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사키 야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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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사키 야타로

이와사키 야타로(일본어: 岩崎 弥太郎 (いわさき やたろう), 1835년 1월 9일 ~ 1885년 2월 7일)는 일본의 실업가로, 미쓰비시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수를 지낸 인물이다. 메이지 시대의 전란기 때에는 정상으로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유명한 인물이다.

생애[편집]

도사노쿠니(지금의 고치 현 아키 시)에서 지하낭인(地下浪人)이었던 부친인 이와사키 야지로와 모친인 미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하낭인이란 주식을 팔아 버리고, 낭인을 하고 있는 사람의 일로, 야타로의 증조부인 미지에몬 가의 주식을 팔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릴 적부터 글재주를 발휘하여, 당시 지방의 영주였던 야마우치 유타가키에도 한시를 읊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21살 때에는 학문에 매진하기 위하여, 에도(지금의 도쿄)로 유학해 주자학자였던 아사카 곤사이의 학원에 입학을 하게 되었으나, 부친인 이와사키 야지로가 술자리에서 싸움을 벌여 투옥되었다는 것을 알게 돼 귀향하였다. 부친의 무죄를 호소한 일로 야타로도 투옥되었는데, 이 때 옥중에서 같은 방의 상인으로부터 산술과 상법을 배운 것이 후에 상업에 입문하게 된 계기이다.

감옥에서 나온 뒤 마을에서 추방되었지만, 당시 칩거 중이었던 요시다 도요가 연 쇼린주쿠(少林塾)에 들어갔다. 요시다 도요가 야마우치 도요노부에 의해 등용되어 산세이가 된 뒤 그를 시중드는 작은 번관리가 되어 나가사키에서도 파견되었으나 나가사키에서 공금으로 방탕하게 유희를 즐기는 바람에 반년 만에 귀국하고 말았다. 그 후 27세에 결혼하였다.

요시다 도요가 살해되자, 동료인 이노우에 사이치로와 함께 범인 색출을 위하여 에도로 가는 참근 행렬에 가담하기 위해 오사카로 향했지만, 필요한 절차를 밟지 않아 혼자 돌아왔다. 이후 이노우에 사이치로는 오카다 이조 등에 의해 암살당했고, 이와사키는 홀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다시 오사카로 재출발한 뒤, 범인을 찾을려고 했으나 당시 상황이 좋지 않은 관계로 여의치 않아 무단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돌아온 이후, 요시다 도요의 배경이 없어진 자신으로선 현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1867년, 고토 쇼지로에 의해 나가사키에 있는 한 저택에서 바쿠후와 함께 다른 한들을 상대로 무역과 당시 사카모토 료마가 이끄는 카이엔타이의 경리를 담당하였다. 료마와는 잦은 싸움을 벌이며 사이가 좋지는 않았으나, 술잔을 주고 받은 기록이 나와 있어서 교류는 지속한다고 했다. 1868년, 나가사키 도사 상회가 폐쇄되며 카이세이칸 오사카 출장소로 자리를 옮긴 지, 1년 뒤, 츠쿠모 상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6년 뒤, 1873년, 도사 한의 부채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배 2척을 입수하여 해운업을 시작, 현재 오사카 시 니시 구 호리에에 위치한 당시의 도사 번 창고에 츠쿠모 상회의 이름을 바꾼 미쓰비시 상회(오늘날의 미쓰비시 그룹)를 설립하였다. 창립 이후엔, 고토 쇼지로를 통하여 1874년 대만 침공, 1877년의 세이난 전쟁에서의 군수물자수송업무를 맡아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다. 그러나 해운업을 독자적으로 가지게 되자 일본 내에서의 막대한 운임료의 부담을 지게 된 미츠비시의 행태는 더욱 악화되어 가며, 일본에서 '국가의 적'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와사키 야타로는 '미쓰비시가 국가의 적이라고 하면 미쓰비시의 배를 전소해도 정부는 괜찮을 것인가'라고 응수하여 미츠비시의 일본에 대한 공헌을 언급하였고 옛날 뿐만 아니라 지금도 미쓰비시의 경영 방식에 문제가 컸었다. 그러나 후원자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되었고 오쿠마 시게노부가 실각함에 따라 일본 정부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든 반면 1882년 7월 미쓰이를 비롯한 반 미쓰비시 재벌들이 결탁하여 공동운수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해운업에 진출하게 되어 타격을 입었다.

1885년 2월 7일, 5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