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비오 10세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성 비오 10세회
성 비오 10세회의 문장
성 비오 10세회의 문장
약칭 SSPX
표어 Christus vincit,
Christus regnat,
Christus imperat
결성일 1970년 11월 1일
본부 스위스 멘징엔
위치 스위스 추크
설립자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총장 베르나르 펠레이 주교
웹사이트 본부 한국

성 비오 10세회(라틴어: Fraternitas Sacerdotalis Sancti Pii X)는 프랑스로마 가톨릭교회 대주교 마르셀 르페브르가 설립한 국제 단체로서 전통 가톨릭 성향의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교회법상의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서 어떠한 사목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상태이다.[1] 약칭은 SSPX이며, 현재 총장은 베르나르 펠레이 주교이다.

성 비오 10세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회 규율과 관습, 신심 행위와 더불어 전통 미사라고도 불리는 트리덴티노 미사를 강력히 고수하며 지지하는 단체로 잘 알려져 있다. 성 비오 10세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례 개정, 교회 일치 운동, 종교의 자유,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 유대인들과의 관계 등의 문제에 있어서 그릇된 이단적 가르침을 장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트리덴티노 미사를 보존하기 위한 자신들의 노력이 모더니즘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하여 가톨릭 교리가 점차 모호하게 가르쳐지고 있는 추세에 맞서 교회의 전통적 가치를 지켜냈다고 주장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규율상의 이유라기보다는 교리상의 이유로 성 비오 10세회가 가톨릭교회 내에서 교회법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성 비오 10세회의 성직자들이 수행하는 사목 활동은 합법적인 것이 아니라고 선언했다.[1] 그러나 성 비오 10세회의 총장은 성좌가 성 비오 10세회의 교회법적 위치와 성직자들의 사목 활동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2] 성 비오 10세회와 교황청의 긴장 관계는 르페브르 대주교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뜻을 거슬러 네 명의 성 비오 10세회 사제를 주교로 서임한 1988년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그 결과, 주교 서임식을 집전한 주교는 물론 그에게 주교품은 받은 주교들 모두 자동 파문 제재를 받았다.[3]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들을 파문하면서 성 비오 10세회의 모든 회원이 하루속히 교회에 돌아와 온전한 일치가 회복하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덧붙였다.[4][5]

2009년 교황청과 성 비오 10세회 간의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교황청은 성 비오 10세회가 가톨릭교회와 온전한 화해로 나아가기 위해 먼저 동의해야 할 몇 가지 원칙들을 열거한 교리에 관한 전문을 성 비오 10세회 장상들에게 전달했다. 이에 펠레이 주교는 성 비오 10세회 성직자 30여 명과 함께 로마 외곽 알바노에서 이 문서를 검토하는 회의를 가졌다.[6] 펠레이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에게 이 문서를 정말로 승인한 것인지 물어보았고,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승인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친서를 보냈다.[7]

2013년 6월 27일 성 비오 10세회에서 제명당한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를 제외한 나머지 세 주교는 공식적으로 교황청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8] 그리고 2013년 10월 12일 펠레이 주교는 교황 프란치스코를 현대주의자라며 비판하였다.[9]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이자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 위원장인 게르하르트 루트비히 뮐러 추기경은 2013년 12월 22일 성 비오 10세회의 장상들은 교회와의 친교에서 벗어나 이교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뮐러는 동시에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완고한 태도를 바꾸고 교회와 교황이 제시한 조건들을 수용한다면 언제든지 환영한다고도 말하였다. 2014년에 가진 또 다른 인터뷰에서 그는 오직 2012년에 제시한 교리 전문을 수용해야만 성 비오 10세회가 교회와 일치할 수 있을 뿐, 다른 길은 없다고 못박았다.[10]

설립과 초창기 역사

성 비오 10세회의 설립자인 마르셀 르페브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정된 미사 양식을 거부하고, 오직 트리덴티노 미사 양식만 집전하는 것을 고수하였다.

성 비오 10세회는 여느 전통 가톨릭 운동과 마찬가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1965년) 이후 나온 교회의 여러 가지 변화에 반발하면서 생겨났다. 성 비오 10세회의 설립자이자 중요 인물인 프랑스의 고위 성직자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직 생활 대부분을 아프리카에서의 선교 활동 및 성신 신부회 총장(1962년~1968년)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성신 신부회가 비가톨릭적이고 현대주의적 풍조로 변해가기 시작할 즈음인 1968년 총장직을 사임하였다. 총장직을 사임한 그에게 곧바로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 학생들이 찾아왔다. 신학생들은 르페브르에게 자신들이 전통적인 교리를 고수하고 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 보수적인 신학교를 알아봐 달라고 조언을 구했다고 전해진다.[11] 르페브르는 그들에게 스위스프리부르 대학교를 추천하였다.

1970년 르페브르는 오뜨리브 수도원아빠스이자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마리 도미니크 필리프 신부로부터 신학생들을 직접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로잔과 제네바, 프리부르의 교구장 주교인 프랑수아 샤리에르에게 교회 단체 설립 인가를 요청하기 위해 찾아갔다. 샤리에르 주교가 요청을 받아들이자, 르페브르는 1970년 11월 1일보다 6일 앞당겨 기록된 서류를 가지고, 6년이라는 임시 기간을 조건으로 신심 단체(pia unio)를 설립하였다(ad experimentum). 신심 단체 지위는 가톨릭 단체가 회(會)나 사도 생활단으로서 공식적인 인가를 받기 전에 거쳐야 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소수의 스위스 평신도는 이 새로운 단체를 위해 에콘에 신학교를 세우는 것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1971년 24명의 예비 신학생이 이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다음해인 1972년 10월에는 32명이 추가로 입학하였다.[12]

일반적으로 신심 단체는 적당한 기간이 지나 경력이 쌓이면 성좌의 조사를 거친 후, 교구장 주교로부터 공식 인가를 밟는 수순을 밟는다. 르페브르는 이러한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자신이 세운 단체를 조기에 인가받기 위해 바티칸의 세 부처와 접촉했다. 그는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 존 조셉 라이트 추기경으로부터 격려가 담긴 편지 한 통을 받기는 했지만, 그의 바람처럼 그가 세운 단체를 승격시키는 바티칸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1970년 2월 18일자로 보낸 라이트 추기경의 편지는 성직자성의 역할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표현으로 “주교님이 세우신 단체가 전세계 성직자가 참여하는 계획을 완수하는 데 있어 본 성(省)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라이트 추기경은 1973년까지 신학교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에콘에 있는 신학교에 들어갈 것을 권장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제기되고 있다.[13]

성 비오 10세회 설립은 수많은 성직자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으며, 특히 신학적 관점에 있어서 르페브르와 상당히 입장을 달리했던 프랑스 주교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이었던 장마리 비요 추기경과 연계하고 있었다. 르페브르와 그의 반대자들 사이에 벌어진 긴장관계의 대부분은 오랫동안 신학적·문화적·정치적으로 프랑스 사회를 양분해왔던 적대적인 두 파벌 간의 오랜 대립의 일종으로 바라봐야만 한다. 르페브르의 지지자인 마이클 데이비스에 따르면, 1972년 루르드에 소집된 프랑스 주교회의에서는 에콘의 신학교를 비인가 신학교(le séminaire sauvage)로 선언했으며,[14] 1974년 11월 프랑스 주교단은 르페브르의 사제들을 자신들의 교구에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그들은 트리덴티노 미사에 여전히 애착을 갖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15] 그러는 동안에도 성 비오 10세회는 미국 미시간 주 아마다(1973년)와 로마(1974년)에 신학교를 추가로 세웠다.

1974년 3월 26일 바티칸에서 소집된 고위 성직자들의 모임에서 성 비오 10세회에 대한 바티칸의 개입 조짐이 처음으로 감지되었다. 그 후 1974년 6월 성 비오 10세회를 조사하기 위한 추기경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추기경들은 교회법에 따라 성 비오 10세회 신학교를 감찰하기로 의견을 모아, 1974년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 두 명의 벨기에 사제를 파견하여 감찰하도록 했다. 훗날 성 비오 10세회의 초장이 된 프란츠 슈미트베르거 신부는 그들의 보고서가 자신들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고 밝혔다.[16] 하지만 에콘의 신학생들과 교수진은 그들이 가진 몇 가지 신학적 견해가 지나치게 진보적이고 심지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고 판단하였다. 르페브르는 훗날 회고하기를 의심의 여지 없이 크게 분개한 감정 상태에서 선언문을 하나 작성했다. 선언문에서 그는 당시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 이어진 일련의 개혁들을 통해 보건대 교회가 명백하게 자유주의적 풍조에 빠졌다면서 강하게 질타했다.[17] 이 선언문은 1975년 1월 프랑스의 전통 가톨릭 신문 Itinéraires를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사건으로 르페브르는 큰 곤경에 빠졌다. 1975년 1월 프리부르의 새 교구장으로 착좌한 피에르 마미 주교는 자신의 전임 교구장이 성 비오 10세회에 내린 인가를 취소하고 싶다는 의사를 교황청에 타전했다. 같은 달, 르페브르는 바티칸으로 출두하라는 추기경들의 소환을 받았다. 그는 2월 13일과 3월 3일 두 차례 추기경들과 회동했는데, 당시 자신에 대한 시선이 시종일관 적대적이었던 것에 대해 적잖이 놀랐다. 가령 프랑스의 가브리엘 마리 가론느 추기경은 그를 가리켜 “멍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12]

1975년 5월 6일 추기경 위원회는 피에르 마미 주교가 성 비오 10세회에 내린 인가를 철회하기로 결정한 것을 승인하였다. 르페브르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교황청의 최고 법정인 사도좌 대심원에 항소를 제기했지만, 기각되었다. 이 때를 기준으로 성 비오 10세회는 더이상 가톨릭교회 단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르페브르와 성 비오 10세회 측은 로마 교황청이 줄곧 자신들을 부당하게 대우했으며, 자신들에 대한 억압은 부당한 처사라고 항변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기 위해 내려진 조치들은 교회법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 비오 10세회는 공식적으로 해체가 선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1976년 5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추기경회의에서 르페브르 대주교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를 질책했으며(교황이 공개적으로 주교를 질책한 것은 20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와 그를 따르는 신자들에게 마음을 돌릴 것을 호소하였다.[18]

르페브르는 1976년 6월 말에 자신의 신학생들 중 몇몇을 사제로 서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스위스 주재 교황 대사는 바오로 6세 교황의 특별 지시에 따라 르페브르에게 신학생들을 사제로 서품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소식을 전했다.[19][20] 1976년 6월 25일 교황청 국무원장 조반니 베넬리 대주교는 르페브르에게 친서를 보내, 교황의 특별 지시에 따라 앞으로 성품성사를 집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만약 성품성사를 강행할 경우 교회법에 따른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19][21] 르페브르는 이 같은 경고를 무시하고, 당초 예정한 대로 1976년 6월 29일 사제 서품식을 강행했다.

강론 중 그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로 인해 자신과 새로 서품될 사제들에게 앞으로 시련이 닥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22] 다음날인 1976년 7월 1일 교황청 홍보국에서는 교회법 제2373조에 따라, 르페브르는 사제 서품식을 강행한 죄로 자동으로 1년 동안 성무 집행을 정지되었음과 더불어 그가 서품한 사제들 역시 자동으로 성무 집행이 정지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아울러 앞서 언급한 1976년 6월 12일과 15일자에 국무원장 명의로 전달한 교황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에 대해서도 조사 중에 있음을 밝혔다.[19][23]

1976년 7월 11일 르페브르는 교황청 주교성 장관 세바스티아노 바조 추기경의 편지를 수령했다는 증명서에 서명했다. 바조 추기경은 편지를 통해 만일 르페브르 대주교가 이 편지를 받고 10일 이내에 자신이 초래한 스캔들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교회법에 따라 불순명의 책임을 물어 향후 교회법적 처벌이 추가로 가해질 것임을 시사하였다. 같은 해 7월 17일 르페브르는 교황 바오로 6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6월 29일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의 대답이 매우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바오로 6세는 1976년 7월 22일 교황청 주교성에 지시해 앞으로 르페브르의 성품성사 집전을 무기한 정지시킨다는 조치를 취하였다.[24]

1988년 주교 서임식

성 비오 10세회가 가톨릭교회와 분열한 결정적인 사건은 1988년 르페브르 대주교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지시를 어기고, 브라질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와 더불어 네 명의 성 비오 10세회 사제를 주교로 서임한 것이다.

1987년 르페브르 대주교는 81세의 고령이 되었다. 만약 르페브르가 이 상태에서 선종한다면, 향후 성 비오 10세회에서 사제들이 서품되려면 성 비오 10세회 출신이 아닌 주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르페브르는 물론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을 뿐더러 정통 신앙을 갖고 있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1987년 6월 르페브르는 성 비오 10세회의 미래를 위해 주교를 서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교황청에서 이를 승인하든 승인하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일정을 그대로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25] 교회법 제1013조와 제1382조를 보면, 주교를 서임하려면 반드시 교황의 사전 허락을 받도록 되어 있다. 교황의 허락 없이 주교를 서임하는 행위에 대해 일찍이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사도들의 으뜸》(Ad Apostolorum principis)를 통해 “중대한 불법 행위이며, 고로 범죄이고 성사 모독의 범죄”라고 비판한 바 있다.[26] 바티칸 당국은 르페브르의 주교 서임 계획 소식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일단 성 비오 10세회 측과 함께 논의를 시작하였다. 양측의 논의는 1988년 5월 5일 르페브르 대주교와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훗날의 교황 베네딕토 16세)이 기본 협약에 서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5월 30일 라칭거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지시에 따라 르페브르에게 5월 5일 합의한 사항을 준수할 것과 아울러 만약 교황의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6월 30일에 주교 서임을 강행할 경우 그 서임의 유효성을 허용하지 않을 것임을 알리는 회신을 하였다.

6월 3일 르페브르는 에콘에서 당초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서신을 발송하였다. 이에 요한 바오로 2세는 르페브르에게 직접 친서를 써서 답장하였는데, “그대가 잘 알고 있는 신학적·교회법적 근거에 따라 단지 이교적 행위로 이어질 뿐인 계획을 실행하지 말 것”을 거듭 호소했다. 르페브르는 교황의 친서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교황의 친서 내용이 6월 19일 세상에 공개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처음으로 르페브르가 파문당할 위험에 빠졌음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였다.

1988년 6월 30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 비오 10세회 소속 사제 네 명을 주교로 서임하였다. 브라질의 캄포스도스고이타카제스 교구장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도 이들의 주교 서임식에 참여하였다. 이 때, 서임된 주교들은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알폰소 데 갈라레타, 리처드 윌리엄슨이다.

다음날 교황청 주교성은 르페브르 대주교와 그에 의해 서임된 주교 네 명, 그리고 공동 축성자로서 전례에 참여한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가 교회법에 따라 사도좌에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았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주교성의 발표가 있고 다음날인 7월 2일 자의교서 《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를 발표하여, 르페브르의 행동을 질책하였다.[27] 그는 자의교서에서 교회법 제751조[28]를 인용하면서, “이러한 불순종은 로마의 수위권에 대한 배척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의 이교적 행위”라고 언급하였다. 아울러 교회법 제1382조[29]에 따라 교회법이 정한 파문의 중벌을 당했다고 선언하였다.

르페브르는 자신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필요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전통주의 가톨릭 성직자가 없으면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과 성사 양식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교 서임식 주재를 성 비오 10세회의 존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한 생존 행위였다고 말하면서, 교회법 제1323조와 제1324조를 인용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한편 성 비오 10세회의 일부 회원들은 르페브르의 행동에 찬동하지 않고 성 비오 10세회를 탈퇴하여 교황청과 일치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라는 독자적인 단체를 조직하였다.

교회법적 위치

성 비오 10세회의 교회법적 위치는 1988년 에콘에서의 주교 서임식 이후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다. 성 비오 10세회 측은 자신들이 미사 집전[30]과 고해성사와 혼인성사 등 기타 성사에 대한 특별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31]

이에 대한 교황청의 입장은 2009년 3월 1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교리에 관한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성 비오 10세회는 교회 내에서 교회법적 위치를 지니지 못하며, 이 회에 소속된 성직자들은 ―비록 그들이 교회법에 따른 처벌에서 면제되었다 하더라도― 합법적으로 사목 활동을 할 수 없다.”[1]

로마에 있는 사도들의 모후(Regina Apostolorum) 대학교의 전례학 교수이자 신학 학과장인 에드워드 맥나마라 신부는 성 비오 10세회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 자체는 죄에 해당되지 않는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스스로 고의적으로 교황과의 일치에서 멀어지려는 목적을 다분히 지닌 채 성 비오 10세회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하여, 그들과 일치를 이루어 그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경우에만 죄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만약 사정상 도저히 교황과 친교를 이루는 가톨릭교회에 갈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일 경우에는 성 비오 10세회 사제에 의해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이라면, 나는 신자들에게 양심적으로 그 미사에 참례해도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 비오 10세회와의 교리적 논쟁이 하루속히 해결되어,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온전히 친교를 이루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는 열심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32]

현황

성 비오 10세회의 자체 통계에 의하면,[33] 성 비오 10세회는 2014년 7월 현재 37개국에서 589명의 사제가 상주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33개국에서 겸임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750곳의 성당과 163곳의 수도원, 103명의 수사와 186명의 수녀가 있으며, 신학교 6곳에 곳의 187명의 신학생과 32명의 예비 신학생이 상주해 있다. 그리고 사립 학교는 100곳이 넘으며, 보건 시설은 7곳, 사립 대학교는 2곳을 보유하고 있다.[34]

성 비오 10세의 각 관구 현황은 아래와 같다.[35]

관구 수도원 경당 학교 피정 시설
아프리카 관구 7 23 2
아시아 관구 6 39 1
오스트레일리아 관구
(오세아니아 총괄)
7 38 4
오스트리아 관구 4 16
벨기에-네덜란드 관구 3 8 1
캐나다 관구 6 30 3 1
프랑스 관구 44 109 47 4
독일 관구 13 29 4 1
영국-아일랜드 관구
(스칸디나비아 포함)
7 31 1
이탈리아 관구 4 16 1
멕시코-과테말라 관구
(엘살바도르 포함)
6 20 2
남아메리카 관구 8 41 4
스위스 관구 10 17 6 1
미국 관구 20 103 26 3
동유럽 관구
(폴란드 포함)
4 15 3 1
스페인 관구
(포르투갈 포함)
1 17

성 비오 10세회의 주요 신학교는 스위스에콘에 있는 성 비오 10세 국제 신학교이다. 이 밖에도 미국(미시시피 주 위노나)과 프랑스(플라비니쉬르오즈랭), 독일(자이트츠코펜), 오스트레일리아(골번), 아르헨티나(레야)에 신학교가 소재해 있다. 최근 성 비오 10세회 미국 지부는 기존의 미네소타 주의 신학교를 대체할 새로운 신학교를 버지이나 주 버킹엄카운티에 공사 중에 있다. 새 신학교는 미네소타 주의 신학교보다 더 큰 규모로 설계되어 있다. 성 비오 10세회 사제들이 가장 많이 있는 나라는 프랑스이다. 현재 프랑스에는 120명 이상의 사제가 있다.[36]

과거에 성 비오 10세회를 받아들여 지원한 교구장 주교들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더해, 브라질캄포스 교구장이었다가 1981년 8월 20일 77세의 고령으로 은퇴한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가 1988년 에콘의 성 비오 10세회 주교 서임식에 공동 집전자로 참석하였다. 교구장에서 은퇴한 그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회를 창설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회는 2001년까지 성 비오 10세회와 가깝게 지내다가, 이후 성좌와 다시 일치하였다.

현재 성 비오 10세회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사제였다가 2007년 파문당한 바실 코브파크 신부가 이끄는 성 요사팟 사제회와 가깝게 지내고 있다. 성 요사팟 사제회는 본래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가 담당하고 있었으나, 5년 후에 성 비오 10세회에서 퇴출당하였다. 성 요사팟 사제회에는 현재 성 비오 10세회 주교에 의해 교회법 제1015조와 제1017조를 어기고 불법적으로 서품된 2명의 사제와 7명의 부제가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위치한 성모 무염시태 성당과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위치한 김제 공소를 운영하고 있다. 아직까지 한국인 사제는 없으며 일본인 사제와 프랑스인 사제가 한 달에 1~2차례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교황청과의 대화

1988년 주교 서임식 이후 수년 동안 성 비오 10세회와 교황청 사이에는 대화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000년 대희년을 위해 성 비오 10세회 측에서 대규모 인원을 이끌고 로마로 성지 순례를 오면서 이러한 상황은 종식되었다.

2009년 1월 교황청은 성 비오 10세회의 주교들에게 내린 파문을 철회하였으며, 이에 대한 화답으로 성 비오 10세회의 모든 회원이 교회와 하루속히 다시 일치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보냈다.[4][5]

2009년 6월 프란츠 슈미트베르거 신부는 현재 교황청에서는 성 비오 10세회를 오푸스 데이와 같은 속인 교구 쪽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한 것 같다고 말하였다.[37] 교황청에서는 슈미트베르거 신부의 견해에 대해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다만 “성 비오 10세회가 교회와 완전한 친교의 길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며, 교리적 논쟁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 성 비오 10세회는 교회 안에서 어떠한 교회법적 지위도 얻을 수 없으며, 성 비오 10세회에 속한 성직자들은 합법적으로 성무를 집행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38] 2011년 5월 교황청 공보실장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2009년 5월 성명에 대한 논평에서 “성 비오 10세회는 교회 안에서 교회법적 지위가 없기 때문에 합법적인 사목 활동을 할 수 없다. 교리상의 문제가 해소되기 전까지 성 비오 10세회는 교회 안에서 교회법상 지위를 지니지 못하며, 그곳에 소속된 성직자들은 어떠한 성무도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39]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2009년부터 시작된 성 비오 10세화의 교리 논의를 매듭짓기 위해 2011년 9월 14일 성 비오 10세회 총장 베르나르 펠레이 주교에게 교리에 관한 전문을 보냈다. 신앙교리성은 만약 성 비오 10세회가 이 전문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성좌와 완전한 친교 상태를 회복함과 동시에 교회 안에서 합법적인 교회법적 지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어휘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합의해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열린 자세를 보였다.[40] 2012년 3월 6일 펠레이 주교는 그 해 1월에 교황청에 답신을 보냈는데, 교황청 측으로부터 이 정도로는 성좌와 성 비오 10세회 사이의 균열의 근간이 되는 교리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충분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41] 펠레이는 교황과의 합의 가능성에 대해 계속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주교가 펠리이에게 쓴 편지를 보면 교황청 측의 제안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지시 아래 신앙교리성은 2012년 6월 13일 펠레이에게 과거 그가 2012년에 제출한 답변은 여전히 명확한 표현이 필요하며, 만일 성 비오 10세회가 교황청과 화해한다면, 교회 안에서 속인 교구 지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펠레이가 성 비오 10세회의 다른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의 유출본을 보면 그가 신앙교리성에서 제시한 교리 전문을 결코 용인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2년 7월 19일 성 비오 10세회는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교회의 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결정하고 승인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심의하여 투표할 임시 사제회의를 소집하기로 했다.”[42] 9월 16일 성 비오 10세회는 교황청 측이 2012년 6월 13일에 한 제안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의 새 의장이 된 게르하르트 루트비히 뮐러는 2012년 10월 4일에 가진 인터뷰에서 종교의 자유와 인권에 관한 결정사항을 포함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정된 여러 가지 사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황청의 요구와 관련해서 사목적 의미에서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우리는 가톨릭 신앙을 협상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나는 이 이상의 새로운 논의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43] 2012년 10월 27일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는 성 비오 10세회 측에서 입장을 정리해 답변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요청에 대해, “30년 동안의 분리 이후 최근에 생긴 이 중요한 움직임에 있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께서는 성 비오 10세회가 오랫동안 교황과의 화해를 바랐던 점을 이해하고 계시기에, 교회의 일치를 증진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평정심, 끈기와 신뢰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2년 12월 교황청 하느님의 교회 위원회 부위원장 조셉 어거스틴 디 노이아 대주교가 작성한 편지를 보면, 펠레이 주교의 공식 답장을 여태까지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디 노이아 대주교는 “성 비오 10세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마치 교황청 측의 제안을 거부하는 듯한 언어를 사용한다”며 한탄했다. 그는 이어서 아“직도 이 이야기는 논의 중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교황청 측이 제시한 교리 조항은 성 비오 10세회가 교황청과 화해하여 가톨릭교회 안에 합법적인 단체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성 비오 10세회의 유일한 미래상은 성좌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신앙의 무조건적인 고백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교회법 아래 사목 활동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44] 2013년 6월 27일 (2012년 리처드 윌리엄슨이 퇴출된 후) 성 비오 10세회의 남은 세 명의 주교들이 공식 성명을 발표하였다. 공식 성명에서 성 비오 10세회의 주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전 공의회 가르침들과 단절되지 않고 하나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또한 그들은 교황과 대부분의 가톨릭 주교들 및 사제들이 집전하고 있는 새 미사는 교회일치주의와 개신교 정신이 침투되어 악마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을 공허하게 만든다고 주장하였다.[45] 가톨릭 뉴스 에이전시는 이 선언을 가톨릭교회와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2013년 10월 12일 펠레이는 우리는 작년의 어떠한 협의로부터 보호된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하면서 2012년 4월 15일 교황청이 제시한 문서를 성 비오 10세회가 거부했음을 재차 확인하였다. 동시에 그는 교황 프란치스코를 ‘명백한 현대주의자’로 규정하였다.[46]

이탈리아 신문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2013년 11월 22일 가진 뮐러 추기경과의 인터뷰에서 성 비오 10세회 사태에 대해 “양측 간 논의가 실패로 끝났는데, 현재 르페브르주의자들은 어떤 상태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뮐러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불법적인 주교 서임으로 인해 성 비오 10세회 주교들에게 내려진 교회법상 파문은 철회되었지만, 이교적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성사에 있어서 사실상의 파문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와의 친교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문을 걸어 잠그는 후속 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에게 화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 비오 10세회 측 또한 기존의 태도를 바꾸고 가톨릭교회와 교황이 내건 조건을 확실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47][48]

정치적 논란

성 비오 10세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프랑스 왕정 복고나 비시 프랑스 정권(1940–1944) 내지는 장마리 르펜의 정당에 대한 지지나 찬성을 여러 번 표명하곤 하였다.

비방 반대 리그에서는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가 한 발언들을 근거 삼아, 성 비오 10세회를 반유대주의 단체로 비판하기도 하였다.[49]

성 비오 10세회의 수도원은 ‘집 없는 사람을 위한 자선 행위’라는 명목으로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이자 전범인 폴 토이비에르를 숨겨 주다가 당국에 발각되었다. 1996년 토이비에르가 사망했을 때, 성 비오 10세회 사제는 공개적으로 그를 위한 장례 미사를 봉헌하였다.[50][51]

2013년 10월 16일 성 비오 10세회는 나치 전범 에리히 프리브케의 장례 미사를 봉헌하려고 했으나, 봉헌 장소인 로마 인근 알바노에 있는 성 비오 10세회 성당 밖에서 약 500명의 사람이 몰려들어 항의 시위를 벌인 탓에 성사되지 못했다. 가톨릭교회의 지역 교구에서는 교회법을 근거로 에리히 프리브케의 장례 미사 봉헌을 불허하였다. 교회법에 따르면, 만일 죄를 지은 사람이 죽기 전에 참회하지 않을 경우, 그가 죄인인 상태에 머무른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를 위한 장례 미사는 봉헌될 수 없다. 따라서 지역 교구에서는 에리히 프리브케를 위한 미사를 거행하는 것은 교계 내외에서 엄청난 추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52][53] 이에 대해 성 비오 10세회는 웹사이트를 통해 성명을 발표했는데, 성명에서 그들은 “생전에 그가 저지른 잘못과 죄가 무엇이었든 지간에,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성체성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사후 그를 위한 장례 미사가 봉헌될 권리를 갖는다”고 반박하였다.

성 비오 10세회의 분열

성 비오 10세회에서 두 종류의 파벌이 분열되었는데, 하나는 성 비오 10세회가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라고 본 일부 사제들과 교황 요한 23세 이전의 미사 양식을 따르는 이들이다. 나머지 하나는 교황청과 화해하여 일치를 이룬 이들인데, 이들은 성 비오 10세회와 마찬가지로 교황 요한 23세가 반포한 1962년판 미사 양식을 따르고 있다.

성 비오 10세회가 매우 자유주의적이라고 주장하며 분열되어 나간 이들은 총 세 단체로, 다음과 같다.

  • 성 비오 5세회 — 1983년 성 비오 10세회 미국 북동부 관구 소속 미국인 사제 9명이 교황 요한 23세가 1962년에 반포한 양식에 따라 미사를 거행하라는 르페브르의 지시에 불순명하여, 결국 성 비오 10세회에서 제명되었다. 이들은 성 비오 10세회가 자신들 중 한 명을 매입자로 해서 매입하려고 했던 성당 건물 거래를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스스로 조직화하였다. 성 비오 5세회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공공연하게 공석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며, 성 비오 10세회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성 비오 10세회에서 일부 회원들이 이탈한 또 다른 동기로는 혼인 문제가 있다. 르페브르가 신자들에게 해당 교구의 법원에서 내린 혼인 무효 판결에 순응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 밖에도 모든 미사는 1962년판 로마 미사 경본에 따라 거행되어야 한다는 것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개정된 성품성사에 따라 사제품을 받은 이들에게 별도의 성품성사를 주지 않고 그대로 회원으로 받아들이도록 한 르페브르의 결정에 대해서도 이들은 반대하였다.
  • 착한 의견의 성모회 역시 공석주의를 표방하는 전통주의자들의 단체이다. 착한 의견의 성모회 설립자는 1985년 성 비오 5세회에서 분리 독립한 프란체스코 리코사 신부로, 한때 에콘 신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치기도 했었다. 성 비오 5세회와 비교해보자면, 성 비오 5세회가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반면에 착한 의견의 성모회는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 마르셀 르페브르 사제회 — 2009년 성 비오 10세회가 교황청과의 대화에 나서자, 교황청 측에서 성 비오 10세회를 인가해 주는 조건으로 성 비오 10세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을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한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를 주축으로 한 북아메리카 및 프랑스의 몇몇 사제들이 세운 단체이다. 이들은 불순명을 이유로 성 비오 10세회에서 제명되거나 스스로 탈퇴하는 방식으로 성 비오 10세회를 이탈하였다. 이들은 성 비오 10세회가 창립 당시의 원칙들을 교황청과의 대화를 위해 훼손시켰다며 성 비오 10세회 지도부를 비판했으며, 자신들이야말로 성 비오 10세회의 원래 원칙과 이상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 비오 10세회 레지스탕스’, ‘성 비오 10세회 마리아 군대’(SSPX-MC)라고도 일컫는다.

다음 단체들은 성 비오 10세회와 결별하고, 교황청과 다시 일치한 단체들이다.

  •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 — 1988년 에콘에서의 성 비오 10세회 주교 서품식이 일어난 후 설립된 단체이다. 교황청에서 르페브르에 의한 주교 서임은 불법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교적 행위에 해당하며, 따라서 관련자들은 자동으로 파문되었다고 선언하자, 성 비오 10세회에 속한 12명의 사제가 탈퇴하여 교황청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기 위해 세웠다.
  • 착한 목자회 — 교황 베네딕토 16세와의 화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탈퇴한 일부 성 비오 10세회 회원들을 위해 2006년 9월 8일 교황청의 인가를 받아 설립된 사도 생활단이다.

주석

  1. "The fact that the Society of Saint Pius X does not possess a canonical status in the Church is not, in the end, based on disciplinary but on doctrinal reasons. As long as the Society (of St Pius X) does not have a canonical status in the Church, its ministers do not exercise legitimate ministries in the Church" (Pope Benedict XVI, Letter of 10 March 2009 to the Bishops of the Catholic Church concerning the remission of the excommunication of the four bishops consecrated by Archbishop Lefebvre).
  2. According to an article on The Remnant (newspaper), Bishop Fellay cited as evidence replies of the Holy See to SSPX priests regarding absolution from reserved sins, which in fact, since 1983, no longer exist, and the fact that SSPX priests are allowed, after reconciliation, to function as priests, as are, for instance, eastern Christian priests received into the full communion of the Catholic Church.
  3. Decree of Excommunication
  4. Pope lifts excommunications of Lefebvrite bishops
  5. Pope Benedict lifts excommunication of bishops ordained by Lefebvre
  6. National Catholic Reporter, "Traditionalist SSPX calls Vatican offer 'clearly unacceptable'"
  7. Vatican Insider, "Rome needs to change its demands if it wants to reach an agreement with SSPX"
  8. Traditionalists indicate definitive break with Catholic Church
  9. http://www.catholicculture.org/news/headlines/index.cfm?storyid=20046
  10. Interview granted to the Austrian Catholic Press Agency, 12 February 2014
  11. The Wanderer Interviews Fr. Aulagnier, SSPX, Luc Gagnon, September 18, 2003
  12. Short History Of The Society Of Saint Pius X
  13. SSPXAsia.com: Apologia pro Marcel Lefebvre: chp 2: A New Apostolate
  14. "The success of Écône provided so dramatic a contrast to this débâcle that its very existence became intolerable for some French bishops. They referred to it as Le Séminaire Sauvage — the Wildcat Seminary — giving the impression that it had been set up illegally without the authorisation of the Vatican. This appellation was seized upon gleefully by the liberal Catholic press throughout the world and soon the terms 'Écône' and 'Wildcat Seminary' became synonymous."Volume 1, Chapter 2 Apologia Pro Marcel Lefebvre by Michael Davies
  15. SSPXAsia.com: Apologia pro Marcel Lefebvre: Chapter 4: The Campaign Against Econe
  16. "Archbishop Lefebvre was told that this examination was very positive and that he just had to come to Rome and clarify some questions."Conference of Father Franz Schmidberger, superior general of the Society of St. Pius X at Rockdale, Sydney, Australia, October 16, 1990, by Father Gerard Hogan and Father François Laisney
  17. The 1974 Declaration of Archbishop Lefebvre,November 21, 1974
  18. Nos igitur iterum adhortamur hos Nostros fratres ac filios, eosque exoramus, ut conscii fiant gravium vulnerum quae secus Ecclesiae illaturi sunt. Invitationem ipsis iteramus, ut secum recogitent gravia Christi monita de Ecclesiae unitate (Cfr. Io. 17, 21 ss.) ac de oboedientia erga legitimum Pastorem, ab Ipso universo gregi praepositum, cum signum oboedientiae sit quae Patri ac Filio debetur (Cfr. Luc. 10, 16). Nos eos aperto corde exspectamus apertisque bracchiis ad eos prompte amplectendos: utinam humilitatis exemplum praebentes, ad gaudium Populi Dei rursus viam unitatis et amoris ingredi valeant! (Consistory for the creation of twenty new cardinals, 24 May 1976)
  19. The suspension ab ordinum collatione of Archbishop Lefebvre
  20. Text given in English translation in M. Davies, Apologia Pro Marcel Lefebvre, p. 194
  21. English translation in M. Davies, Apologia Pro Marcel Lefebvre, p. 197-199
  22. English translation of Lefebvre's homily of 19 June 1976
  23. English translation of the statement in M. Davies, Apologia Pro Marcel Lefebvre, pp. 215-216
  24. The suspension a divinis of Archbishop Lefebvre
  25. "The situation is such, the work placed in our hands by the good Lord is such, that faced with this darkness in Rome, faced with the Roman authorities' pertinacity in error, faced with this refusal to return to truth or tradition on the part of those who occupy the seats of authority in Rome, faced with all these things, it seems to us that the good Lord is asking for the Church to continue. This is why it is likely that before I give account of my life to the good Lord, I shall have to consecrate some bishops" (Sermon on 29 June 1987)
  26. (Encyclical Ad Apostolorum Principis, 41)
  27. Ecclesia Dei
  28. 이교란 교황에게 대한 순종 또는 그에게 종속하는 교회의 구성원들과의 친교를 거부하는 것이다. - 교회법 제752조
  29. 성좌의 위임 없이 어떤 이를 주교로 축성하는 주교와, 또한 그에게서 축성을 받는 자는 사도좌에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는다. - 교회법 제1382조
  30. SSPX. “Do SSPX Priests Have Jurisdiction”. 2014년 7월 13일에 확인함. 
  31. Fr Ramon Angles. “Validity of SSPX Confessions and Marriages”. 2014년 7월 13일에 확인함. 
  32. Father Edward McNamara, Mass with the Society of St Pius X
  33. “Statistics of the SSPX”. 《http://laportelatine.org》. French District of the Society of St. Pius X. 1 August 2014에 확인함. 
  34. In his letter of 10 March 2009 about his remission of the excommunication of the Society's four bishops, Pope Benedict XVI accepted the figures that the Society gave at that time.
  35. http://fsspx.org/en/content/5925
  36. Figure given by the SSPX's French District.
  37. “IMPORTANT INTERVIEW: "Similar to Opus Dei?" Schmidberger responds: "Somewhat.". 《Rorate Caeli》. 2009년 6월 25일. 
  38. Motu proprio Ecclesiae unitatem
  39. “Fraternity of Saint Pius X ordinations illegitimate”. 《Vatican Radio》. May 7, 2011. 2011년 7월 12일에 확인함. 
  40. Cindy Wooden, "Vatican gives SSPX doctrinal statement to sign" in Catholic Herald, 14 September 2011 Retrieved 15 June 2012
  41. Cindy Wooden, "Vatican says SSPX response to basic doctrinal principles 'insufficient'" in National Catholic Reporter, 16 March 2012 Retrieved 15 June 2012
  42. “SSPX General Chapter Statement”.  [깨진 링크]
  43. NDR, "Glaubenspräfekt Müller: Keine Gespräche mehr mit Piusbruderschaft"
  44. Il Sigmografo, 19 January 2013
  45. Declaration on the occasion of the 25th anniversary of the episcopal consecrations (30 June 1988 – 27 June 2013)
  46. John Vennari, "Bishop Fellay on Pope Francis 'What we have before us is a genuine Modernist!'" in Catholic Family News, October 2013
  47. Corriere della Sera, 22 December 2013, p. 5
  48. Catholic World News: "CDF prefect says SSPX in schism, suspended from sacraments" (Retrieved 13 February 2015)
  49. The Society of St. Pius X: Mired in Anti-Semitism, Anti-Defamation League, 26 January 2009
  50. "Vade retro Soutanas", ("Get Thee Behind me, Satan"), Libération, 11 October 2006
  51. "Lefebvre movement: long, troubled history with Judaism", National Catholic Reporter, 26 January 2009
  52. "Nazi war criminal's SSPX funeral stopped by protests" by Cindy Wooden, Catholic News Service,16 October 2013,
  53. Code of Canon Law, canon 1184 §1 3°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