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마치산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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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마치산조가
오기마치 렌교 (正親町連翹)
오기마치 렌교 (正親町連翹)
한자 正親町三条家 (嵯峨家)
가나 おおぎまちさんじょうけ (さがけ)
본성(本姓)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 산조 서류
가조(家祖) 오기마치산조 긴우지
종별(種別) 공가 (대신가)
화족 (후작)
출신지 야마시로국
근거지 야마시로국
출신 저명인물 오기마치산조 히데코
오기마치산조 사네마사
오기마치산조 긴쓰무
오기마치산조 사네나루
사가 히로
범례 - 분류:일본의 씨족

오기마치산조가(일본어: 正親町三条家 おおぎまちさんじょうけ[*])는 후의 사가가(일본어: 嵯峨家 さがけ[*])로,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 산조가 서류의 공가이자 화족이다. 공가로써의 대신가, 화족으로써의 후작이다.

개요[편집]

좌대신 산죠 사네후사의 3남 킨우지를 가조로 한다. 사네후사의 장남인 킨후사가 계승한 적류인 산죠가와 구별하기 위해 킨우지류를 오기마치산죠가로 부르게 된 것인데, 이 가명이 정착하는 것은 7대 킨토요 무렵으로 여겨진다. 「오기마치 (正親町)」는 저택이 오기마치 히가시노토우인에 접해있던데서 유래한다. 덧붙혀 가조인 킨우지는 이 오기마치산죠 외에도 보리사나 별저택이 있던 지명인 사가(嵯峨)와 니시무라(西郊)를 자칭하는 일도 있었다. 이를 선례로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자, 한자 5글자의 긴 가명이 편리성이 떨어지는 것을 통감한 28대 사네나루는 이후에 가명을 사가가 (嵯峨家)로 고쳤다.

가업은 4개의 대사 (절화관주서위제목)와 유직고실이다. 코노에가가신로, 에도 시대의 가록은 200석이고, 나이나이이다. 유신 후에는 화족이 되었다가, 메이지 17년 (1884년) 화족령으로 백작이 되었지만, 4년 후, 메이지 유신에서의 사네나루의 공으로 후작으로 서임되었다.

사가가는 분가인 산죠니시가와 함께 대본의 본가 줄기에 해당하는 산죠가가 계승하지 않았을 때에는 양자를 보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묘소는 교토시 사가의 보리사 니손인에 있다.

덧붙혀 오기마치산죠가의 계보는 황실과 연결 되어있다. 5대 킨히데의 외손자로 스코고코곤 천황이 있었고, 이, 스코 천황의 계통이 지금의 황실까지 이어졌으며, 렌시의 후시미노미야 계통을 통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일제히 황적이탈구황족 11궁가에도 연결돼 있었다. 25대 사네토모와 26대 킨노리의 외5세손으로 다이쇼 천황이 있으며, 여기서도 오늘날의 황실로 연결되어 있다.

역사[편집]

처음에는 정2위 곤다이나곤을 최고위관직으로 하였으나, 5대 킨히데의 시기부터 딸인 히데코 (요로쿠몬인)가 고곤 천황의 후궁으로 들어가, 스코고코곤 천황의 생모가 되면서, 내대신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의 아들 사네츠구, 손자 킨토요내대신에 올랐고, 이 때부터, 대신가의 가격이 정해졌다. 또한 킨히데의 『킨히데 공기(公秀公記)』와 그의 아버지 사네미의 『사네미 향기(実躬卿記)』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친 일기이다.

킨토요의 동생 킨토키산죠니시가를 일으켰다. 킨토요의 증손자 사네마사는 여동생 타다코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정실로 들어간 인연으로, 그 총애를 받아 권세를 떨치는데, 그의 아들인 킨미오닌의 난 즈음하여, 쇼군가의 명에 응하지 않고, 아시카가 요시미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해직되었다. 이에 가독은 사네마사의 동생인 킨츠나로 옮겨졌고, 그의 유자 사네오키가 가독을 이었다. 사네오키분메이 13년 (1481년), 25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아버지인 킨미곤다이나곤의 부름을 받아 적가(嫡家)로 복귀하지만, 곧 코후쿠지에서 씨족에서 방출처분을 받았다 (복성후, 킨하루로 개명). 그의 손자인 킨에에이쇼 8년 (1511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다가 단바로 퇴거하면서, 이를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쇼군의 노여움을 사고, 일가 단절의 고비에 섰다. 서류인 산죠니시 사네타카가 적가(嫡家)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쇼군의 신뢰가 두터운 아노 스에츠나를 통해 사면을 요청했다 (『사네타카 공기(実隆公記)』). 덧붙여 사네모치사네토미는 가령인 스루가국 이나바쿄 (시즈오카현 후지에다시)에 하향한 적이 있어, 사네모치는 스루가에 있는 동안 사망했다.

근세에는, 사네히코를 제외하고 다른 가문에서의 양자 상속은 없고, 부자 상속에 의해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다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은 자가 많아서인지, 대신에 오른 적은 없었다. 곤다이나곤에 이른 것도 사네요시킨오사킨츠무사네나루의 4명에 그친다. 그 중에서도 킨츠무타케노우치 타카모치로부터 스이카 신토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호레키 사건에 연좌되어 파면ㆍ영칩거 처분을 받았다. 막부 말기의 사네나루기소, 코쿠지고요가카리를 지냈으며, 존왕양이파로부터 적대시되어 한때 실각하였으나, 메이지 신정부 수립에 공을 세워 요직을 역임했다.

메이지 3년 (1870년) 12월, 사네나루는 가명을 사가(嵯峨)로 개칭했다. 그의 아들 킨토1884년 (메이지 17년)에 백작에 서임되었으나, 1888년 (메이지 21년), 아버지 사네나루의 훈공에 의해 특히 후작에 서임되었다. 30대 사네토의 장녀 히로만주국 황제이자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동생 푸계의 아내가 된다.

역대 당주[편집]

방계[편집]

오기마치산죠 사네츠구의 동생인 준대신 오기마치산죠 사네토시의 계통이다.

  1. 오기마치산죠 사네토시 (1319년 - 1386년)
  2. 오기마치산죠 킨아츠 (? - 1409년)
  3. 오기마치산죠 킨요리 (? - 1444년 이후)

별계[편집]

오기마치산죠 사네미의 형인 비참의 산죠 사네나카의 계통이다.

  1. 오기마치산죠 사네나카 (1319년 - 1386년)
  2. 오기마치산죠 킨아키라 (? - 1409년)
  3. 오기마치산죠 사네하루 (? - 1444년 이후)

계보[편집]

오기마치산죠가 (사가가)

실선은 부자관계, 점선 (세로)는 양자, 점선 (가로)는 혼인관계.
산죠 사네후사
킨후사
산죠가
산죠 킨우지1
사네카네2
(사네시게)
킨츠라3킨타네
사네나카사네미4사네토
(사네나)
킨하루
(킨타다)
킨히데5킨미킨츠나
(킨나가)
사네하루사네카즈사네츠구6
(사네요)
사네토시히데코고곤 천황
오기마치산죠
킨토요
7
(킨케이)
산죠니시 킨토키
산죠니시가
킨아츠킨요리스코 천황고코곤 천황
사네토요8산죠니시 킨야스
킨마사9
사네마사10킨츠나타다코아시카가 요시노리
{{{[}}}
킨츠나킨하루11
(킨미・킨자네)
아자이 시게마사
아자이씨
사네오키사네모치12
(사네오사)
시게노이 스에쿠니
토다 사네미츠
토다씨
킨에13
사네에사네토미14산죠 사네노리쇼인 거사
키미나카15하나조노 킨히사
하나조노가
시죠 타카노리쿠시게 타카치카
쿠시게가
나카가와 사다히데사네요시16
(사네스케)
칸로지 토요나가
칸로지 토키나가칸로지 아키나가킨타카17사네아키
사네아키18
(스에나리)
킨카도19사네히사소노이케 킨야[※ 1]
{{{}}}}
사네히사20킨오사카와바타 테루스에
킨오사21
(킨미츠)
 사네히코22[※ 2]
킨츠무23
사네토모24하나조노 사네아키
킨노리25
사네요시26
킨타루27사가 사네나루28
킨히라킨토29
사네토30마키노 야스히로사가라 킨아이
킨모토31히로아이신기오로 푸계
사네미츠32

막부 말기의 영지[편집]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구고구령취조장 데이터베이스』에 의해 산출된 막부 말기의 사가가 영지는 다음과 같다 (3개 마을 200석)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