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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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사건(二二八事件)은 1947년 2월 28일 중화민국 정부 관료의 폭압에 맞서 타이완의 다수 주민인 본성인(本省人)들이 일으킨 항쟁을 말한다.

사건의 배경과 시대적 상황

일본의 식민 지배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으로 만주, 타이완 섬(臺灣島)과 펑후 제도(澎湖諸島)는 일본제국(日帝)에 할양되었다. 일제는 타이완 총독부를 설치하여 50년간 타이완을 식민지배했다.

중화민국 반환 이후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고 그 해 10월 17일 국민혁명군타이완에 상륙함으로써 중화민국타이완 섬펑후 제도를 영토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이 집권하던 중화민국 정부는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國共內戰)으로 인해 타이완에 정예 관료나 군인을 보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행정단위인 성(省)을 설치하는 대신 천이(陳儀)를 타이완 성의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으로 임명해 이 곳을 국민혁명군의 군사점령지역처럼 관리했다. 타이완에 대한 군사통치는 현지 주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기는커녕 일제의 식민통치행태를 답습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1]

본성인들과 외성인들의 대립과 분열

이 과정에서 타이완 사회는 종전부터 타이완에 살고 있었던 본성인(本省人[2])과 1945년 광복 이후 중국 대륙에서 새로 이주해온 외성인(外省人[3])이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계층 간의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겪게 된다. 특히, 일제(日帝) 식민통치자들이 빠져나간 관직을 대부분 외성인(外省人) 출신자들이 차지하면서 정치구조의 상부를 외성인들이 독점하고, 본성인들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지방정치체제에 참여하는 독특한 정치구조가 만들어졌다.[1]

본성인에 대한 차별

1946년 당시 통계에 따르면 최고위직은 모두 외성인들이 차지하였고, 천임(薦任) 이상의 중상위직에 임명된 본성인(本省人)의 수조차 전체의 20%에 미치지 못했다. 본성인들은 외성인의 절반에 불과한 월급을 받았는데, 이는 일제 식민시기에 본성인이 일본인 월급의 60%를 조금 넘게 받았던 것보다도 더 극심한 차별이었다. 또한 식민지 시기 일본인 가옥들을 외성인이 대부분 차지하면서 외성인과 본성인 사이에 거주지역의 구별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국공 내전 막바지에 국민당과 함께 타이완으로 옮겨 온 약 60만의 하층계급 군인들이 도심 주변에 거주하게 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들은 1949년 이후 타이완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유지시킨 국민당의 절대적 지지기반이 되었다.

1949년 미국 국무부에서 나온 《중국백서》에 따르면 "정복자의 지배가 다시 시작되었다"라는 인식이 타이완 사회 내부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1]

사건의 원인

1945년 10월 25일 타이완 주둔 일본군은 중화민국 소속 국민혁명군에 정식으로 항복하였고, 이날부터 타이완은 중화민국의 영토로 복귀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받던 타이완 주민들은 새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들의 통치는 본토에서와 다르지 않았고, 일제(日帝)의 식민통치만큼 가혹했다.

신임장관(천이)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대만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미국무부, 중국백서

외성인(外省人)에 비해 본성인(本省人)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요직은 장제스(蔣介石)를 위시한 외성인들이 차지했고, 정부가 본성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정책을 펴자 주민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계엄령을 통해 타이완을 억압하기만 할 뿐 타이완의 민심에는 관심이 없었고, 타이완을 대륙에서의 전쟁을 위한 일종의 군사기지처럼 취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이완의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고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팽배하였다.[1]

발단

1947년 2월 27일 밤, 타이베이(臺北)시 위엔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정부의 전매(專賣)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인이 허가받지 않고 담배노점을 벌였다는 이유로 담배주류공사의 직원과 경찰에 의해 단속되었다. 탈세를 빌미로 담배주류공사의 단속반원이 담배를 팔던 여인을 상대로 총신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심한 구타를 가하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과격한 단속행태에 항의하면서 충돌이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항의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였고, 경찰이 쏜 총에 학생 한 명(陳文溪)이 사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사건의 경과

1947년 2월 28일, 타이완 시내에서 시위하는 시위대

1947년 2월 28일,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발포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타이완에 들어와 있던 중화민국 경찰과 군부대 본부를 에워싼 채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타이완 경비총사령 천이(陳儀)는 시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시위를 빌미로 타이베이시에 임시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급기야 경찰서에 난입, 경찰들을 구타해 경찰관이 사망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천이의 집무처로 밀려든 시위대를 향해 군(軍)이 기관총소사를 퍼부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시위는 타이베이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분노한 시위대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타이완 전 주민이 궐기할 것을 외쳤다. 이것이 이른바 '2·28사건'이다. 2월 28일 당일에는 타이베이 시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었고, 3월 1일 이후 시위는 타이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년 반 동안 쌓인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봉기는 삽시간에 대만 전역에 퍼지고 3월 2일, 타이완의 지식인들은 각지에 '2·28 처리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타이베이시 참의회는 사태 해결을 위해 당일 오후 2시에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의회에서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담배 단속 살인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타이완 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 천이는 방송을 통해 다음 4개 사항을 공표하였다.

  1. 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2. 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3. 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4. 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같이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 폭동 문제를 처리토록 한다.

무차별 발포를 한 군·경을 대신하여 학생과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 봉사대가 치안을 유지하고 처리위원회의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3월 4일 이후 사태는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처리위원회에 대한 타이완 주민들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그 권위가 높아지자, 처리위원회는 2·28 사건에 대한 수습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이를 타이완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조 요구'로 구체화시켰다.

진압과 학살

국민당군에 의해 학살당한 타이완 시민

타이완 내의 병력만으로는 시위의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천이는 주민들을 상대로는 타협적인 제스처를 보이며 시간을 벌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장제스에게 대륙에 있는 국민혁명군의 조속한 증파를 요청했다. 국공내전 중이었음에도 장제스는 폭동이 정부 전복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천이의 보고에 따라 3월 8일 증원군을 타이완에 파견했다.

국민혁명군의 증원군이 도착한 1947년 3월 8일부터 타이완에서는 대대적인 유혈진압이 시작되었다. 당일 새벽 두 시에 타이완 북부에 투입된 국민당 군 21사단은 곧바로 타이베이시에 진입해 시위대 진압을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본성인 사상자가 속출하고 본성인 출신 지식인과 2.28 사건을 수습하고자 모였던 주민대표자들 상당수가 살해, 체포 또는 실종되었고 일부는 도망쳤다. 진압은 10여 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본성인(本省人) 약 3만 명이 살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3월 8일 가오슝(高雄), 3월 11일 지룽(基隆), 타이난(臺南), 3월 12일 자이(嘉義) 등에 진입한 국민당의 경찰과 계엄군은 타이완 본성인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러한 대규모 살육과 약탈은 3월 17일 국방부장 바이충시(白崇禧)가 대만에 도착하여 조율에 나선 후 3월 21일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진압과정에서의 학살과 약탈로 인해 타이완은 섬 전체가 초토화되었고, 장제스는 '2.28 사건 처리 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하고 위원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했다. 결국 2.28 사건은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사건 이후

2·28 사건 공원내에 있는 2·28사건 기념관.

이 사건은 사건 발생 후 40년동안 언급하는 것 자체가 최대의 금기처럼 여겨졌다. 국공내전에서 패퇴한 중국 국민당1949년 12월에 중화민국 정부를 난징에서 타이베이로 옮겨왔다. 그러나, 이미 내전의 패색이 짙던 1949년 5월 1일 타이완 섬 전체에 걸쳐 총호구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같은 달 21일에는 계엄령을 발표하였다. 그 해 말부터 위험분자로 간주된 이들이 대거 체포됐다. '타이완을 보위하고 대륙을 공격한다'(反攻大陸)는 총 구호하에서 내전을 반대하거나 국공 평화회담을 주장하거나 평화 건설과 민생 문제를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나 언론은 무조건 공산당 간첩, 파괴분자, 음모분자로 간주되었다.

1949년 5월 21일 타이완 전역에 발포된 계엄령은 38년동안 계속되다가 1987년 7월 15일이 되어서야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명령으로 해제되었다. 계엄령이 지속되면서 금기 중의 금기가 되어버린 이 사건은 1988년 타이완 출신인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오랜 논란을 거쳐 1995년 리덩후이 총통이 국가차원에서 희생자 가족에게 사과하였고,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기념공원이 세워졌다.

아직도 2.28 사건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었다. 1991년 리덩후이 총통의 지시로, 이듬해 행정원이 발표한 「2·28 사건 연구 보고」에 따르면 2·28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3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사건은 '국부(國父)'격인 장제스가 직, 간접적으로 연루된 사건이라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실제로 사건 발생 60주년인 2007년에는 장제스가 이 사건의 학살을 지시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4] 타이완에서 진보성향이거나 민주진보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장제스를 기념하는 기념관인 중정기념당을 폐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5]

관련 영화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의 1989년작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는 2·28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4형제가 모두 죽거나 행방불명되는 비극적 가족사를 통하여 2·28사건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혼란을 보여준다.

각주

  1. 유용태,박진우,박태균 공저.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2》. 창비. ISBN 978-89-364-8258-9.  p178~p180
  2.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계 원주민(타이완 인구의 약 1.7%)과 ·시대에 주로 푸젠 성(福建省) 및 광둥 성(廣東省)으로부터 이주 정착한 한족계 주민(타이완 인구의 약 85.3%)을 말한다.
  3. 1945년 일제 패망 이후에 이주한 한족, 1949년 국민당국공내전에서 밀리면서 정권을 따라 중국 각지에서 이주한 한족(타이완 인구의 약 13%)을 말한다.
  4. 대만 '2.28사건' 60주년..천총통 "장제스가 원흉"
  5. 장제스 '살아서는 대만으로, 죽어서는 대륙으로(?)'

참고서적

  • 유용태,박진우,박태균 공저.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2》. 창비. ISBN 978-89-364-8258-9.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대명출판사. ISBN 978-89-86883-72-5. 

같이보기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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