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요시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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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요시오키 (일본어: 大内義興 (おおうち よしおき) 오오우치 요시오키[*], 1477년~1529년 1월 29일) 는 일본의 군인이자 장군이며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일본 전국 시대(日本戰國時代) 초기에 걸쳐 활약한 스오(周防) 센고쿠 다이묘 겸 오우치 가문 제30대 당주(종손)이다. 백제 온조왕의 원손(遠孫)이며 임성태자의 28대손이다.[1]

  • 하기의 날짜는 음력이다.

약력[편집]

아명은 기도마루(亀童丸). 무로마치 막부의 간레다이로 쇼군의 후견인이 되었고, 스오, 나가토, 이와미, 아키, 지쿠젠, 부젠, 야마시로 국의 7곳의 슈고를 겸임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등장하기 전인 센고쿠 시대 전기의 패권을 장악한 영웅이다.

생애[편집]

가독 상속[편집]

분메이 9년 (1477년) 오우치 가문 제29대 당주 오우치 마사히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메이오 원년 (1492년) 롯카쿠 가문 토벌전에 참전하였고, 다다음해인 메이오 3년 (1494년) 아버지 마사히로가 병으로 당주의 자리를 물러나고 가독을 승계해 제30대 당주로 되었다. 메이오 4년 (1495년) 아버지가 죽자, 나가토 슈고다이 나이토 히로노리가 동생 오우치 다카히로를 옹립하려 하자 스에 다케모리?(陶武護 스에 오키후사(陶興房)의 형)가 참언하여 이것을 믿고 나이토 히로노리 부자를 주살하였다. 후에 나이토 부자의 무고를 알고 참언한 스에 다케모리?를 주살하였다. 그리고, 나이토 히로노리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나이토 가문을 재건하였다.

세력 확대[편집]

규슈 북부에서 오토모 가문(大友氏)과 쇼니 가문(少弐氏)간의 전투를 계속하면서, 아버지 대에 영유하였던 스오, 나가토, 부젠, 지쿠젠에 더하여 아키, 이와미 슈고를 겸했으며, 그 밖에도 히젠의 일부까지도 세력하에 두었다. 메이오 5년 (1496년)에 일어난 오토모 가문의 내분에 개입하여, 오토모 마사치가(大友政親)를 처형하고, 다이쇼인에 있던 오토모 슈신(大友宗心)을 후계자로 내세우려 하였지만, 슈신의 사촌인 오토모 지카하루(大友親治)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다.

메이오 6년 (1497년) 1월에는 쇼니 마사스케(少弐政資) 부자를 공격하였고, 4월에는 마시스케 부자의 자결로 규슈 북부에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쇼니 마사스케의 셋째 아들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가 분키 원년 (1501년) 거병하였고, 에이쇼 3년 (1506년)에 오토모 지카하루와 연대하여 오우치 령의 공격을 계획한다. 그러나, 메이오 8년 (1500년)에 메이오 정변으로 교토에서 쫓겨난 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가 야마구치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우치 요시오키는 에이쇼 4년 (1507년)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중개로 쇼니 스케모토와 화친해, 규슈 북부를 세력하에 두었다.

기나이 출병[편집]

에이쇼 4년 (1507년) 6월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를 제11대 쇼군으로 옹립해 전권을 장악한 간레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가 암살되었다. 그 후,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기나이 진출로 눈을 돌린다. 오우치 요시오키는 규슈, 주고쿠의 여러 다이묘에게 동원령을 발포하였고, 11월에 야마구치를 출발 12월에는 빈고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양자였던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国)가 오우치 요시오키와 내통하여 호소카와 즈미모토(細川澄元)와 대립 항쟁을 하였고, 에이쇼 5년 (1508년) 3월 호소카와 즈미모토는 다카쿠니, 요시오키에 압도당해, 아시카가 요시즈미와 함께 오미로 도주하였다. 6월 상락을 달성한 요시오키는 7월에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쇼군직에 복귀시켰고, 자신은 사쿄노다이부 및 간레다이로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막정에 관여한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즈미와 호소카와 즈미모토가 교토 탈환을 목표로 반격을 하였고, 에이쇼 7년 (1510년) 1월에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오미로 공격해 가지만, 역으로 패하고 만다. 그보다도 아시카가 요시즈미측은 일대 결전을 결이하며 에이쇼 8년 (1511년) 7월에는 셋쓰로 공격해 오자 오우치 요시오키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출진하지만, 셋쓰에서도 이즈미에서도 패배하고 단바로 도주한다. 그러나 8월 14일 아시카가 요시즈미의 갑작스런 죽음과 롯카쿠 다카요리(六角高頼)의 이반등으로 전황이 유리해졌고, 8월 23일 야마시로 후나오카야마 전투(船岡山の戦い)에서 호소카와 즈미모토군을 격파하고 교토를 탈환한다. 이때 오우치 요시오키의 활약이 상당했다고 한다. 에이쇼 9년 (1512년) 3월 그 무공으로 종3위와 구교[2]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점점 쇼군 요시타네와 간레 다카쿠니의 사이가 나빠졌으며, 더욱이 오우치 가문 영내의 이와미와 아키에 대해 이즈모아마고 쓰네히사(尼子経久)가 침공을 개시했기 때문에, 에이쇼 15년 (1518년) 8월 2일 간레다이를 사임하고 야마구치로 귀환한다.

아마고 가문과의 싸움[편집]

요시오키가 자리를 비운사이 세력을 키운 아마고 쓰네히사는 다이에 3년 (1523년)에는 이와미가 공격 받았으며, 아키에서는 오우치 가문에 종속되었던 모리 가문이 아마고 가문으로 자리를 옮긴다. 아마고 쓰네히사는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고마쓰마루(毛利幸松丸)의 후견인이었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를 이용해 오우치 가문의 아키 경영의 거점이었던 가가미야마 산성을 공략하는 등 잠시나마 오우치 가문을 압도했다.

이렇게 되자, 요시오키는 다이에 원년 (1521년)부터 아키, 이와미로 진격해 해마다 아마고 가문과 싸우지만, 생각하는 만큼의 전과는 없었다. 그러나, 다이에 4년 (1524년) 아키 이쓰쿠시마 섬으로 진격해 사토카나 산성 공방전에서 아마고 군을 격파하였고, 다이에 5년 (1525년)에는 모리 모토나리가 다시 오우치 가문으로 종속되었기 때문에 아키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또, 아마고 가문도 산인방면에서 야마나 가문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미에서도 세력을 잃었다. 게다가 규슈 북부에서도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와의 전투의 전황도 유리했다.

교로쿠 원년 (1528년) 아키 가나야마 산성 공격중 병으로 쓰러져, 야마구치로 돌아온 직후 병사하였다. 향년 52세. 묘소는 야마구치 시 료운지터(凌雲寺跡)에 있다. 가독은 적자 오우치 요시타카가 계승하였다.

인물, 일화[편집]

  • 요시오키는 구게와 같은 인물로 전해지지만, 연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생애 전반을 전장에서 보낸 무장이었다. 오히려 구게와 같은 일면이 있기 때문에 교토에서 도망쳐온 구게를 야마구치로 맞아들여 조정과의 연락체계를 구축했으며, 더욱이 교토 문화를 야마구치에 꽃피운 인물로 오우치 문화를 창출해 야마구치를 서쪽의 작은 교토라고 불리었다. 오우치 가문의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이다.
  • 상락을 달성했지만, 막정에 오래 관여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영지가 너무 서쪽에 치우쳐 있고, 호족들의 연합맹주로써의 한계도 있다. 이 때문에 요시오키가 천하 패자로 군림한 기간을 길지 않다.

무역[편집]

조선과의 무역은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1506년 (연산군 12년) 조선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일본과의 무역은 배타적으로 변했다. 물품의 양과 가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무역으로 인한 이익이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무역에대한 실익이 별로 없자 요시오키는 선대에서 해왔던 방법으로 자신은 백제왕의 후손이며 종례에 따라 특혜를 받고자 하였다. 하지만, 성과는 얻지 못했고, 더욱이 1510년 (중종 5년) 에 일어난 삼포왜란으로 조선과의 무역은 더욱더 어려워졌고 실익도 없었다. 그리고, 1508년 쇼군을 옹립 막정을 장악한 요시오키는 호소카와 가문이 해왔던 명과의 무역도 독점한다. 하지만, 1523년 호소카와 가문이 이에 대항하여 명나라에서 오우치 가문과 대립끝에 오우치 가문의 사신이 죽고 민가가 불탔으며 게다가 이 일로 인해 명나라 관료까지 죽게 된다. 이를 닝보의 난(寧波의 亂)이라고 한다. 닝보의 난으로 오우치 가문과 명국 사이의 무역은 잠정 중단되게 되었다.

계보[편집]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가 오우치 가문의 시조라고 전해진다. 족보를 잃어버려 백제왕의 후손이 맞느냐는 의심을 받자 그는 조선 왕 조선 정종에게 우리 집안이 백제에서 건너온 것을 입증하는 자료를 부탁한다는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어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3]” 정종실록 1년 7월 10일 중에서

일본에 정착한 임성태자의 후손이 스오국 다타라하마에 기착해 오우치무라에 살았기 때문에 성(姓)은 다타라 (多多良), 씨(氏)는 오우치(大內)로 했다고 전해진다.

가족[편집]

친척[편집]

인척[편집]

요시오키의 이름을 받은 인물들[편집]

  • 오우치 요시오키(大內義)
    • 깃카와 오키츠네(吉川経)
    • 고바야카와 오키카게(小早川景)
    • 스에 오키후사(陶房)
    • 나이토 오키모리(內藤盛)
    • 모리 오키모토(毛利元)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http://www.nichiren.ac/houzennji/toyotakeifu.htm
  2. 구게 중에서도 종3위 이상의 고관을 가리킨다.
  3. http://www.nichiren.ac/houzennji/toyotakeifu.htm
전 임
오우치 마사히로
스오 오우치가 역대 당주
1494년 - 1528년
후 임
오우치 요시타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