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고 쓰네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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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고 쓰네히사(일본어: 尼子経久 (あまごつねひさ), 1458년 12월 25일 ~ 1541년 11월 30일)는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센고쿠 시대에 걸쳐 활약한 이즈모센고쿠 다이묘이다. 이즈모 슈고다이.

호조 소운·사이토 도산과 함께 하극상의 전형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며, 모리 모토나리·우키타 나오이에와 함께 모략의 천재로 불리며 모성(謀聖)·모장(謀将)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쓰네히사, 모토나리, 나오이에를 아울러 주고쿠 삼대 모장(中国の三大謀将)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인물·일화[편집]

  • 계략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우수하여 문무양도였다고 한다. 만년에 그린 자화상이 남아 있다.
  • 계락가로서는 냉철하였으나, 한편으로 가신에게 굉장히 신경을 쓰는 자상한 인물이었다. 쓰네히사의 인품을 그리는 일화로, 가신이 쓰네히사가 가진 물건을 칭찬하면 굉장히 기뻐하며 아무리 비싼 물건이라도 금세 가신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에 가신들은 이를 황송하게 여겨 쓰네히사의 물건은 칭찬하지 않고 단지 바라보기만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뒤, 어떤 가신이 정원에 있는 소나무라면 칭찬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소나무의 가지 모양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는데, 쓰네히사는 그 소나무를 파내어 그 가신에게 주려고 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당황하여 제지했으나, 쓰네히사는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소나무를 베어내어 주었다. 세인들은 아까운 일이라고 수군댔지만, 쓰네히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어떤 겨울에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가신에게 주어버렸기 때문에, 얇은 면으로 된 고소데 한장으로 버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일화는 센고쿠 무장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므로, 의외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편으로 관점을 바꿔보면, 당시의 아마고 가문은 은상과 물건으로 가신과의 관계를 굳히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기반이 약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정책[편집]

외교 관계[편집]

  • 쓰네히사는 혼간지쇼뇨(証如)와 손을 잡았다. 적손 하루히사 대에도 혼간지와 연락을 취하고 있어서 혼간지 측의 일기에 아마고 가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고 일족의 모반[편집]

쓰네히사는 적극적으로 혼인 정책을 취하여, 고쿠진 등과 인척 관계를 맺어 아마고 가문의 세력의 확대를 꾀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아마고 가문의 세력 확대에는 공헌하여 적손 하루히사 대에 아마고 가문은 주고쿠 지방의 대 다이묘로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쓰네히사는 일족과 일문의 불화를 조정하는데 실패하였고, 더욱이 이 인척관계가 차기 당주 하루히사와 친족·고쿠진과의 알력이 생기는 원인이 되어 가문 내의 내분이 일어나는 등, 최후에는 많은 난제를 남기고 세상을 뜨게 된다.

내정[편집]

  • 쓰네히사 휘하의 고쿠진은 직속 가신이라고 할 수 없어, 아마고 가문의 지배는 굉장히 불안정한 것이었다. 쓰네히사는 대외 원정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내걸고 이에 따르게 하는 것으로 고쿠진들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며, 아마고 가문을 운영해 나갔다. 이러한 경우는 센고쿠 다이묘들에게서는 드물지 않은 것으로, 가장 유명한 예가 다케다 신겐이 이끄는 다케다 가문이다.
  • 쓰네히사 때 이즈모 국내에서 아마고 가문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고자 삼남 오키히사를 엔야 가문에 양자로 보냈으나, 이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 친자식의 반란이라는 실책을 불러왔다.
  • 11개 구니의 태수라고 불리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지배 하에 두었던 지역은 이즈모·호키 국·이키 국 정도로 타지역은 유동적인 상황이었다. 실제로 아마고 가문의 기반은 주로 산인 지방이며, 그 세력권도 형식적인 주종관계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굳건하지 못했다. 게다가, 주고쿠 지방에는 오랜 기간 동안 기반을 굳히고 있던 오우치 가문(大内氏)의 존재가 커서, 역시 최종적으로는 오우치 가문의 침공으로 고생하게 되고, 오키히사의 난으로 가문이 엉망진창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우치 가문 같은 유서 깊은 대 다이묘를 상대로 쓰네히사·하루히사 두 대만에 대등한 세력권을 쌓은 것은 평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