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규 (18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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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규(金洪奎, 1876년 ~ 1959년)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율재(栗齋)이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참가하였던 김홍규는 천도교 신자로, 당시 천도교가 월보 인쇄 등을 위해 직영하던 보성사(普成社)의 공장 감독이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지시에 따라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한 인쇄소 공장에서 인쇄공 신영구로 하여금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를 인쇄하도록 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전해오는 이야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이자 학자로 유명한 탄허(呑虛) 김금택(金金鐸)의 부친으로 알려져 있다. 김홍규는 증산교의 계통의 신흥종교, 보천교, 태을교 등에 깊숙하게 참여한 인물로 차경석(증산교 창시자 강일순의 처 사촌)을 보좌하는 목방주(木方主)로 활동하였으며 후에 천도교로 개종하였다.

참고자료

같이보기

각주


기타

탄허의 부친은 항일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김홍규(金洪奎)인데 같은 독립운동가 김홍규(金弘圭)의 혼동으로 기록의 혼란을 주고 있다. 현재 인물 백과사전에도 오류를 보이고 있는데 이곳은 탄허기념관의 자료를 바탕으로 수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