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아시안 게임
제8회 아시안 게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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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개요 | |
개최 도시 | 태국 방콕 |
참가국 | 25개국 |
참가 선수 | 3,842명 |
개회식 | 1978년 12월 9일 |
폐회식 | 1978년 12월 20일 |
성화 점화 | 1978년 12월 9일 ~ 12월 20일 |
주경기장 | 수파찰라사이 경기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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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테헤란 | 1982 뉴델리 |
1978년 아시안 게임은 당초 싱가포르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1973년 10월 싱가포르가 재정상의 문제로 개최권을 반납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재정적 후원을 얻은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가 개최권을 이양받았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재정 지원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이슬라마바드는 1975년 5월 파키스탄의 정치적 불안과 재정난을 이유로 개최권을 반납하였다.
결국 아랍 산유국들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경기 연맹 회원국들의 재정 지원(약 265억 달러) 약속을 받은 타이의 수도인 방콕에서 아시안 게임을 열기로 결정하였다. 1978년 12월 9일부터 12월 20일까지 열렸고 25개국 3,842명의 임원 및 선수가 참가하였다.
대회 이모저모
- 개최국 태국은 자국의 메달 획득에 유리한 볼링과 요트 종목을 추가하고 불리한 유도 종목을 뺐다.
- 개회식 실황중계에서 북한의 입장시, 남한의 TV에서 이를 자막으로 화면을 막고 북한 선수들의 입장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하여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 북한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리호준 사격 선수가 출전하였다.
- 중동 아랍 국가들의 실력 행사로 이스라엘은 아시아 경기연맹에서 축출되어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 이란은 자국의 소요사태와 정치불안으로 불참하였다.
- 일본과 말레이시아의 남자농구 경기의 부심으로 지명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라복만 부심이 대한민국의 이재덕 주심과 함께 심판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경기를 보이콧하였고 결국 라복만 부심은 태국 출신 부심으로 교체되었다.
- 대회 마지막날에 열린 남자축구 결승전에서 대한민국(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연장 포함 120분 동안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0-0 무승부를 기록하여 공동우승을 차지하였다. 이 경기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한 축구대결이었다.
메달 집계
1978년 아시안 게임 메달 집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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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나라 | 합계 | |||
1 | 일본 | 70 | 58 | 49 | 177 |
2 | 중국 | 51 | 55 | 45 | 151 |
3 | 대한민국 | 18 | 20 | 31 | 69 |
4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15 | 13 | 15 | 43 |
5 | 태국 | 11 | 11 | 20 | 42 |
6 | 인도 | 11 | 11 | 6 | 28 |
7 | 인도네시아 | 8 | 7 | 18 | 33 |
8 | 파키스탄 | 4 | 4 | 9 | 17 |
9 | 필리핀 | 4 | 4 | 6 | 14 |
10 | 이라크 | 2 | 4 | 6 | 12 |
11 | 말레이시아 | 2 | 1 | 4 | 7 |
12 | 싱가포르 | 2 | 1 | 3 | 6 |
13 | [[파일:{{{국기그림-1949}}}|22x20px|border |몽골]] 몽골 | 1 | 3 | 5 | 9 |
14 | 레바논 | 1 | 1 | 0 | 2 |
15 | 시리아 | 1 | 0 | 0 | 1 |
16 | 미얀마 | 0 | 3 | 3 | 6 |
17 | 홍콩 | 0 | 2 | 3 | 5 |
18 | 스리랑카 | 0 | 0 | 2 | 2 |
19 | 쿠웨이트 | 0 | 0 | 1 | 1 |
합계 | 201 | 198 | 226 | 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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