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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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선씨(寶城宣氏)
관향전라남도 보성군
시조선윤지(宣允祉), 선용신(宣用臣)
집성촌전라남도 보성군
주요 인물선형, 선거이, 선극례, 선세강, 선약해, 선여경,선종한, 선준영, 선종구, 선경식, 선병렬, 선동혁, 선동열, 선원욱
인구(2000년)34,842명 (176위)

보성 선씨(寶城 宣氏)는 전라남도 보성군을 본관으로 하며 시조는 선윤지(宣允祉)이다.

기원[편집]

선씨(宣氏)의 득성(得姓)시조는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손인 희정(姬靜,묘호 宣王), 문왕의 넷째 아들 희단(姬旦,周公)의 후손인 노(魯)나라 희윤(姬允,桓公)의 4세손인 숙손교여(叔孫僑如, 시호 宣伯), 송나라 자력(子力,시호 宣公 . 商 탕왕 子太乙 후손)의 후손들이 이분들의 시(諡)‘선(宣)’으로 씨(氏)를 삼았으니 BC800~600년대의 일이다. 이들은 모두 제곡(帝喾)의 직계 후손들이고 희성(姬姓)의 후손들이다. 한반도 보성군을 본관으로한 선씨들이 이 분들 중 누구의 후손인지는 밝혀낼수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선(宣)씨는 전라도 보성의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朝鮮)시대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광주 선씨(光州 宣氏)와 밀양 선씨(密陽 宣氏)가 나타나지만 보성선씨의 지역적 호칭이며 동원(同源)으로 본다.

역사[편집]

선씨(宣氏)들은 옛부터 복호촌(伏虎寸=伏忽,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여러 집안들이 각각 세를 이루어 후손들을 이루다가, 조선중기 각 집안이 족보를 편찬하던 17세기에 들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 최초의 인물 우의정 선형의 고조부(5대조)인 선윤지(宣允祉)를 시조로 삼고, 선윤지[1]가 낙향한 전라남도 보성을 본향으로 삼았다.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宣允祉)는 우왕 때 황명(皇明) 문연각학사로 고려에 와서 전라도 관찰사 겸 안렴사(按廉使)로 전라도 해안에 넘나드는 왜구를 소탕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웠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보성에 정착하였다. 이에 도민들이 한식동(寒食洞)에 생사우(生祠宇)를 세워 선생을 추앙하였고, 1831년(순조31년) 오충사(五忠祠)[2]로 사액되어 후손 형(炯), 거이(居怡), 세강(世綱), 약해(若海)와 함께 오충사에 배향(配享)하여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임술년에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知義禁府事五衛都摠管)에 증직되었다.

선용신(宣用臣)을 시조로 하는 조성과 도촌에 사는 선씨는 선용신이 고려 고종 때의 진사(進士)로 여진을 정벌하는 공을 세워 패주군(貝州君)에 봉해졌다고 하며,[3] 선중의 호적(보성군호구정장)으로 신원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한다.

족보[편집]

보성 선씨(寶城宣氏)는 최초로 족보를 만들기 위해 신유년(1681년)에 관산(冠山) 봉림사(鳳林寺)에 모여 수보를 하였으나 초고(辛酉草稿)만 남기고 완성되지 못하였으며, 1738년(무오년)에 보성의 개흥사에서 다시 만나 수보를 시작하였고, 신유초고와 옛 문적을 참고하여 선윤지를 첫머리에 시조를 삼아 선윤지 후손들의 파를 순서대로 나열한 후에 뒤편에 세계가 확인되지 않은 선씨를 기록하였다. 1741년(신유년)에 신유초고 수정으로 기사보(1749년)의 초보(初譜)를 완성하였고, 1748년(무진년)에 안락의 징광사에서 최종 수정을 한 후, 1749년(기사년)에 보성선씨 최초 족보인 기사보(1749년)를 완성하였다.

이 때 세계가 확인되지 않아 별도로 부록되어 있던 선용신을 시조로 하는 조성과 도촌파들의 기록은 문적이 불분명하고, 역년이 위착되어 믿음이 가는 문서로 증명되지 않았고, 시조 선윤지와는 세계를 연계할 수 없어 다른 선씨로 판단하기에 조도계열을 배제하고 선윤지(퇴휴당)를 시조로 한 보성선씨 최초 족보 기사보를 만들었다. 그 후 조성과 도촌에 사는 조도계열은 선용신을 중시조로 정축년(1757년)에 별보를 하였다.

  • 신유초고 : 신유년(1681년)에 시작하였으나 초고만 남기고 완성되지 못함. 초고에서 선복주님은 오선개조안렴공(吾宣皆祖按廉公)이라는 시를 남겨 안렴공(선윤지)가 시조임을 밝힘.
  • 기사보 : 1749년 보성선씨 최초로 완성된 족보
  • 을사보 : 1785년 보성선씨 기사보를 수정, 보완하여 발간(문송영제 수록, 문송영제란 보성선씨간 시조논쟁에 대한 1768년의 송사결과 판결문으로 보성선씨 시조가 선윤지임을 증명함)
  • 정미보 : 1847년
  • 정미보 : 1847년 수정발간
  • 신해보 : 1851년
  • 을묘보 : 1855년
  • 을해보 : 1875년
  • 계사보 : 1893년
  • 정사보 : 1917년
  • 경오보(참의공파보) : 1930년
  • 임오보(옥암공파보) : 1942년
  • 정해보(선전공파보) : 1947년
  • 을미보 : 1955년
  • 무오보 : 1978년 (선윤지 후손과 선원지 후손이 합보하였으나, 선원지 후손이 다시 분파하여 별보를 함)
  • 정축보 : 1997년

인물[편집]

  • 선형(宣炯, 1434년 ∼ 1479년) : 선윤지의 5세손.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광유(光裕)이고, 아버지는 증 우찬성 화(和)이다. 1451년(문종 1) 무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쳤다. 1454년(단종 2년) 12월 경흥부사로서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세조 2년) 3월 경상좌도수군처치사(慶尙左道水軍處置使)를 거쳐 안주목사·한성부윤·판종성부사(判鐘城府事)를 역임하였다. 그 해 8월에는 상호군(上護軍)으로서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를 수행, 그의 신임을 얻었다. 10월에는 회령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63년(세조 9년) 4월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이듬해 정월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4월에는 다시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1465년(세조 11년) 정월에 경상도제언순찰사(慶尙道堤堰巡察使)가 되어 경주 북천(北川)의 수로를 건설하는 공을 세웠다. 6월에는 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절도사 김겸광(金謙光)과 뜻이 맞지 않아 교체되었다. 1467년 정월 비록 무장이지만, 성품이 청렴하고 대쪽같다 하여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선군(船軍) 동원을 적극 주장하였다. 같은 해 7월 형조참판으로서 1,000인의 군졸을 이끌고 오자경(吳子慶)·한계미(韓繼美) 등과 1진을 이루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의 상을 받고 황해도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에 임명되는 동시에 유성군(楡城君)으로 봉군되었다. 1469년(예종1년) 병조판서 겸 정로장군이 되고, 1470년(성종 1) 6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성종 즉위에 공이 있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녹훈되었다.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영안북도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를 역임하고 이듬해 8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유성군으로 다시 봉군되었다. 1477년(성종 8년)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479년 1월 13일 별세하여 호조장으로 장례를 치뤘으며, 우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봉토로 받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뒷산(낙성대)에 안장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강매동에 영모재를 건축하여 불천위제사를 모시며 전라도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위패가 모셔졌다. 시호는 평양(平襄)이다.
  • 선거이(宣居怡, 1550년 ∼ 1598년) : 선윤지의 8세손.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 판서 형(炯)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도사(都事) 상(祥)이다. 1569년(선조 2)에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다음 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啓請軍官)이 되었다. 1587년 조산만호(造山萬戶)이었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녹둔도(鹿屯島)에서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막아 공을 세웠다. 1588년 거제현령·진도군수를 역임하고 이어 청백(淸白)으로 성주목사를 거쳐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도군수로서 그 해 7월에 한산도해전에 참가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592년 12월 독산산성(禿山山城) 전투에서는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전라순찰사 권율(權慄)과 함께 승첩을 올렸는데 이 때 크게 부상당하였다. 이어 다음해인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도원수 권율과 함께 부원수로서 적을 대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9월에는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약탈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이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충청병사에 올랐다. 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屯田)을 일으켜 많은 군곡(軍穀)을 비축, 공을 세웠다. 1594년 9월에는 충청수사로 와서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 해전에서 또 공을 세웠다. 이후 선거이는 충청병사를 거쳐 충청수사(1595년 을미 5월)로 임명이 되고, 전투에서는 많은 활약을 보여, 적들에게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렸고, 왜군과 전쟁이 잠시 멈춘 1595년-1596년 사이에는 이순신 통제사를 도와 둔전을 관리하여 많은 군량을 비축하는 공을 세웠다. 선거이와 이순신은 서로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였고, 이순신은 그를 혈육과도 같이 여겼다. 충청수사로서 한산도 통제영 본영에 선거이가 있을 때 전염병에 걸려 이순신은 많은 걱정을 하고 자주 문병을 한 것이 난중일기에 많이 기록이 되어 있으며, 이후로도 거의 매일 만나는 사이였고, 선거이가 충청수사를 마치고 황해병사로 떠날 때(1595년 을미 9월) 이순신은 이별을 아쉬어 하며 시를 남겼다. 이순신과 절친한 사이로, 이순신 보다는 5살 어리지만 계급상 7년이 높았고, 전투에서도 서로 돕는 사이였지만,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문신들의 견제를 받아 그 공로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1801년(순조1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 선극례(宣克禮, 1556년 ~ 1597년) : 선윤지의 9세손. 자(子)는 예중(禮中), 호는 의재(義齋).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수사로 재임하다가 1598년(선조 31)에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옥배(玉杯)와 녹권(錄券)을 은사 받았다.[4]
  • 선세강(宣世綱, 1576년 ∼ 1636년) : 선윤지의 9세손. 자는 사거(士擧), 호는 매곡(梅谷). 아버지는 참의 봉장(鳳章)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1618년(광해군 10) 평안도 벽단진첨사(碧團鎭僉使)를 제수받았다. 그 뒤 경기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의 축조를 감독하였다. 당상관이 된 뒤에 홍주영장(洪州營將)·안동영장(安東營將)을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함께 경기도 쌍령(雙嶺)에서 우세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죽였으나 끝내 패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전라남도 장흥의 포충사(褒忠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5]
  • 선약해(宣若海, 1579년 ∼ 1643년) : 선윤지의 10세손. 자는 백종(伯宗). 아버지는 부사(府使) 의문(義問)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31년(인조 9)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으로 있을 때,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였다고 추천되어 경상좌수사를 제수받아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사행(使行)하였다. 이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고 외국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여 돌아와서 품계가 승진되었다. 이와 함께, 금편(金鞭)·초구(貂裘)·옥배(玉盃) 등을 하사받았다. 뒤에 평산부사·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철종 임술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의금부 훈련원도사에 추증되었다.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6]
  • 선여경(宣餘慶, 1551년 ∼ ?) : 조도계열 선용신의 후손. 자는 경숙(敬叔)·응원(應遠), 호는 도암(道庵)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宣傳官)‧주부(主簿) 등의 관직을 수행하다가, 1591년(선조 24) 부친상을 당하여 움막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시묘를 하던 중이었으나 상복을 먹물로 염색하여 입고서 두 아들과 종형제들에게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뜻을 말하였다. 이들도 “사나이가 죽어야 할 때가 이때이다.” 하면서 함께 어가를 호종(扈從)하였다. 평양성 전투를 전후하여 공을 세우고 이들은 모두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고, 이들 6충신을 기리기 위하여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정흥리 호음동에 ‘선씨육충유장비(宣氏六忠遺庄碑)’를 세웠다. 사후 숭모재(崇慕齋)에 제향(祭享) 되었다. 그러나 별시방목에 나타난 선여경은 “자시하(慈侍下=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모시는 상태)로 기재되어 있다. 결국 1583년 무과에 급제한 선여경과 조도계의 선여경이 같은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과거 급제자[편집]

보성 선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명, 무과 급제자 24명을 배출하였다.[7]

문과

선문주(宣聞周) 선세휘(宣世徽) 선순보(宣淳輔) 선약봉(宣若奉) 선준채(宣俊采) 선진규(宣鎭奎) 선헌(宣憲)

무과

선거중(宣居重) 선경협(宣景恊) 선귀인(宣貴仁) 선기주(宣起周) 선덕민(宣德敏) 선덕용(宣德容) 선문환(宣文煥) 선봉령(宣鳳齡) 선순웅(宣舜雄) 선순흠(宣舜欽) 선시진(宣時振) 선여경(宣餘慶) 선영길(宣永吉) 선응길(宣應吉) 선응진(宣應軫) 선의남(宣義男) 선익도(宣翊道) 선익성(宣翊成) 선익성(宣翊成) 선익헌(宣翊憲) 선중륜(宣重倫) 선팽(宣彭) 선필영(宣必英) 선호적(宣豪績)

생원시

선세휘(宣世徽) 선약봉(宣若奉) 선양중(宣養中) 선우빈(宣遇贇) 선정달(宣廷達) 선헌(宣憲)

진사시

선문주(宣聞周) 선병련(宣炳蓮) 선붕익(宣鵬翼) 선세기(宣世紀) 선우해(宣羽海) 선응직(宣應直) 선의문(宣義問) 선인후(宣仁厚) 선탁경(宣倬卿)

음관

선문주(宣聞周) 선원표(宣元杓) 선준채(宣俊采) 선창로(宣昌魯)

음양과

선흥윤(宣興胤)

인구[편집]

  • 1985년 7,651가구, 33,105명
  • 2000년 10,821가구, 34,842명
  • 현재는 약 4만여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보성을 중심으로 한 선윤지후손이 37,000여명으로 95%이상이며, 도촌을 중심한 선용신후손이 3,000여명으로 5%미만으로 추산되고 있다.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