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일본 원정
| 원나라의 일본 원정(한) 元軍侵日戰爭(중) 元寇(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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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려 연합군의 화살과 폭탄에 맞는 일본의 사무라이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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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 1274년, 128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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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 대마도, 이키 섬, 규슈 | ||
| 결과 | 몽고의 일본 원정 단념 일본의 방어 성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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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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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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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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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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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1274년과 1281년의 두 번에 걸쳐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고려인 조이의 말을 듣고 주도하여 시도한 일본에 대한 군사 침공을 말한다. 당시 쿠빌라이 칸은 자신의 사위인 충렬왕에게 고려군의 출정을 요구하여 여·원 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했으나 일본군의 완강한 방어와 도중에 태풍을 만나 실패하였다.
목차 |
제1차 원정 [편집]
고려가 몽골에 굴복하게 되자 1268년에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통하여 사절을 보내 통호의 뜻을 전하고 입공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조정측에서는 답신을 보낼 것을 주장하였으나 싯켄(執權)이었던 호조 도키무네는 이를 거부하고 답신도 보내지 않았다. 몽고의 사절은 그 후에도 사절을 보내 왔으나 막부는 몽고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1]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몽골군은 1274년(충렬왕 1년)11월 제1차로 일본을 침략하였다.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은 원나라의 홀돈(忽敦)과 함께 9백 척의 함선에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合浦, 마산)를 출발하여 10월5일에 쓰시마(對馬), 10월14일에 이키(壹岐)를 습격하고, 규슈의 하카타항에 도착, 히라도(平戶)·다카시마(鷹島)의 마쓰우라(松浦)의 본거지를 전멸시키고 다음날 퇴각하였다. '폭풍우 때문에 실패하였다'라는 주장도 있으나 당시는 계절적으로 태풍이나 저기압에 따른 폭풍이 없던 시기이고 일본쪽으로부터도 이를 뒷받침할 기록이 없다.
개국을 목표로 1차 군사적 조치를 통한 압박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이 때 민중을 살륙했다. 이 때에 포로로 한 어린이 남녀 200명을 고려(高麗)왕과 왕비에게 헌상했다고 하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2]에 남아있다.
제2차 원정 [편집]
제2차 원정은 1281년(충렬왕 7년)에 행해졌다. 2차 원정은 고려군이 원정군을 지휘했다. 고려를 거쳐 가는 동로군(東路軍)은 함선 900, 병원(兵員) 4만, 강동군(江東軍)은 함선 3,500, 병원 10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태풍으로 인하여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물론 해상의 기후에 대한 인식의 결핍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동시에 당시 일본의 정권을 쥐고 있던 가마쿠라 막부의 완강한 저항과 일본 정벌에 전력을 기울일 수 없던 원의 국내 사정에도 원인이 있었다.
3차 정벌 준비 [편집]
3차 정벌도 준비 했으나 남송에서 반란이 일어나 원나라 군사들이 남송으로 가 3차 정벌은 준비 도중 끝났다.
결과 [편집]
- 고려
두 차례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침략에 동원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농민들이 이 새로운 동원으로 입은 참상은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 일본
여몽연합군의 침략으로 일본도 민심이 흔들리고 가마쿠라 막부 정권이 쇠퇴하면서 세력이 분열되어 남북조 시대로 넘어가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최초로 받은 외부세력의 대규모 공격으로 일본인들의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바라보는 시각도 부정적으로 전환된다.
각주 [편집]
- ↑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3쪽. ISBN 89-86142-81-3 “1268년에 쿠빌라이는 고려를 통하여 사절을 보내 통호의 뜻을 전하고 입공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조정측에서는 답신을 보낼 것을 주장하였으나 싯켄(執權)이었던 호죠 토키무네(北条時宗)는 이를 거부하고 답신도 보내지 않았다. 몽고의 사절은 그 후에도 사절을 보내 왔으나 막부는 몽고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
- ↑ 『高麗史』 巻二十八 世家二十八 忠烈王一「(十二月)庚午、侍中金方慶等還師、忽敦以所俘童男女二百人、獻王及公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