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중국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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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한나라는 동시대 유라시아 대륙의 양극을 점유하고 있었다.

중국로마는 당대에 간접적인 교류를 지속해왔다. 고대 로마한나라는 각각 근동중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상호 간의 접점을 높여왔으나, 인접한 강력한 제국이었던 파르티아쿠샨 제국의 존재 때문에 양자 간의 인지도와 이해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상호 간의 직접적인 교류를 위한 시도의 사례는 소수만이 발견된다. 97년, 중국의 반초가 로마에 사절을 보내려는 시도를 한 사례가 있으며, 로마의 사절로 추정되는 이들이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이 중 한 명은 안토니누스 피우스나 그 후임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재위 시기에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호 간의 간접적인 교역을 통해 두 제국은 각각 비단유리, 그리고 각종 옷감들을 교환하였다.

당대의 자료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로마 측 자료에서 중국과의 교류 여부를 판단하는데는 "세레스(Seres)"라는 단어의 존재가 큰 걸림돌로 작용해 왔는데, 해당 단어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었기에 아시아인들 중 이것이 특히 어떤 대상을 의미하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로마 제국은 "대진(大秦)국"으로 불렸으며, 지구 반대편에 존재하는 중국과의 대척점 정도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에드윈 G. 풀리블랭크는, "상기해야 할 것은, 중국의 "대진국"에 대한 개념은 중국인들의 서방에 대한 신화적 환상과 혼합되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점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외교 관계와 민간 차원의 교류 관계[편집]

아우구스투스 재임 시기의 외교 관계[편집]

로마의 역사가였던 플로루스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재임 시기 중 방문하였던 다수의 사절들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이 중 "세레스"에서 왔다는 사신이 언급되어있다.

"제국의 영향권 내에 들지 않은 세계의 국가들조차 제국의 위엄을 인식하여, 로마인들을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스키타이 인이나 사르마티아 인들도 로마와의 친교를 모색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왔다. 여기에, 세레스 인들 또한 같은 이유로 찾아왔으며, 태양빛 바로 아래에서 거주하는 인도인들 또한 값비싼 보식과 진주, 그리고 코끼리 등의 선물을 들고 방문하였다. 이들은 무려 4년이 걸렸다는 그들의 길고 험난한 여정에 비해 짧기 그지없는 이 순간을 만끽하는데 정신을 쏟는 듯했다. 이들이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이들임을 알기 위해서는 이들의 복잡한 심경을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감영의 방문 기록[편집]

서기 97년, 반초에 의해 파견되었던 중국 측의 사절 감영타림 분지에서 파르티아를 거쳐 페르시아만에 도달하였다. 감영은 메소포타미아 지방 너머에 도달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당시 해당 지역을 점유하고 있던 파르티아 측 인사들로부터 들은 서방으로의 여정은 2년 이상이 걸릴 매우 험난한 길이 될 것이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방의 국가들에 대해 꽤 상세한 기록을 남겼으며, 더 이상의 일정을 포기한 후 중국의 서쪽 변방에 위치한 나라들에 대한 여러 기록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감영은 그가 만났던 항구의 선원들로부터 주로 정보를 얻었으며, 이를 통해 로마 제국(대진국)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후한서에서는, 그 위치를 "해서"인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이는 "서쪽 바다"라는 뜻이며, 당시 로마의 소유였던 이집트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의 바다란 그리스나 로마인들이 페르시아 만, 아라비아 해, 그리고 홍해를 통틀어 일컫는 영역인 에리트라이온 해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영토는 수천 리에 달하며, 일정 거리마다 회반죽을 칠한 우편 배달소를 배치해놓고 있다. 이 나라에는 소나무나 삼나무를 비롯해, 온갖 나무와 식물들이 자란다. 또한 이 나라에는 4백 개가 넘는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들이 있으며, 수십 개의 작은 나라들이 복속되어 있다. 마을을 둘러싼 성벽들은 돌로 만들어졌다."

후한서는 로마의 정치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마치 이상 세계처럼 묘사된다.

"그들의 왕은 평생 통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뛰어난 사람을 골라 왕으로 삼는다. 만약 무시무시한 강풍이나 폭우와 같은 예기치 못한 재난이 나라에 닥치면, 왕은 별다른 예법 없이 신임을 잃고 교체된다. 이렇게 해임된 이는 자신의 좌천을 별말 없이 받아들이며,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정직하며, 중국인들과도 흡사한데, 이것이 이 나라가 "대진국"이라 불리우는 이유다... 이 나라의 토지에서는 대량의 금, 은, 그리고 밤중에도 빛나는 것과 같은 희귀한 보석들이 산출된다... 그들은 금실로 수놓은 식물성 섬유로, 여러 색상을 가진 태피스트리와 다마스크를 만들어 내며, 금으로 칠한 천과 불에 씻은 천(석면포)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기록은 중국이 당시 로마 제국을 서방을 주도하는 경제 대국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외국에서 온 모든 진귀하고 다양한 물품들은 모두 이 나라에서 난 것이다."

또한 후한서의 저자인 범엽인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영원 9년(기원전 97년), 반초가 보냈던 수하 감영이 서역의 바다에 도달한 뒤 귀환하였다. 전대의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산해경에서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명백히, 그는 그들의 관습에 대해 기록하고, 그들의 진귀하고 희귀한 물산에 대해 조사하였다. 후에, 맹기와 두락 등 머나먼 나라들이 복속하고 조공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었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