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토론:전언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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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5년 전 (전언겸님) - 주제: 박서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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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영합니다 (토론) 2016년 11월 17일 (목) 10:23 (KST)답변

백양필, 백돈분, 백현석 문서 삭제신청에 대해[편집]

백양필, 백돈분, 백현석 모두 고려사에 행적이 나오는 인물들인데, 무턱대고 무더기로 삭제하려고 하시면 이건 좀 아니다 싶네요. 우리가 잘 몰라도 사료에 나오는 인물이라면 간단하게라도 등재했다가 내용을 조금씩 보충하면서 틀린 게 있으면 수정하고 보완해가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삭제신청을 하신 이유로 '증명되지 않은 가족 관계'라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것인지요? 부자나 부부 관계는 해당 족보를 통해 확인하는 게 기본일진대 무엇을 보시고 증명되지 않았다고 하시는 건지 말씀 부탁드립니다.언재호야 (토론) 2017년 1월 26일 (목) 20:05 (KST)답변

백견 문서 추가[편집]

백문보의 행략에 따르면, 백문보의 외가 즉, 백견의 처가는 慶尙道 寧海府 柄谷(면) 居無役(리)라 했는데, (창수면) 仁良里라 고침은 무슨 근거인가요? 仁良里나 元邱里는 그 후손들이 옮겨가서 산 곳들로 보입니다.언재호야 (토론) 2017년 1월 26일 (목) 19:15 (KST)답변

백견 문서에 대해[편집]

안녕하세요. 1,백견이 '대흥 출신'임을 지우셨네요. 백견은 대흥 출신으로 직산으로 옮겼다가 영해로 낙향한 걸로 압니다. 대흥 출신인 것과 대흥 백씨란 건 다른 이야기인데, 대흥 백씨라고 모두 대흥 출신은 아니잖아요? 2,이력 중 전리사판서를 왜 지우셨는지요? 3,'정착하였다'를 '거처를 옮겼다'로 바꾸셨네요. 영해에 정착함으로써 후손들이 쭉 영해에 살게 되었음을 암시하였는데, 거처를 옮겼다 함은 일시적으로 기거한 것 처럼 들립니다. 4,백견의 부를 '백양신'으로 바꾸셨네요. 백양신은 고려 전기 사람인데, 무슨 근거인지요? 5,며느리들을 왜 지우셨는지요? 답변 기다립니다.언재호야 (토론) 2017년 1월 26일 (목) 18:48 (KST)답변

반박[편집]

1.대흥 출신이라는 근거부터 제시하셨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제가 근거로 제시한 백문보의 행장에서는, 대흥 출신이라는 내용을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2.아무런 근거가 제시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백문보의 행장에서는, 백견을 승평부사라고만 했습니다.

3.후손들이 쭉 영해에 살았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4.이미 각주로 근거(백문보의 행장)를 제시했습니다. 문서를 똑바로 읽지 않으시면 곤란합니다.

5.아들들의 문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가족 관계가 과도하게 기술되면, 배보다 배꼽이 큰 문서가 될 것입니다. --全彦謙 (토론) 2017년 1월 26일 (목) 20:13 (KST)답변

백견 문서 재반박 및 요청[편집]

  • 대흥백씨는 백임지를 시조라 하였습니다. 대흥백씨보에 따르면, 이후 세계는 任至-良弼-敦賁-玄錫-堅-文寶로 이어집니다. 대흥백씨는 대흥-직산-영해로 이거하는데, 누대로 대흥에서 살다가 백견에 와서 '始居稷山縣'이라 하였기에 백견을 대흥 출생으로 보았습니다. 백견은 대흥에서 출생, 직산으로 이거하여 살다가 처가인 영해로 낙향한 걸로 봅니다. 아들인 백문보는 직산에서 태어나고 살다가 직산의 전장을 정리하고 만년에 외가인 영해로 다시 낙향하지요.
  • 대흥백씨보에 따르면, 백견의 부는 백현석입니다. 제가 '백문보 행장'을 못찾겠네요. 그래서 그 부가 '백양신'으로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엔 고려 전기 사람인 '백양신'이 고려 후기에 가까운 백견의 부라고 되어있을 리가 없을 것 같거던요. 그 내용을 한번 올려봐 주시면 안될지 부탁드립니다.
  • '백문보 행략'에는 백견이 전리사판서를 지낸 것으로 분명히 되어 있는데, 백문보도 전리사판서를 지낸 걸로 봐서는 그 오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백견의 가족관계를 보면서 며느리에 대해서는 아들 백문보의 가족관계를 보면 된다고 빼는 것이 맞다는 말씀은 수긍하기 힘드네요. 굳이 그렇게 까지 해서 백견의 며느리를 려고 백문보 문서를 다시 보라는 게 맞는지는 잘 이해가 안됩니다. '배보다 배꼽' 말씀은 이해는 합니다만 너무 빡빡하신 것 같네요.언재호야 (토론) 2017년 1월 26일 (목) 22:49 (KST)답변

「백문보 행장」 원문 링크[편집]

이 행장의 저자는, 백문보의 7대손백현룡(白見龍, 1622년 사망)입니다. 족보는 한 가문에도 여러 버전이 존재할 텐데, 백운전님이 이야기하신 '족보'가 언제 간행된 것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全彦謙 (토론) 2017년 1월 26일 (목) 23:13 (KST)답변

백문보 행장에 대한 해명(해석)[편집]

  • 우선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 행장의 선계를 잘못 이해하셨더군요. 우경~중학~광원~창직~'사유-휘-간미-양신'~견에서 우경~중학~광원~창직~사유는 그냥 계통을 말했고, 사유-휘-간미-양신은 '낳았다'가 있으니 분명히 부자 간임을 밝혔습니다. 양신~견은 '낳았다'가 없이 다시 그냥 계통만 밝힌 겁니다. 백우경은 730년 경 출생한 분이고, 백견은 1270년 경에 출생한 분인데, 8대만에 어떻게 540년이 지나갑니까? 백양신은 백견의 9대조입니다. 중간 계대가 생략된 거지요. 대흥백씨는 宇經-靖-立昇-永-仲鶴-光善-卓-文色-思柔-揮-簡美-行隣-良臣-可績-居靖-易宗-曘-任至-良弼-敦賁-玄錫-堅-文寶로 이어집니다. 한번 더 확인해보시고 정정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언재호야 (토론) 2017년 1월 26일 (목) 23:45 (KST)답변

답변[편집]

뒷통수 얻어맞은 기분이네요. 백견의 아버지를 백양신으로 기술한 것은, 제 실수임을 인정합니다.

다만, 해당 족보의 기록은 고려사』 등장하는 백씨들을 억지로 연결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백견의 아버지를 미상으로 처리하고 싶습니다.

또한 상술했듯이, 인용하신 족보가 언제 편찬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全彦謙 (토론) 2017년 1월 27일 (금) 00:05 (KST)답변

장난치지 마세요[편집]

http://people.aks.ac.k/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5COa_A9999_1_0028070

사전에 나오는 인물입니다.10000금 (토론) 2016년 12월 5일 (월) 21:26 (KST)답변

장난으로 삭제 신청한 거 아닙니다. 김은열은 해당 링크 외에는 등재된 적이 없으며, 참고 문헌 또한 사료가 아니라 19~20세기의 논문에 불과합니다. --全彦謙 (토론) 2016년 12월 5일 (월) 23:59 (KST)답변

장하 문서의 삭제 신청에 대해서[편집]

문서의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현재의 문서에서 바로잡는 편집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해당 문서는 삭제 신청을 통해 삭제될만한 문서로 보이지 않으며, 관련하여 반복적인 삭제 신청은 적절치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관련된 문서로 위키백과:삭제 정책#삭제 신청 이 있으니 해당 내용을 참조 바랍니다. -- 메이 `토론 2016년 12월 16일 (금) 00:38 (KST)답변

재작성(재등재?)될 문서의 삭제 신청에 대한 주의[편집]

재작성(재등재?)되어야 한다거나, 출처가 부족하거나, 일부 오류가 있다거나 하는 등의 일부 문제가 있다고해서 삭제 신청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직접 출처를 달거나, 오류를 수정하시면 되는 부분입니다. 삭제 신청 틀 사용과 관련하여 이 부분을 수 차례 확인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서의 편집 역사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후 틀 사용시 주의를 바라며, 틀 사용의 상세에 대해서는 틀:삭제 신청 의 설명문서를 참조 바랍니다. -- 메이 `토론 2017년 1월 7일 (토) 16:47 (KST)답변

장하[편집]

문서에 기술적 문제가 있으면 삭제가 아닌 수정을 해 주시면 됩니다. 물론 저작권 침해나 개인정보 노출 같은 상황에서는 삭제해야 하겠지만요. -- ChongDae (토론) 2017년 2월 14일 (화) 17:27 (KST)답변

최홍윤 (고려)[편집]

삭제 신청 후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재생성하신 이유가 있나요? -- ChongDae (토론) 2017년 2월 14일 (화) 17:58 (KST)답변

제가 해당 문서의 주 기여자라, 깔끔하게 새 계정의 편집 이력만 남기려고 했습니다. 내용이 조금 다른 것은, 오류를 고쳤기 때문입니다. --全彦謙 (토론) 2017년 2월 15일 (수) 00:58 (KST)답변

윤환 문서 삭제 신청 반려[편집]

해당 문서는 동음이의어 문서이므로 넘겨주기 문서에 해당하지 않아 삭제 신청을 반려하였습니다. --이강철 (토론) 2017년 10월 17일 (화) 12:07 (KST)답변

'삭제 신청'에 대해서[편집]

이전에도 말씀드린 바, 재작성을 이유로 삭제 신청을 하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위키백과 문서의 편집 역사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최대한 보존되어야 합니다.

위쪽 문단의 최홍윤 (고려) 문서 외에도 어떤 문서를 얼마나 삭제신청 후에 재작성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삭제된 문서의 내용까지는 일반 사용자가 알 수 없으나, 삭제 기록의 확인을 통해 삭제된 문서의 재생성임은 확인 가능하므로, 이와 관련한 검토 및 복구 요청도 가능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이와같이 문서 삭제 후 재작성하시더라도, 최홍윤 (고려) 문서의 경우처럼 편집 역사는 복구·보존될 것입니다.

이후의 삭제 신청시 주의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같은 사안에 대한 주의가 반복되고 있는 점도 확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메이 (토론) 2017년 10월 18일 (수) 23:57 (KST)답변


+ 제가 동명이인을 외부 링크로 잘못 편집한 것(특수:차이/19826303)은 이전으로 되돌렸습니다.(특수:차이/19989937) 그러나 토론:권준 (1541년)을 보면 출전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제시하고 있으며,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웹사이트에서 나주 목사 및 공신 책봉 등의 내용이 확인됩니다. 이에 따라 삭제 신청을 이전으로 되돌렸습니다.

재작성이나, 편집 이력과 관련한 삭제 신청은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전의 삭제 신청(특수:차이/19825220)에서 '재작성'을 언급하신 것으로 볼 때, 해당 표제어가 등재될만한 인물이라고 인지하시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잘못된 외부 링크 편집은 이를 바로잡거나, 지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위키백과 문서의 역사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최대한으로 보존되어야합니다. -- 메이 (토론) 2017년 11월 17일 (금) 00:52 (KST)답변

넘겨주기 삭제[편집]

넘겨주기 삭제 신청을 하시려면 먼저 다른 문서에서 사용 중인 링크를 정리해 주세요. 왼쪽 메뉴에서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기능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 ChongDae (토론) 2018년 1월 16일 (화) 14:00 (KST)답변

삭제 토론과 삭제 신청 틀의 사용에 대해서[편집]

교서감 관직에 대하여, 제 선에서의 직위고하에 대한 판단은 불가능하나, 몇몇 인터넷 글로 볼 때,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어 삭제 신청을 거듭 반려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서감 관직은 ○○품으로, 이러저러하여 오늘날 무수하게 많은 하위직 공무원들의 관직과 같다'라던가 하는 등의 설명이 있다면 참고하여 처리하였겠지요. 전언겸님께서는 삭제 토론이 시간만 잡아먹고, 번거롭다고 여기시는 것 같은데, 다른 사용자들이 왜 삭제 토론을 거치는지에 대한 재고를 바랍니다. 또한 삭제 신청 틀의 사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당 문서 건과는 별개로, 앞으로도 좋은 기여와 왕성한 활동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메이 (토론) 2018년 1월 20일 (토) 02:05 (KST)답변

'안구 (조선)' 문서에 대해서[편집]

해당 문서가 삭제 신청 대상이라는데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필요한 경우 삭제 신청틀을 거듭하여 붙이지 마시고, 삭제 토론으로 넘겨서 논의를 바랍니다. -- 메이 (토론) 2018년 2월 5일 (월) 00:34 (KST)답변


해당 문서에 내용과 출처를 더하여 편집하였습니다. 만약 이를 검토하신 뒤에도 해당 문서가 삭제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보신다면, 삭제 토론으로 넘겨 논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후 {{삭제 신청}} 틀 사용에 있어서, 즉각적인 삭제 대상이 아니라는 이견이 있다면 누구든지 한눈에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명백한 삭제 대상까지는 아닌 경우 삭제 신청 틀을 반복적으로 달지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데, 삭제 토론을 이용해 주시기 바라며, 그 상세에 대해서는 링크(위키백과:삭제 정책#삭제 토론이 필요한 경우)의 문서 내용을 참고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틀 사용과, 삭제 토론에 대한 재고를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 메이 (토론) 2018년 2월 6일 (화) 00:35 (KST)답변

'김돈시' 문서 삭제 신청에 대해서[편집]

== 삭제 신청에 대해서 ==

@전언겸: 재작성할 필요가 없다면, 재작성을 기다릴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확인 가능한 사료를 추가해서 문서를 살찌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해당 삭제 신청은 반려하며, 반복적으로 삭제 신청 틀을 달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 메이 (토론) 2018년 7월 30일 (월) 18:49 (KST)답변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발전 가능성이 매우 낮은 문서입니다. 타 백과에 등록된 내용도 소략하기 그지없으며, 무엇보다도 형 김돈중과 대부분의 행적이 일치하는 인물입니다. --全彦謙 (토론) 2018년 7월 30일 (월) 18:58 (KST)답변
특수:차이/21905461 추가된 '답변' 문단(== 답변 ==)을 들여쓰기로 고쳐서, '삭제 신청에 대해서' 문단과 합칩니다. -- 메이 (토론) 2018년 7월 30일 (월) 19:15 (KST)답변
답변하신 바는 '문서 등재 기준'과 별개 문제입니다. 해당 삭제 신청 편집과 과거의 다른 삭제 신청에 비추어 보면, 적어도 지금의 삭제 신청은 "등재 기준은 만족하지만, 편집 이력을 깔끔하게 하기 위한" 삭제 신청으로 생각됩니다. 필요한 경우, 삭제 토론(위키백과:삭제 토론 참고.)을 거쳐서, 삭제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메이 (토론) 2018년 7월 30일 (월) 22:14 (KST)답변
저는 그때와는 다른 이유로 삭제를 신청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해당 문서를 다시 작성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합니다. --全彦謙 (토론) 2018년 7월 31일 (화) 16:58 (KST)답변
토론:김돈시 문서의 토론 내용을 옮깁니다. 문단 이름은 새로이 고쳐쓰고, 원 문단 이름은 nowiki 처리합니다. -- 메이 (토론) 2018년 8월 1일 (수) 23:28 (KST)답변
이미 안내해드린 바, 필요한 경우 삭제 토론을 거쳐주시기를 바랍니다. -- 메이 (토론) 2018년 8월 1일 (수) 23:32 (KST)답변

삭제 토론에 참여하며 이 토론을 읽어봤는데 김돈시는 원사료에 짤막하게 나오며 이에 대한 논문도 거의 없는 수준입니다. 이런 것 까지 삭제 토론으로 올려야 한다는 것은 관리력 낭비가 아닌가 싶네요.--고려 (토론) 2018년 12월 20일 (목) 16:15 (KST)답변

삭제 토론 알림[편집]

김돈시 문서의 삭제 토론을 위키백과:삭제 토론/김돈시로 옮겨드렸으니 토론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사용자 문서에 적으신 내용을 바탕으로 사:Jki321 문서에는 {{다중 계정}}을 부착하였습니다. --관인생략 (토론) 2018년 8월 2일 (목) 23:41 (KST)답변


박서 관련[편집]

박서의 경우 박문성으로 개명 했다는 역사적 사료가 없습니다. 단지 일부가 관직명만 가지고 추정 할 뿐이죠. 당시 박서는 목숨에 위협을 받는 위치였기에 박문성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상은 박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후에 박서의 현손이 조정에 조서를 올려 그때 복권이 되는데 이와 모순됩니다. 이와 별개로 사료에 박서가 박문성으로 개명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해당 문서는 박서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Jspclan (토론) 2019년 4월 16일 (화) 15:21 (KST)답변

작년에 동일 인물 설을 부정하셨던 그 분인가요? 반박하겠습니다.

  1. 『고려사』에 개명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역사적 사료가 없다'라고 단정하시는 건가요? 『동문선』에 실린 마제(麻制)에서 박문성의 행적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보면 박서의 그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또한, 이는 이미 윤용혁의 『고려대몽항쟁사연구』(1991)에서 논증된 사실입니다.
  2. 박서가 목숨의 위협을 느낀 것은 일시적인 상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1232년(고종 19) 1월에 몽골군이 철수했으며, 동년 7월에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했는데, 박서는 이때 복직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몽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상황이지요.
  3. 박서의 현손은 대체 누구인가요? 『고려사』를 수도 없이 읽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 조서라는 것의 원문도 꼭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全彦謙 (토론) 2019년 4월 16일 (화) 18:34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