿠빌라이 카안의 황후(카툰)들 중에서는 비교적 신분이 낮은 위치에 있었다. 집사에 의하면 동복 친형으로는 일찍 요절한 아이아치 황자가 있다. 일설에는 고려 충렬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로 추정되는 쿠루투크 또는 케루미슈 역시 그의 동복 누이였다는 설이 있다.

일설에는 토곤 역시 그의 동복 형제라는 설이 있다.

포로 생활과 석방[편집]

1275년 코코추는 이복 형이며 몽골리아 일대를 다스리던 북평왕 노무간(北平王 那木罕)의 휘하에 들어가 출정, 위구르와 몽골 서남부에서 쿠빌라이 카안에게 저항하던 카이두와의 전투에 출전했다. 이때 쿠쿠추는 승상 안통, 노무간 등과 함께 카이두 군을 타도하기 위해, 갑자기 말리크로 기습공격을 가했지만, 1276년 몽케 칸 가문의 시리기를 중심으로 몽케 가문의 일족이 반란을 일으켰다.(시리기의 난) 이때 툴루이의 서자로 쿠빌라이에게 반기를 들었던 소게두와, 몽케 칸의 첩의 넷째 아들이었던 시리기 등이 역습을 가하여 노무간과 쿠쿠추와 안통이 체포되었다. 코코추는 몽케 칸의 손자 무사이에게 사로잡혔다.

노무간, 코코추는 시리기의 측근들에 의해 킵차크 한국 주치 울루스의 뭉케 테무르 칸에게 보내져, 감금당했다. 시리기 일파는 서방의 몽골 왕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쿠쿠추를 서방으로 보냈지만, 카이두킵차크 한국은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고, 노무간은 탈출에 성공한다.

쿠빌라이 카안카이두와 협상, 1284년 코코추의 석방을 이끌어낸다. 코코추는 쿠빌라이 칸남송 전선에서 바얀을 파견하여 교전할 무렵, 쿠빌라이 칸에게 송환되었다.

군사 활동[편집]

1284년 쿠빌라이 칸은 귀환한 코코추에게 영원왕(寧遠王)에 봉했다. 쿠빌라이 칸의 적자인 후게치, 오그룩치에 비하면 순위가 낮은 왕작 서열이었지만, 왕 작위를 받지 못한 동복형 아이아치 등에 비하면 좋은 대우였다. 몽골에 복귀한 이후 그는 바얀 장군, 북평왕 노무간, 카말라 등과 함께 오랫동안 몽골의 국경지대를 방어하였다.

1293년 황태손인 조카 테무르를 따라 북변(北邊)의 방어를 맡았다. 1294년 테무르가 칸위를 계승하고 코코추는 홀로 북변의 방어를 맡았지만 이렇다할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

1298년 9월 원 성종의 명을 받고, 제국대장공주 사후 혼자 있는 고려 충렬왕을 위문하고 포도주를 하사하였다.[1] 이때 코코추는 평장사에 임명되어 좌승(左丞) 합산(哈散, 카산)과 함께 충렬왕에게 "공주께서 세상을 떠난 뒤로 왕이 홀로 거하며 무료할 것이라 하여 황제께서 왕께 포도주를 하사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와 함께 국사(國事)를 의논하라고 하셨습니다.(自公主棄世, 王獨處無聊, 帝賜王蒲萄酒. 且令吾等, 伴議國事)"라고 전하였다.[1]

1298년 겨울, 카이두의 부하였던 두아가 몰래 군사를 이끌고 몽골리아로 출병, 코코추의 군대를 공격했는데, 코코추는 연회를 열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또한 진중에서 술주정을 부렸다 한다. 두아의 기습공격에 코코추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코코추의 휘하 장군 중 홀로 분전한 코루쿠츠는 두아에게 사로잡혔다. 원 성종의 처벌을 두려워한 코코추는 몇 차례 소환령에도 불구하고 칸에게 찾아가지 못했다. 그는 아지키를 보내 간신히 조정에 참석시켰다.

코코추의 태만에서 온 실수를 계기로 원 성종 테무르 칸은 대 카이두 전쟁의 사령관에서 코코추를 해임하고, 퀼리그 칸 카이산(후일의 원 무종)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퀼리그산 카이산카이두와의 전쟁에서 용력 분투하여 황후, 유력 왕족, 장군들의 지지를 받았다.

올제이투 테무르 칸이 사망했을 때, 불르간 카툰은 안서왕 아난다를 옹립하려 했지만, 불르간의 독단에 반감을 품은 원나라 관료에 의해, 죽은 원 성종 테무르 형 다르마발라의 아들 퀼리그 칸 카이산(원 무종)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코코추는 원 인종에 참여, 협력하고 불르간 카툰에 대한 쿠데타를 성공 시켰지만, 원 인종과는 별도로 퀼리그 칸 카이산몽골리아에서 제왕의 지지를 얻고, 칸에 즉위하기 위해 남하하려 했다.

그래서 코코추와 야쿠두는 원 인종에게 퀼리그 칸 카이산에게 칸위를 사양하지 않고 칸으로 즉위해야한다고 진언했지만, 원 인종은 이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퀼리그 칸 카이산에게 칸의 지위를 양보하였다. 칸에 즉위한 퀼리그 칸 카이산에게 코코추는 높은 순위인 "한글자 왕호"를 수여받아 영원왕(寧遠王)에서 영왕으로 진봉되고, 낙뉴금인을 하사받았다.

생애 후반[편집]

1310년 코코추는 퀼리그 칸 카이산에 반역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 발각되어 삼보로의 밀고로 체포,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킵차크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이때 외올아, 승 철양 등 24인이 모반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처형되고, 초왕 야쿠투(牙忽都) 등은 하옥되었다. 코코추는 처형을 면했지만, 코코추의 아내 올제이(完者)는 처형당했다. 코코추의 영지인 청주(清州)는 삼보로에게 내려졌다. 퀼리그 칸 카이산이 사망하고, 원 인종이 즉위 한 후에도 한참 동안 코코추는 생존했지만, 석방되지 못했다.

1312년 대신 테케(鐵哥)가 상소를 올려 세조 쿠빌라이 카안의 황자 영왕이 아직 살아있다며, 마땅히 귀환의 명을 하사해야 된다고 청하자 원 인종은 따라 이듬해 석방시켰다. 1313년 2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사망하였다.

사후[편집]

그의 지위는 아들 중 세체쿠투(薛徹禿)가 이었다. 세체쿠투는 1320년 4월 영원왕에 봉작되었다가 1322년 다시 영왕으로 진봉되었다.

주석[편집]

  1. 고려사, 세가 권제31, 1298년 9월 12일(음) 병신(丙申), 1298년 10월 18일(양), "황제가 왕에게 평장사 코코추 등과 함께 국사를 위논하게 하다"

관련 항목[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