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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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조직으로 나뉘었다. 중앙군은 2군과 6위로, 지방군은 양계(兩界)[1]의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중앙군[편집]

태조의 직속군이 근본이 되어서 편성되었다. 2군(二軍)은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을 말하며, 6위(六衛)는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를 말한다. 6위는 대체로 성종 14년(995)에 정비된 듯하다. 2군은 6위보다 우위에 있었고 왕의 친위군 역할을 한 일변, 6위 중에서 핵심을 이룬 좌우위·신호위·흥위위 3위는 수도 개경의 수비는 물론 변방을 대상으로 한 경술(更戌)의 임무까지도 띠고 있었는데 금오위는 치안, 천우위는 의장(儀仗), 감문위는 궁궐 안팎 제문(諸門) 수위를 임무로 하였다.

2군·6위에는 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과 부지휘관인 대장군(大將軍)이 있었고 이 상장군과 대장군은 자문 기구인 중방을 구성했다. 고려 전기 중방의 기능은 불확실하지만, 최고 문반 관서 아래 직속된 최고 무신의 모임이라서 권력을 향한 특별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2]

2군·6위는 모두 약 10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영(領)으로 구성되었다. 각 영의 지휘관은 장군(將軍)이었고 이 장군들은 회의 기구인 장군방(將軍房)을 구성했다. 영은 병종(兵種)에 따라 보승(保勝)·정용(精勇)·역령(役領)·상령·해령(海領)·감문위령(監門衛領)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합해서 45령이 있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고려의 정규 중앙군의 규모는 약 45,000명이 된다. 이후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장군이 지휘관인 왕의 친위대인 충용위(忠勇衛)[3]가 신설되었고 4령이 있었다.

2군과 6위는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세습되었다. 군공을 세워 지위를 무신으로 상승하게 할 수 있는 중류층이었으나 차츰 토목 공사에 동원되거나 군인전을 지급받지 못하자 몰락하거나 도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품계 2군(二軍) 6위(六衛) 충용4위(忠勇四衛)

공민왕때 친위부대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정3품 상장군 상장군
종3품 대장군 대장군
정4품 장군 장군 장군
종4품
정5품 중랑장 중랑장 중랑장
종5품
정6품 낭장 낭장 낭장
종6품 장사
정7품 별장 별장 별장
종7품
정8품 산원 산원,녹사 산원
종8품
정9품 위장
종9품 수정 수정 수정

지방군[편집]

광군[편집]

광군(光軍)은 고려에서 조직된 최초의 전국에 걸친 군사 조직이다. 이것은 지방 호족들의 군대를 연합하여 중앙에서 통제해 나아가게끔 조직되었다. 이것은 곧 중앙 조정과 지방 호족에 의한 농민 역역(力役)의 공동 지배하에 된 조직이었다.

정종 2년(947) 요[4]의 침입에 대비코자 조직된 듯한 광군은, 고려의 집권화 정책이 진전되어 지방 제도가 정비되는 추세에 따라 주현군(州縣軍)으로 개편되어 더 강력한 중앙 조정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전국의 광군 조직을 통제하는 통수부(統帥部)로는 광군사(光軍司)가 설치되었다.

주진군과 주현군[편집]

고려 때 2군·6위의 중앙군(中央軍) 외에 각 주·현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군으로 주현군(州縣軍)과 주진군(州鎭軍)이 있었다.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지방 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초기에 조직된 광군이 주현군으로 개편되었다. 즉 주현군은 지방 호족의 병력을 흡수한 일변, 중앙에서 지방에 배치한 군대가 지방군화(地方軍化)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듯하다.

주현군은 도(道)와 계(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계는 국경 지대의 군사 지역이었기에 그 행정 단위인 진(鎭)마다 초군(抄軍)·좌군(左軍)·우군(右軍)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이 주둔했고 진에 주둔했으므로 주진군으로도 불렀다. 이들은 일단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싸울 수 있는 둔전병(屯田兵)다운 상비군이었다. 각 도의 주현군은 보승·정용·1품(一品)으로써 구성되었는데 보승·정용은 치안·방술(防戌)의 역(役)을 부담했고 일품군은 공역(工役)에 동원되는 노동 부대였다. 이때 주진군은 좌군·우군·초군으로 구성되어 국경 수비를 맡았고 주현군은 지방의 치안이나 노역에 동원되었다.

군호[편집]

군호(軍戶)는 고려 시대의 군대 편성 중 하나이다.

고려 초기부터 있었던 듯한데 군호는 군인과 양호(養戶)로 구성되었다. 이들에게는 군인전이 지급되어 2인의 양호로 하여금 이것을 경작하여 군인의 장비와 생활비를 제공케 하였다. 군인에 결원이 생기는 때는 선군(選軍)하여 보충하였는데 선군하면서 군호로 만들어 군인전을 주었다. 이 선군은 백정과 같은 농민 중에서 젊고 용력 있는 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나 천민도 많이 뽑혔고 이것은 군인의 사회 신분을 저하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각주[편집]

  1. 고려 초에서 조선 초까지 설정됐던 특수 지방행정 구역인 東界와 北界의 合稱으로서 시기별로 관할지가 增減됐으나 대체로 東界는 咸鏡道와 강원도의 일부 지역, 北界는 평안도에 해당된다.
  2. 『Generals And Scholars: Military Rule In Medieval Korea』, Edward J. Shultz, University of Hawaii Press (June 2000).
  3. 恭愍王이 전개한 反元 運動을 추진하려는 무력 역량으로서 1356년 11월에 신설된 忠勇衛는 四衛로 구성됐고 衛마다 장군 일 인, 中郎將 이인, 郎將 이 인, 別將 오 인, 散員 오 인, 尉長 이십 인, 隊長 사십 인이 배치된 아래 배치된 군사의 규모는 미확인됐다. 주 임무는 궁성 宿衛이고 기타 외적에 침입당하면 개경 주위 수비에 동원되기도 했다. 1357년에 강화도 喬桐을 침범한 倭寇를 방어코자 출병한 적도 있으나 1361년에 紅巾賊에 의해 개경이 陷落되고 왕이 福州로 播遷하기에 이르자 翌年에 폐지론이 擡頭키도 한 후 忽赤와 더불어 愛馬라 불리면서 세력을 믿고 많은 폐단을 惹起해서 폐지론이 수차 대두했다. 1389년 恭讓王 1에는 愛馬의 弊害와 二軍 六衛 制度의 有名無實을 거론하고 神虎衛에 合兵을 憲司에서 奏疏한 적이 있었으나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했다. 1392년 태조 1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十衛가 정비될 때에도 잔존한 후 군사 제도가 더 정비되면서 태종 때에 폐지된 듯하다.
  4. 遼는 10세기에서 12세기에 契丹이 중원 북방의 內蒙古를 중심으로 세운 정복 왕조로서 916년 건국 당시 명칭은 契丹国이었지만, 938년 燕雲十六州를 획득하고서 遼라 개칭했다. 1125년 女眞에 세운 金(1115-1234)에 멸망됐지만, 耶律大石이 중앙아시아에 西遼(1132-1218)를 건국해 1218년 成吉思汗(1155-1227)의 蒙古에 병합될 때까지 존속됐다. 所謂 東胡系 유목민인 鮮卑 一派로서 그 명칭은 4세기 전반부터 史書에 등장한 契丹은 內蒙古 자치구의 江 Sira Muren 유역에서 유목했고 주요한 부족 8개로 나뉘었다. 9세기 후반 唐(618-907)의 정치상 혼란을 틈타 세력이 강성해졌고 907년 契丹 제 부족을 통합해 可汗이 된 迭刺部의 태조 耶律阿保機(在位 907-926)는 자신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서 916년 天皇帝라 자칭하면서 契丹國을 세운 후 漢人인 康默記·韓延徽·韓知古를 등용해 체제를 정비하고 918년 上京臨潢府(現, 遼寧省 巴林左旗)를 건설해 도읍으로 했으며, 920년에는 契丹大字를 창제해 보급했고 Tangut와 Uighur를 제압해 外蒙古에서 東투르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으며, 926년에는 渤海(698-626)를 멸망케 해 全 만주를 장악했다. 耶律阿保機를 계승한 太宗(재위 926-947)은 중원 經略에 매진해 萬里長城 이남으로 영역을 넓혔다. 936년 後唐(923-936) 河東節度使 石敬瑭(892-942)이 신하를 刺靑하고 歲貢을 바쳤고 燕雲十六州를 넘기는 조건으로 군사 지원을 요청한 石敬瑭은 契丹의 군사 지원에 힘입어 반란해 後唐을 멸망케 하고 後晉(936-947)을 세웠다. 그 보상으로 長城 이남의 燕雲十六州를 차지한 契丹은 938년 그곳의 漢人들을 회유하고자 민족 색채가 강한 國名 契丹國을 大遼로 개칭했다. 태종은 연호도 會同으로 하고 漢人들을 통치하고자 契丹의 관습에 따라 통치하는 北面官과 唐의 군현제를 模倣해 漢人을 통치하는 南面官을 만들었지만, 942년 石敬瑭을 이어 後晉의 황제가 된 出帝가 契丹에 反旗를 들면서 944년부터 後晉과 거란이 전쟁했다. 947년 태종은 군대를 직접 이끌고 남하해 後晉의 수도인 開封을 점령하고 後晉의 국호를 大遼로 바꾸고 연호도 大同으로 했지만, 병사들의 약탈 탓에 민심을 잃어 漢人들이 거세게 저항해 결국 漢地 지배에 실패하고 결국 철군했다. 太宗 歿後, 世宗(재위 947-951)·穆宗(재위 951-969)·景宗(재위 969~982)이 황위에 차례로 올랐지만, 황위 계승을 둘러싼 內訌 탓에에 世宗과 穆宗이 피살되는 정치상 불안정한 상황이 持續됐지만, 聖宗(재위 982~1031)에 이르러 遼는 정치상 안정을 회복하고 동아시아 최고 강국으로 맹위를 떨쳤다. 聖宗은 12살에 황제가 되어 1009년에서야 親政했는데 攝政한 蕭太后는 대규모 개혁해 국정을 쇄신했다. 법전을 편찬해 공포하고 과거를 실시해 인재를 등용했으며, 佛經을 編修해서 불교 문화가 발달했다. 993년 蕭遜寧에게 高麗를 침략케 해 배후를 다지고서 1004년에 宋(960-1279)을 親征해 유리한 조건으로 和約했다. 당시 宋과 遼는 澶淵에서 和約해 이것을 澶淵之盟이라고 하는데 宋은 매년 遼에 銀 십만 兩과 緋緞 이십만 匹을 歲幣로 바쳤다. 和約 후 遼는 宋에서 획득한 歲幣로 재정이 풍족해졌고 宋과 무역해서 경제와 문화가 隆昌했다. 聖宗은 親政한 후에도 정치·군사 부문 개혁을 꾸준히 추진해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여 遼는 만주와 華北 일부를 차지하고 高麗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정복 왕조를 달성했다.

가고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