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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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혹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Flavius Aëtius, 396년 ~ 454년)는 서로마 제국의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다. 카탈로니아 평원의 전투로 유명하며 집정관을 3번이나 역임했고 보니파티우스의 사후에는 가장 신임 받는 장군이였으며 서로마 제국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었을뿐만 아니라 인품도 훌륭하였다.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는 390년 하모이시아 두로스토룸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유럽은 훈족에 의해 큰 위협을 당하고 있었는데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며 빠르게 이동했고 위협의 대상에 서로마 제국 또한 제외되진 않았다.

훈족은 서로마 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제국의 인사들의 아들을 인질로 잡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아이티우스도 있었는데 그는 어릴적 부터 총명한 사람이여서 훈족의 사회나 전통을 잘 이해하고 훈족의 언어를 금방 습득하며 훈족 사람들과도 또한 잘어울렸다. 그는 당시 훈족의 지도자였던 루아의 신임을 얻어 친한 관계가 되었다. 나중에 루아가 군을 파견해주며 아이티우스를 도와주기도 한다.

신임을 얻기까지[편집]

이탈리아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 갈라 플라키디아는 자신의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황제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티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대신 요한네스 테오도시우스를 지지했다. 군대 역시 요한네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요한네스는 황제가 되었으나 18개월만에 발렌티니아누스의 군대에게 살해당하고 그 때문에 아이티우스 또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훈족에게 도움을 청하여 훈족의 군대를 원조받고 막강한 위치에 올라선다. 아이티우스 말고도 서로마의 출중한 장군이 한명 더있었는데 보니파티우스라는 이름의 장군 이었다. 그는 원래 북아프리카의 총독이였으나 반달족으로부터 히포를 지켰고 여러가지 활약을 했다.

보니파티우스와 아이티우스는 국가에 대한 결정에서 의견 차이를 자주 보이는 편이었다. 이런 둘중에서 플라키디아는 보니파티우스를 더 신임했으며 그를 제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보니파티우스는 부상으로 인해 사망하고 플라키디아는 아이티우스를 요한네스 일때문에 과거에 의심하기도 했었지만 결국엔 그를 받아들인다. 후에 아이티우스도 큰 충섬심을 보여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군인으로서의 삶[편집]

그는 지혜롭고 총명한 인물일뿐만아니라 특출난 외교력 또한 가지고있었는데 서고트족이 서로마를 위협할때 북아프리카쪽의 반달족과 조약을 맺어서 서고트족에게만 신경을 쓸수있게하였고 서고트족의 왕이였던 테오도리우스와 친한 사이가 되어서 동맹관계로 전환시키는데 큰 기여를한다.

또한 알란족에게 영토를 떼어주어 정착하게 해주고 프랑크족을 격퇴하였다. 그의 가장 큰 전투는 451년의 카탈라우눔 전투 였는데 아틸라와 이 전투에서 맞붙게 된다. 이 전투에서 아이티우스는 서고트족알란등의 여러 민족들을 규합하여 싸웠고 훈족 또한 그에 못지않게 동고트족이나 게피타이족같은 여러 민족과 연합하여 맞서싸웠으나 두 진영 모두 승리를 얻지못하고 회군했고 특히 아틸라는 그동안 전쟁을 할 때마다 많은 물자를 약탈하거나 정전(停戰)을 조건으로 배상금 등을 받아왔는데,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아무 소득도 없이 후퇴하게 되었다.

사망[편집]

아틸라 사후 얼마 되지않아 아이티우스는 자신의 아들을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딸과 혼인 시키려했으나 이 와중에 막시무스 페트로니우스가 아이티우스 암살을 모의했는데 발렌티니아누스에게 아이티우스가 반란을 꾀한다며 아이티우스를 제거하라고 조언했다.

결국 아이티우스가 발렌티니아누스를 알현하자 황제는 갑자기 검으로 아이티우스를 찔러죽었으며 이와 같은 사건은 아이티우스같은 훌륭한 인재를 스스로 죽임으로써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 시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