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러드 필모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밀러드 필모어
Millard Fillmore
밀러드 필모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미국제16대 대통령
(13번째 대통령)
임기 1850년 7월 9일 (승계) ~ 1853년 3월 4일
부통령 공석
전임: 재커리 테일러(제16대)
후임: 프랭클린 피어스(제17대)

미국 미국의의 제16대 부통령
임기 1849년 3월 4일 ~ 1850년 7월 9일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전임: 조지 M. 댈러스(제15대)
후임: 윌리엄 R. 킹(제17대)

출생일 1800년 1월 7일(1800-01-07)
출생지 미국 미국 뉴욕 주 로키
사망일 1874년 3월 8일 (74세)
사망지 미국 미국 뉴욕 주 버펄로
정당 휘그당
종교 유니테리언
배우자 애비게일 파워스
캐롤리나 카마이클 매킨토쉬
자녀 밀러드 파워스 필모어
메리 애비게일 필모어
서명 Millard Fillmore Signature-2.svg

밀러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1800년 1월 7일~1874년 3월 8일)는 미국의 13번째 대통령(1850~53)이다. 휘그당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알려는 테쿰세의 저주가 아닌 대통령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유일한 부통령이며, 노예 제도의 찬성·반대로 의하여 미국이 남북으로 갈라진 1850년에 제13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초기 생애[편집]

뉴욕 주 로키(Locke)에서 6남 2녀 중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나다니엘 필모어는 자신의 행운을 향상시키는 데 희망을 가졌으나 불완전한 타이틀과 함께 자신의 농장을 잃고 말았다. 그러고나서 카유가 카운티로 이주하여 무거운 나무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대지를 임대하였다. 어린 밀러드는 아버지의 농장일을 도왔다.

교육[편집]

밀러드 필모어는 단기적으로 학교를 다녔으나, 읽기, 쓰기, 산수와 지리를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2권의 책 - 성경책찬송가를 소유하였다.

14세 때에 필모어는 제단사의 도제로 보내졌다. 그를 나쁘게 대한 주인은 한번 밀러드를 도끼와 함께 위협하였다고 한다. 그는 새 주인을 찾았으나 1819년 30 달러에 도제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샀다. 같은 해에 그는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유한 사전을 구입하였다. 그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지방 판사들과 공부하면서 교사를 지내다가 1823년 이스트 오로라에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그는 학교에서 침례교 목사의 딸 애비게일 파워스를 만나 1826년에 결혼하였다. 1830년 버펄로로 이주하였다.

정치 경력[편집]

1828년 휘그당을 창당하는 데 도움을 준 올버니의 출판업자 설로우 위드(Thurlow Weed)의 도움으로 뉴욕 주 하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의원 시절[편집]

1832년 필모어는 미국 하원 의원에 선출되어 1833년부터 1835년, 1837년부터 1843년까지 지냈다. 그는 일반적으로 헨리 클레이국수주의에 호의를 가졌다. 웨이즈 앤드 민즈 위원회(Ways and Means Committee)의 의장으로서 필모어는 상품들에 의무를 늘인 1842년 관세의 우두머리 창업자였다.

1844년 뉴욕 주 지사를 위한 선거에 나갔으나 패하여 변호사 실습에 복직하였다. 1846년 버펄로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고, 다음 해에 뉴욕의 감사관으로 선출되었다.

부통령[편집]

1848년 휘그당은 멕시코 전쟁의 영웅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지휘하는 공천 후보에 필모어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미시간 주상원 루이스 캐스, 부통령 후보에 전 국회 의원 켄터키 주의 윌리엄 O. 버틀러를 지명하였다. 선거 운동에서 민주당은 노예 제도 논쟁을 갈라 놓았고, 많은 국민들은 자유 토지주의당을 뽑았다. 테일러와 필모어는 선출 투표의 36 차이로 선거를 우승하였다.

부통령으로서 필모어는 1850년 타협으로 상원을 지배하였다. 7월 9일 테일러 대통령이 사망하자, 필모어는 다음 날에 대통령으로서 선서하였다.

대통령 임기[편집]

업적[편집]

대통령이 된 후, 필모어는 노예 제도에 찬성의 호의에 4번째로 강하게 왔다. 자신의 첫 법령으로서 그는 타협을 위하여 싸우는 데 지도한 남자들과 함께 테일러의 내각을 교환하였다.

9월에 의회는 1850년 타협을 이루는 법들의 연속을 통과하였으며, 필모어는 즉시 서명하였다. 타협은 캘리포니아 주를 자유주로 인정하였고, 유타뉴멕시코의 준주 정부들을 결성하였다. 이 준주들은 자신들이 노예 제도를 인정하느냐에 결정을 둘 수 있었다. 타협은 텍사스 주의 경계적 논쟁을 정착시키고,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노예 무역을 폐지하였으며 더욱 엄격한 도망 노예법을 세웠다.

필모어의 임기 기간 동안에 의회는 기초적 우편 요금을 5 센트에서 3 센트로 줄였다. 1852년 후순에 필모어 대통령은 극동을 탐험하는 데 매슈 페리 제독을 보냈다. 필모어가 대통령 직을 떠난 2년 후에 이 탐험은 일본과 첫 통상 조약의 결과를 가져왔다.

백악관 생활[편집]

애비게일 여사는 영부인으로서 자신의 책임들을 자신의 건강에 무거운 부담으로 찾아냈다. 그녀의 18세 딸 메리는 많은 공무적 업무들을 차지하였다. 애버게일 여사는 백악관에 첫 레인지를 구입하는 데 수배하였다. 그녀는 또한 첫 백악관 도서관을 세웠다. 1851년 의회 도서관이 불타자, 필모어 대통령과 그의 내각은 화재를 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52년 선거[편집]

1852년 휘그당이 대통령 후보를 지명할 때 당은 1850년 타협의 지지자와 반대자로 갈라지고 말았다. 남부인들은 필모어를 성원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북부인들은 그를 거절하였고 뉴잉글랜드에서 온 친 타협 사절단들의 작은 단체는 국무장관 대니얼 웹스터를 성원하였다.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윈필드 스콧 후보가 지명되었으나 선거에서 패하였다.

이후의 일생[편집]

필모어가 백악관을 떠난 지 한달 만에 애비게일 여사가 사망하였다. 필모어는 버펄로에 돌아와 자신의 변호사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1858년 캐롤라인 카마이클 매킨토쉬와 재혼하였다. 남북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많은 정책을 반대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실시한 남부 제주의 재통합에 호의를 가졌다.

1874년 3월 8일 버펄로에서 향년 74세로 사망하여 포리스트 론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