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차 국경지대
세르비아의 코차 반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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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어: Кочина крајина Kočina krajina | ||||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영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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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9년 ~ 1790년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는 영토 | ||||
수도 | 베오그라드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정 | |||
시대 구분 | 근세 | |||
인문 | ||||
공용어 | 세르비아어, 독일어 | |||
종교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 |||
기타 | ||||
현재 국가 | 세르비아 |
코차 국경지대(세르비아어: Кочина крајина Kočina krajina)는 1788년부터 1791년까지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동안 세르비아인 반군이 스메데레보 산자크(오스만 제국)에서 해방시킨 영토를 말한다. 반란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오스만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이미 1787년에 계획되었다. 합스부르크가 조직한 세르비아 자유군단, 그 중 코차 안젤코비치는 저명한 대위였다(따라서 운동의 역사적 이름)., 처음에는 1788년과 1789년에 오스만령 세르비아의 여러 중심부를 점령하고 보유했다. 10월 8일(1789년) 오스만으로 부터 베오그라드 함락을 받은 합스부르크 정규군이 도착한 후 해방된 세르비아 영토는 훨씬 확장되어 세르비아(독일어: Serbien)라고 불리는 군정 하에서 합스부르크 보호령이 되었다. 시스토바 조약(1791년)에 의해 합스부르크군은 후퇴해야 했고, 해방된 영토 전체는 오스만에게 반환되었다. 그러한 결과는 또한 합스부르크와의 동맹을 통해 해방에 대한 세르비아의 희망을 끝냈다.[1]
배경
[편집]세르비아인들은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투세력으로 나섰으며 각 지역의 봉기를 주도해 나갔다.[2]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 측은 세르비아인들을 탄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세르비아 지역이 황폐화되어,[2] 세르비아의 피난민들이 합스부르크가 영토로 건너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2]
1786년 캅카스 지역 분쟁으로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듬해 합스부르크가의 요제프 2세와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크림 반도에서 2차 회담을 열었고, 오스만 제국은 이를 명분 삼아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3] 그 사이 오스트리아군은 세르비아계 난민들에게 전쟁 준비를 시키고 있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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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바나트에서 병력 5,000명 규모의 세르비아 자유군단이 창설되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분란을 피해 건너왔던 난민들로 구성되었다.[4] 세르비아 자유부대는 합스부르크가의 통치 하에서 세르비아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싸울 의지를 갖고 있었다.[4] 주사령관은 오스트리아 소령 미하일로 미할례비치였으며[3] 이 밖에 자원한 사람으로는 알렉사 네나도비치, 스탄코 아람바시치, 라디치 페트로비치와 조르제 페트로비치, 코차 안젤코비치가 있었다.[3] 오스트리아측은 세르비아 자유군단로 하여금 베오그라드 점령을 위해 나섰으나 1787년 말과 1788년 초 두 차례에 걸친 공격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4]
결국 1788년 2월 오스트리아군이 직접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이 시점에서 손쉽게 승리할 수 있는 기회는 놓친 형세가 되어버렸다.[4] 러시아군의 더딘 동원으로 오스만 제국의 병력이 베오그라드로 집중 투입되었기 때문이다.[5] 오스트리아군은 몰다비아의 러시아 지원군에 의존하였으며 1788년 후반기가 되어서야 공세에 나섰는데 이에 대해선 요제프 2세 본인이 오스만과의 전투를 꺼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5] 그해 7월 오스만군은 다뉴브강을 건너 오스트리아령 바나트를 침공해 왔다.[5] 양측 모두 보급 부족에 시달렸고 여기에 오스트리아군은 병사들 사이에서 역병이 유행하는 바람에 타격을 입었다.[5] 약 5만 명의 세르비아 난민이 다뉴브강을 건너면서 오스트리아군의 보급물자 유통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5] 8월 중순에 이르러 요제프 2세는 20,400명의 병력을 바나트로 파견했다.[5]
1789년 10월 8일,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 장군이 베오그라드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오스트리아군은 세르비아 일대의 점령에 나섰고, 세르비아인들은 군사훈련과 기술을 숙달하며 합스부르크 자유군단하에서 맞서 싸웠다.[6]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점령작전의 배후에는 정교회가 다수인 세르비아인들을 개종시키려는 가톨릭 교회가 있었다. 이 때문에 1791년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 영토를 탈환해 나가자 세르비아인들이 러시아 제국에 도움을 청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6] 그러나 결국 1791년 오스트리아군은 다뉴브강과 사바강을 건너 철수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으며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의 박해를 두려워한 세르비아 난민 수천 명도 합류하였다. 이후 시스토바 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은 끝이 났다.
여파
[편집]전쟁이 끝난 뒤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지방세를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회유 정책을 펼쳤다.[7] 오스만군의 조직개편으로 부대에서 이탈하게 된 예니체리들은 세르비아로 피난하여 스메데레보의 산야크라는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그곳에서 세르비아인들에게 부여된 권리를 앗아가고자 하였다.[7]
이른바 다히예라고 불리는 이들 세력은 세르비아에서 민간인을 150명이나 살해하였고 분노한 세르비아인들은 1804년 제1차 세르비아 봉기를 일으킨다.[7] 봉기의 주동자는 합스부르크가 점령기에 오스트리아군 지원병으로 복무했던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였다.[7] 세르비아 봉기는 이후 세르비아 혁명으로 확대되어 세르비아의 실질적 독립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세르비아 야고디나와 클라도보 마을에서는 이 시기의 반란을 기리기 위하여 '코차의 변경지대를 위한 기념일' (Дани Кочине крајине)을 제정하여 관련 행사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8]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Ćirković 2004.
- ↑ 가 나 다 Ga ́bor A ́goston; Bruce Alan Masters (2009년 1월 1일). 《Encyclopedia of the Ottoman Empire》. Infobase Publishing. 518–쪽. ISBN 978-1-4381-1025-7.
- ↑ 가 나 다 Ćorović 2001.
- ↑ 가 나 다 라 Paul W. Schroeder (1996). 《The Transformation of European Politics, 1763-1848》. Oxford University Press. 58–59쪽. ISBN 978-0-19-820654-5.
- ↑ 가 나 다 라 마 바 Virginia Aksan (2014년 1월 14일). 《Ottoman Wars, 1700-1870: An Empire Besieged》. Routledge. 163–쪽. ISBN 978-1-317-88403-3.
- ↑ 가 나 R. S. Alexander (2012년 1월 30일). 《Europe's Uncertain Path 1814-1914: State Formation and Civil Society》. John Wiley & Sons. 19–쪽. ISBN 978-1-4051-0052-6.
- ↑ 가 나 다 라 John R. Lampe (2000년 3월 28일). 《Yugoslavia as History: Twice There Was a Count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48–쪽. ISBN 978-0-521-77401-7.
- ↑ “Дани Кочине Крајине” (세르비아어). 2009년 9월 12일.
참고 문헌
[편집]- Ćorović, Vladimir (2001) [1997]. 〈Kočina krajina〉 [Kočina landscape]. 《Историја српског народа》 [History of the Serbian people] (세르비아어). Belgrade: Јанус.
외부 링크
[편집]위키미디어 공용에 코차 국경지대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