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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

조선시대 《송경 복원도(松京 復元圖)》에서 벽란도[1]
소재지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재지황해남도 벽성군 영천리 일대
좌표북위 37° 56′ 54.796″ 동경 126° 23′ 39.557″ / 북위 37.94855444° 동경 126.39432139°  / 37.94855444; 126.39432139
상세
종류국제무역항
통계
통계년도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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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
지도
오픈스트리트맵 정보
지도: 이용 약관
890m
970yds
2
강서사
1
벽란도
벽란도(예성항)
1
조선시대 《송경 복원도(松京 復元圖)》에서 벽란도
2
운달산(雲達山) 강서사(江西寺)
지도
오픈스트리트맵 정보
지도: 이용 약관
2km
1.2miles
강화도 승천포
승천포 (현재 고려천도공원)
강화도 승천포
강화도 승천포
송나라 상인이나 사신단은 연미정(燕尾亭)이 위치한 강화도 북단 분수령(分水領)을 지나 강화 평화전망대 인근에서 물때를 기다리며 예성항에 입항하였다.[2]
남선항로 벽란도 입항 수로
지도
오픈스트리트맵 정보
지도: 이용 약관
14km
8.7miles
5
벽란도
5 벽란도
5 벽란도
4
승천포
3
연미정
3 연미정
3 연미정
2
손돌목
1
영종도-손돌목-연미정-승천포-예성항 루트[2]:
1
자연도 경원정(慶源亭)
2
손돌목
3
연미정
4
승천포
5
벽란도

벽란도(碧瀾渡)는 고려 시대에 외국의 사신과 상인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던 나루(渡)로,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고려의 국제 무역항이었다.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고려의 경제 특구였다.[1]

고려 시대에 이곳에는 송나라 사신을 위해 벽란정(碧瀾亭)이란 관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를 따서 벽란도라고 불렀고, 조선 시대에는 조세미(租稅米) 등을 운반하는 도선장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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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는 개경의 서문인 선의문(宣義門)에서 서쪽으로 30리(12 km) 떨어진 예성강 하구변에 있었고, 벽란도의 동쪽에는 감로사(甘露寺)가 있었다.[3] 1914년 전까지는 벽란도리(碧瀾渡理, 개성군 서면 벽란도리)라는 행정구역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개성군 서면 연산리에 편입되었다.[4]

예성강 하구는 신라 말기부터 해상 세력의 근거지로 기능했으며, 고려는 개경(개성)과 가까운 이곳을 통해 중국과 교역을 하였다. 고려 태조인 왕건의 가문 자체가 송악(개성)을 근거지로 벽란도를 통해 해상 무역을 하던 호족이었다.

임진강보다 개경에 가까운 예성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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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은 서강(西江)으로도 불리며, 수안(遂安)의 언진산(彦眞山)에서 출원하여 상류에서부터 조읍포·이포·전포·벽란도 등이 있었지만 바다를 거쳐 오는 경우 벽란도가 큰 규모의 배가 정박하기 용이하였다.[5] 벽란도보다 위쪽에 있는 전포는 개경과의 거리가 36리이고, 이포는 41리인 데 비해, 벽란도는 36리이므로 외부로부터 접근은 하류의 벽란도가 가장 유리하였다. 임진강도 개경에 접근하는 통로였지만, 개경과의 거리가 예성강보다 멀었다.[5]

예성강 입구의 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7~8m에 이르므로 밀물을 이용하면 벽란도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5] 반면 썰물 때에 출항하면 짧은 시간 안에 먼 바다에 이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5] 그렇지만 조수 간만의 흐름을 잘 모르는 경우 접근하기 어려우며, 특히 대형선박은 뻘에 좌초될 위험이 컸다.[5]

운달산 강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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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달산(雲達山)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이다.[6]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6] 견불사·영운사·영은사라고도 불렀다.[6]

자연도 경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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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도(紫燕島)[7]의 현재 이름은 영종도(永宗島)이다.[8] 자연도가 영종도로 바뀐 것은 조선 효종 4년(1653년),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에 설치한 영종을 자연도로 옮겨오면서 이름도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8] 최근에는 '영종도 중산동 박석공원 일대'가 경원정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8] 박석공원 일대에서 서쪽으로 1.5㎞ 떨어진 곳에서는 안양사터가 발견되었다.[8] 송나라 사신 서긍의 기록에 따르면 수십 채의 막집과 초가집이 들어서 있었다.[8] 1980년대 신공항 건설로 인한 매립 전까지도 바닷물이 들어왔다.[8]

고려 시대 일시적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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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천도 시기에 벽란도는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5] 개경으로 환도한 후 개경이 복구되고 원나라와의 관계가 활기를 띠게 됨에 따라 벽란도도 회복되어 갔다.[5]

도시의 핵심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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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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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대외무역은 송나라를 비롯해 요나라, 금나라, 일본 등 주변 나라들과 광범위하게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려는 중국(특히 송나라)과의 무역을 위해서 두 방면의 무역로를 개척하였다. 하나는 북선항로로 산동의 등주(登州) 방면에서 대동강 하구를 거쳐 옹진항,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다. 다른 하나는 남선항로로 절강의 명주(明州)에서 흑산도서해안의 도서를 거쳐 예성강에 이르는 항로였다. 고려 초기에는 주로 북선항로가, 중후반기에는 주로 남선항로가 무역에 이용되었다. 송나라 상인은 대개 국왕에게 진헌하고 국왕이 하사하는 물건을 받아갔지만, 개인적으로 상거래에 참여하는 일도 흔하였다.[5]

벽란도는 비교적 수심이 깊어 배가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좋은 하항(河港: 하천의 항구)으로서 중국과 일본은 물론 멀리는 아라비아대식국(大食國)과도 교역할 만큼 교역의 대상이 광범위했다. 고려는 무역을 장려하여 각국의 해상선단이 수도인 개경과 가까운 예성강 하구로 몰려들었고,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으로 번창했다. 한국이 '고려'(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진 것도 이 시기에 벽란도를 드나든 아라비아페르시아(이란)의 상인들을 통해 전파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벽란도는 무역과 정치, 유학생 교류 등 다방면의 국제교류에 이용되었으며, 벽란도에서 개경까지 동서로 도로를 닦아 외교 사절들도 이 항구를 이용하였다.

내국인의 국내 이동과 물자 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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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방의 수취물이 대개 벽란도에 도착해 개경의 주인이나 기관에 보내졌다.[5] 국가의 세곡도 조운을 통해 예성강의 벽란도(碧瀾渡)에 도착하였다.[5]

벽란도는 또한 육상 교통에서 개성에서 배천(白川)에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5] 백주에서 벽란도까지 33리이므로 백주에서 개성까지는 69리가 된다.[5] 나루터로써의 벽란도는 국도에 가까우므로 건너다니는 사람이 많지만, 산에 가깝기 때문에 흐름이 빠르고 바다에 연결되기 때문에 이곳을 건너는 것이 어려웠다고 토로하였다.[5]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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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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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이후 고려의 세자는 왕위에 오를 때까지 원나라에서 인질로 잡혀가 있어야 했는데, 유숙(柳淑)은 공민왕이 될 어린 세자를 모시고 20년 가까이 원나라 땅에 있다가 1349년 벽란도를 통해 귀국을 하였는데, 이때 그 감개무량한 정한을 벽란도(碧瀾渡)라는 시로 남겼다.

고려 말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준동 등으로 무역이 크게 위축되었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한양(서울)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가정책적으로 상업을 통제해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성계의 낙마와 정몽주의 격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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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는 가운데,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는 일이 발생했다.[9] 정몽주 등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언관으로 하여금 이성계와 친근한 조준·정도전·남은·윤소종·남재·조박 등을 탄핵하게 했다.[9] 정몽주는 나아가 정도전을 국문하여 '이성계가 왕이 되려한다'는 말을 자백 받으려 하였다.[9] 아예 역모의 죄로 다스리려 한 것이다.[9] 이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휘하 세력을 모으고, 이성계를 병문안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격살하여 상황을 반전시킨다.[9]

수출 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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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자원: 금, 은, 구리,철
  • 자연자원: 잣, 모시, 종이, 인삼, 삼베, 곡식
  • 공예품 : 고려청자, 나전칠기, 화문석, 부채
  • 기구: 문방구( 문방사우 ), 무기

수입 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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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나라: 책, 비단, 자기, 옥, 차, 약재, 악기, 공작새
  • 거란: 털가죽, 말 등
  • 아라비아: 수은, 향신료, 상아, 산호
  • 요나라: 은, 모피,
  •  : 수은, 유황

도시의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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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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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 부근 언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관사(館舍)가 있어 중국 송나라의 사신 일행이 도착하였을 때와 떠나기 전에는 이곳에서 묵었다.[10]

현급으로 행정구역 승격을 노린 경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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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에는 상당수의 송나라 상인이 정착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5] 송인(宋人)으로 고려에 귀화(歸化)해 정착해 사는 이가 꽤 많았다.[5]

벽란도는 국제항으로서 번성하였기에 관원을 배치해 관리하였다.[5] 의종대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縣)으로 승격시키고자 한 것은 이 부근에 다수의 주민이 거처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예성강 주변에 사는 이들은 상업 활동을 통해 상당한 재력을 소지할 수 있었다.[5] 그러한 재력을 바탕으로 이곳을 현(縣)으로 승격시키고자 하였다.[5] 예성강에 사는 이들이 백선연, 왕숙공, 영의에게 뇌물을 주고 이곳을 현(縣)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청탁한 것이 그것이다.[5]

벽란도에는 주점(酒店), 전당포, 숙박시설이 있었으며, 부근에서는 소금을 생산하였다.[5] 벽란도는 군사도시로써의 성격도 띠고 있어서, 방어를 위한 선박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다.[5]

오락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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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도에 있는 동서 벽란정 인근에는 10여 호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송나라 사신 서긍이 언급하였다.[5]

송의 사신이 벽란도에 도착해 하루를 쉬고 그 다음날 개경으로 출발하였으며, 송으로 귀환하는 경우에도 출발 하루 전에 벽란도에 와서 유숙하였다.[5] 그리고 상인의 경우에도 벽란도에 체류하는 기간이 꽤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5]

벽란도는 이처럼 외국인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기에, 그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도 꽤 활기를 띤 것으로 보인다.[5] 사신 서긍이 도착했을 때 만 명의 고려인이 해안가에 늘어서서 맞이하고 있고 또 구경꾼이 담장같이 둘러서 있다고 하였다.[5] 개경에서 온 사람들도 없지 않겠지만 대다수는 벽란도 인근의 주민이었다고 생각한다.[5]

의종대 예성강에 도착한 국왕이 수희(水戱)를 관람하고자 내시 박회준(內侍 朴懷俊) 등에게 명하여 50여척의 배에 모두 채(綵帆)을 걸고, 악공과 기예인, 채붕(綵棚), 어엽(漁獵)의 도구를 싣고서 앞에서 유희를 펼치도록 하였다.[5] 한 사람이 귀신놀이를 하면서 불을 머금었다가 토해내는데 잘못해 배 한 척을 불태운 일이 있었다.[5] 같은 달에 의종은 판적궁지(板積窯池)에 배를 띄우고 수희를 거행할 때 예성강의 뱃사공과 어부를 불러 수희(水戱)를 시연하게 하고서 관람하였다.[5]

주변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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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유호인이 개성을 유람할 때, 벽란도를 거쳐 도착한 견불사(강서사)에 올라 보니 소금 굽는 연기가 멀리 보였다고 한다.[5] 아마 견불사 건너에서 소금을 구웠을 것으로 보인다.[5] 그렇다면 벽란도 인근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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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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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2 1000년 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이 수도 개경을 보고 경악한 이유 | KBS 역사스페셜 20051202 방송. KBS 다큐. KBS. 2026년 2월 12일.
  2. 1 2 문화재의 뒤안길(111)-벽란도 가는 길(서울경제, '21.11.1). 문화재 기고. 국가유산청. 2021년 11월 1일.
  3. 구도 개성 유후사(舊都開城留後司), 세종실록 지리지.
  4. 황해북도>개풍군>신서리, 북한지역정보넷.
  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이병희 (2012). 고려시기 벽란도의 ‘해양도시’적 성격. 도서문화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39: 39–73. doi:10.22917/island.2012..39.39. UCI G704-002045.2012..39.004
  6. 1 2 3 운달산 강서사 (雲達山 江西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년 3월 2일에 확인함.
  7. 인천소개 > 인천역사 > 지명유래 > 영종동 영종도(永宗島). 인천광역시. 2026년 2월 28일에 확인함.
  8. 1 2 3 4 5 6 허우범 (2022년 12월). 高麗圖經에 보이는 慶源亭의 위치 고찰. 도서문화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60: 43–75. doi:10.22917/island.2022..60.43.
  9. 1 2 3 4 5 박현모 (2012년 10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나타난 리더십 모멘트 연구. 한국정치연구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1 (2): 223–246. ISSN 1738-7477. UCI G704-001880.2012.21.2.008
  10. 벽란도 (碧瀾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년 3월 3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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