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보천교(普天敎)는 강증산의 고제였던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이 증산이 죽은 후 최초로 형성한 교단이다.
차경석은 증산의 사후 처음에는 증산의 제2부인인 고씨(高氏)를 교주로 받들었으나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분립하여 스스로 후천개벽의 문로가 자기에 의하여 열린다고 자부하고 교단을 세워 1921년에는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명과 '시국(時國)'이라는 국호를 선포했으며 1922년에는 교명을 보천교로 바꾸었다. 또한 보천교는 교화 방식에 60방주(方主)라는 강력한 조직을 갖추어 한때 전국(당신 인구 수 약 2000만명)에 걸쳐 신도수가 600만에 이른 때도 있었다. 당시 그는 정읍(井邑)에서 조선을 종주국으로 하고 정교 양면에서 세계통일의 신정부가 세워질 것이라 선전하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정감록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등극하여(등극설), 그 권위를 시현하기도 했으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자체 내의 분열 등으로 쇠퇴하였다.
차경석이 죽은 후 보천교에서는 신파·구파의 분열이 일어났다. 차경석의 교의를 신봉하고 그를 보천교의 교조로 받드는 신파와 증산을 교조로 하고 차경석을 교주로 보는 구파는 차경석 생존시부터 세력이 나뉘어 있다가 1954년에 성서간행(聖書刊行)과 교주의 영위본안(靈位奉安)을 둘러싸고 충돌하여 완전히 분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