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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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
세자빈
재위 1400년
전임 덕빈 김씨(정안왕후)
후임 (실제) 숙빈 김씨(수성부부인)
(법적) 경빈 심씨(소헌왕후)
왕비
재위 1400년 ~ 1418년
전임 정안왕후
후임 소헌왕후
왕대비
재위 1418년 ~ 1420년
전임 정안왕후(순덕왕대비)
후임 정순왕후(의덕왕대비)
이름
별호 정녕옹주, 정빈, 정비, 후덕왕대비
신상정보
출생일 공민왕 14년(1365) 7월 11일
출생지 송경(松京) 철동(鐵洞) 사저
사망일 세종 2년(1420) 7월 10일
사망지 수강궁 별전
부친 여흥부원군 민제
모친 삼한국대부인 송씨
배우자 태종
자녀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세종)
성녕대군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능묘 헌릉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년 7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420년 8월 18일 (음력 7월 10일))는 조선 태종(太宗)의 왕비이자 조선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모후이다. 별호정비(靜妃), 시호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이다.

여흥부원군 문도공 민제(驪興府院君 文度公 閔霽)의 둘째 딸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남편 태종이 왕이 되는 데 막대한 역할을 했으나 후일 남편에 의해 친정이 멸문당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조선 왕조에서 정희왕후, 문정왕후와 더불어 가장 정치적인 왕비이며, 성격 또한 담대하고 괄괄하였다.

생애

개경 철동에서 태어났다. 18세인 1382년에 황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 이성계의 5남이자, 아버지 민제의 제자인 이방원과 결혼하였다. 그는 결혼 후 10년 동안 위화도 회군, 정몽주의 피살, 고려의 멸망 등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목도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그 해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책봉되고, 태조가 계비 신덕왕후의 입김으로 불과 11세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담대한 민씨는 옆에서 남편 이방원에게 정변을 부추겼으나 이방원은 부왕인 태조를 건드리기 싫어서 계속 주저하였다.

1398년, 당시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정도전은 사병 혁파법을 강행하여 모든 사병과 무기를 국가에 회수하였으나 민씨는 자기 집의 무기들을 숨겨놓았다. 얼마 안가 태조가 와병하게 되자 민씨는 이 틈을 노려 이방원에게 무기를 주며 반정을 독려하였고 그에 이방원은 처남들인 민무구·민무질 등과 궐기하여 세자 방석, 방번과 신덕왕후의 사위 이제 그리고 정도전, 남은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니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방원은 책임을 무마할 시간을 벌기 위해 생존한 형들 중 가장 위인 둘째 형, 영안군 방과[1]를 세자로 모시고 곧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정종이다.

그러나 이방원의 바로 윗형인 회안군 방간은 이방원에 대해 못마땅히 여기고 권좌를 차지할 욕심을 내었다. 민씨 가문은 민제를 필두로 사위 이방원을 빨리 왕위를 승계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방간은 박포의 부추김으로 1400년 음력 2월에 거병하였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도중에 자신의 사가의 말이 홀로 오자, 자신이 창을 들고 나가서 남편과 함께 싸우다 죽겠다고 일갈한 일화가 있다. 이를 진압한 정안군세자[2]로 책봉되자 정빈(貞嬪), 그해 음력 11월에 남편이 결국 보위에 오르자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어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왕비가 되자마자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민씨는 자신이 태종과 같이 공동으로 집권했다고 생각했는데, 태종은 이에 회의적이었다. 거기다가 처남들인 민무구·민무질 등이 이미 정계와 군 등에서도 높은 작위를 받고 세자 제와 친하게 지내자 태종은 이들이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정사를 농단할거라 여겨 이를 몹시 경계하였다. 더군다나 태종은 왕이 되고나서 축첩이 심하였는데 이로 인해 민씨와 언쟁이 심하여, 한동안은 태종은 아예 민씨가 있는 교태전에 가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1406년 태종은 양위를 하겠다가 선언하다가 곧 철회했는데 이 과정에서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양위 소식에 매우 기뻐하였다 하여 이들을 제주도에 유배하였다가 1410년에 이들을 사사(賜死)시켰다. 아들들의 유배 생활에 마음고생이 심하던 부원군 민제도 1408년에 쓸쓸히 사망하였다.

1416년에는 민제의 3남 민무휼과 4남 민무회가 세자 제에게 외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 말이 일파만파로 번져, 태종은 이들 역시 유배시켰다. 얼마 안가 민씨가 잠저 시절에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와 그녀의 소생 경녕군을 학대했다는 소문이 퍼져서 분노한 태종은 민씨를 왕비에서 폐위시키는 대신에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교살시켰다.[3] 1418년에 세자 제가 폐위되어 양녕대군에 책봉되고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이를 형제간의 분란으로 보고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 해에 태종이 세자 도(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자, 민씨도 왕대비가 되어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존호가 올려졌다.

남편을 왕으로 만들었지만, 그 대가로 남동생들이 숙청당한 비극의 여인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에 수강궁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 내에 위치한 헌릉(獻陵)이며, 남편 태종과 쌍릉을 이루고 있다.

가족

원경왕후가 등장한 작품

주석

  1.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1392년 음력 8월 7일 2번째 기사. 이 기사에는 여러 왕자들을 군으로 봉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따라 신의왕후의 소생인 1남 이방우는 진안군으로, 2남인 이방과는 영안군으로, 3남 이방의는 익안군으로, 4남 이방간은 회안군으로, 5남 이방원은 정안군으로, 신덕왕후의 소생인 7남 이방번은 무안군으로 각각 봉해진다. 8남 이방석은 군이나 대군의 칭호 없이 바로 세자로 임명된 것으로 보여진다.(신의왕후 소생의 6남 이방연은 요절하였고, 훗날 덕안대군에 봉해졌다.)
  2. 조선왕조실록 정종 3권, 1400년 음력 2월 4일 1번째 기사. 이 기사에는 정종정안군을 세자로 삼고 책무를 보게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세제로 칭함이 옳다는 의견이 제기되자, 정종은 이제부터 정안군을 아들로 생각할 것임을 선언해 논란을 마무리한다.
  3. 조선왕조실록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임
정안왕후
조선 역대 왕후
1400년 음력 11월 28일 ~ 1418년 음력 8월 10일
후임
소헌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