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사 (서울)

개운사
개운사 정문
종파대한불교조계종
건립년대1396년
창건자무학대사
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9호
소재지서울특별시 성북구 개운사길 73
좌표북위 37° 35′ 24″ 동경 127° 01′ 42″ / 북위 37.59000° 동경 127.02833°  / 37.59000; 127.02833

개운사(開運寺)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5가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1]

위치[편집]

안암산 자락에 위치한 절로 조선 건국 초기에 무학이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부른 것이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조선 정조 3년에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 홍씨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자 이곳에 묘소를 정해 명인원을 세우게 되었다. 이에 승려 축흥이 절을 동쪽으로 약간 옮겨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 영조 6년에 이미 영도사가 이전된 것으로 기록된 문헌도 있어 영도사가 개운사로 이름을 바꾸게 된 시기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무학대사의 영도사가 있던 자리에는 고려대학교 이공대학이 자리잡고 있다.

흔히 ‘불교개혁의 근원지’, ‘불교교육의 근본도량’으로 불린다.[2] 20세기에 들어서 한국 불교의 개혁 세력을 대표해 왔기 때문이다. 1926년에는 박한영이 머물렀고, 개운사의 암자인 대원암에는 탄허가 머물면서 불경 번역 작업을 했다. 1981년부터는 불교 교육의 중심지인 중앙승가대학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경기도 김포시로 이전한 중앙승가대학 교사는 현대식 건물로 세워져 있다. 절 동쪽 골짜기에 있는 암자 보타사 뒤의 암벽에 있는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은 대한민국의 보물 제1828호로 지정되어 있다.[1]

전해오는 이야기[편집]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이다. 1396년(태조 5) 무학(無學)이 현재 위치의 근처에 창건하여 영도사(永導寺)라고 하였으며, 1779년(정조 3) 정조의 후궁인 홍빈(洪嬪)의 묘 명인원(明仁園)이 절 옆에 들어서자 인파(仁波)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개운사라 개명하였다.

1873년(고종 10) 명부전을, 1880년 이벽송(李碧松)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1912년 일제의 사찰령 시행에 따라 봉은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로 지정되었고 김현암(金玄庵)이 제1대 주지로 부임하였다.

1926년 김동봉(金東峰)이 강원을 개설하였고 1929년 권범운(權梵雲)·신영산(申靈山)이 독성전을 중건하였다. 1932년 이벽봉(李碧峰)이 노전을 짓고, 1935년 권범운이 칠성각을 지었다. 1980년 이전에는 조계종종정의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총무원이라는 간판을 걸었고, 1993년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현재 경내에는 1981년 이전해온 승려들의 교육기관인 중앙승가대학(中央僧伽大學)을 비롯하여, 대웅전·지장전(地藏殿)·칠성전·독성각(獨聖閣)·종각·선방(禪房)·자비관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선방은 서울근교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대각루(大覺樓)라는 명필 현판이 걸려 있다.

산내 암자로는 동쪽 200m 지점에 대원암(大圓庵)과 칠성암이 있다. 1845년(헌종 11) 우기(祐祈)가 창건한 대원암은 근대의 고승인 박한영(朴漢永)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 석학들을 배출하였고, 1970년대에는 선사 탄허(呑虛)가 주석하면서 역경사업에 종사한 곳이기도 하다.[1][3]


기타[편집]

일제강점기1945년 3월 31일 당시 개운사 경내에 참정권 운동가인 민원식의 묘소가 있었다.[4] 민원식의 묘소는 8.15 해방 혹은 6.25 전쟁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관련 문화재[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한국사찰전서』 상(권상노,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명산고찰을 따라』(이고운·박설산, 우진관광문화사, 1982), 『전통사찰총서』 4(사찰문화연구원. 1994) 참조
  2. “개운사”. 성북구청. 2016년 9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6월 5일에 확인함. 
  3. “개운사 연혁”. 개운사. 2008년 5월 3일에 확인함. 
  4. "參政先驅者追憶 故閔元植氏墓前 政治處遇報告祭", 매일신보 1945년 3월 31일자, 2면 6단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