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
양규
楊規 | |
---|---|
고려의 형부낭중 | |
임기 | 목종 치세 |
군주 | 목종 |
고려의 도순검사 | |
임기 | 1010년 ~ 1011년 3월 5일 |
군주 | 현종 |
신상정보 | |
출생일 | ? |
사망일 | 1011년 3월 5일 |
국적 | 고려 |
배우자 | 은률군군 홍씨 |
자녀 | 양대춘 |
직업 | 무신 |
군사 경력 | |
충성 | 고려 |
주군 | 고려 현종 |
복무 | 고려군 |
소속군 | 고려 육군 |
최종계급 | 도순검사 |
지휘 | 고려군 |
주요 참전 | 제2차 고려-거란 전쟁 |
상훈 | 공부상서 |
양규(楊規: ? ~ 1011년 3월 5일(음력 1월 28일)[1])는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때 크게 활약했다.
생애[편집]
목종 때 여러 차례 승진해 형부낭중(刑部郎中)이 되었다.[2]
1010년(현종 원년)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지켰고 거란이 수차례 항복을 권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고 거란은 통주(通州: 현 평안북도 선천군)를 공격하여 총사령관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격파하고 다시 양규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강조가 쓴 것처럼 꾸며 흥화진에 보냈으나 "나는 왕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령은 받지 않겠다."하며 지켰다.[2]
양규는 흥화진에서 군사 7백여 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 군사 1천여 명을 수습했으며, 밤중에 곽주로 잠입하여 잔류한 거란 병사들을 급습하여 모조리 죽인 후 성 안에 있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2] 하지만 수도가 거란에게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란가게 되었다.
1011년(현종 2년) 봄 거란군이 철수하게 되자 구주 방면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부하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을 기습해 2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명을 구출했으며 석령에 이르러 다시 거란군 2500명을 베고 포로 1000명을 구출하였다.[2]
여리참에서는 거란군 1,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1,000명을 구출했고 다시 거란의 선봉과 애전에서 싸워 1,000여명을 베었다. 그리하여 고군에서 순월 사이에 7차례나 거란군을 기습해 적 65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백성 3만 명을 구출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전리품을 노획했다.[2]
하지만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김숙흥과 함께 거란 성종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 항전하다가 함께 전사했다.[1][2] 이 전공으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었다.[2]
전기 자료[편집]
- 《고려사》 권94, 〈열전〉7, 양규
가족 관계[3][편집]
양규가 등장한 작품[편집]
각주[편집]
- ↑ 가 나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2년(1011년) 1월 28일(임인)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고려사》 권94, 〈열전〉7, 양규
- ↑ 이 가계도는 《고려사》를 근거로 작성되었다.
- ↑ 오늘날 황해남도 은율군이다.
- ↑ 아들은 아버지의 공을 인정받아 교서랑(校書郞)에 임명되었으며(《고려사》 권94, 〈열전〉7, 양규), 이후 대부소경을 거쳐 정종(靖宗) 5년(1039년)에 부병마사(副兵馬使), 이듬해(1040년)에 안북대도호부부사, 문종 원년(1047년)에 서북로병마사 등을 역임했다. 《고려사》 권6, 〈세가〉6, 정종 5년(1039년) 1월 15일(병오); 권7, 〈세가〉7, 문종 원년(1047년) 2월 1일(병오); 권94, 〈열전〉7, 양규 부 양대춘 참조.
- ↑ 《고려사》 권13, 〈세가〉13, 예종 4년(1109년) 2월 28일(계묘) 참조. 양제보의 아버지(즉, 양규의 손자)의 이름은 어느 문헌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