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조지 다카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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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
1529년 2월 15일 ~ 158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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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조지 다카노부
태어난 곳 히젠노쿠니
죽은 곳 오키타나와테
별명 오주태수, 비전의 곰
주요 참전 미미가와 전투
오키타나와테 전투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 1529년 3월 24일 ~ 1584년 5월 4일 큐슈 다이묘 류조지가의 19대 당주이자 '5주태수(五州太守)', '비젠의 곰(肥前の熊)'의 별명을 가진 북큐슈의 유력다이묘. 오토모가를 물리치고 남큐슈의 유력다이묘 시마즈가와 자웅을 겨룰만한 세력을 구축하여 한 때 류조지가를 35만석으로 시마즈가, 오토모가와 함께 큐슈3강(九州三强)으로 올렸지만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 싸운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생애[편집]

출생이전[편집]

류조지가는 출전(出典)이 확실하진 않지만 후지와라씨의 방계인 타카키 요시이에(高木秀家)가 히젠노쿠니 오즈군의 류조지(龍造寺)의 지명을 따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무로마치(室町)막부 말기 본가인 무라나카 류조지(村中龍造寺)가의 당주가 요절하면서 쇠약해지고 방계인 미즈가에 류조지(水ヶ江龍造寺)가의 당주이자 다카노부의 증조부인 류조지 이에카네(龍造寺家兼)가 주군가문인 쇼니가(少弐家)를 배반하고 떨어져 나와 오우치가(大內家)의 비호아래 발흥하여 류조지가는 센고쿠다이묘의 한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유소년기[편집]

1529년 2월 15일, 용조사가의 당주인 류조지 치카이에(龍造寺周家-미즈가에 성주)의 장남으로서 태어났다. 유년기는 보림사라는 사찰에서 양육되었다. 그러다 천문(天文) 14년(1545년) 할아버지 류조지 이에스미(龍造寺家純)과 아버지 류조지 치카이에가, 주군인 쇼니가(少弐家)에 대한 모반의 혐의로 쇼니가의 가신에 의해 살해당한다.타카노부는 증조부인 이에카네의 도움으로 옆 지방인 치쿠고노쿠니(筑後) 탈출하였다. 천문 15년(1546년) 이에카네는 카마치가문의 원조를 받아 류조지씨를 재흥 하지만, 93세라는 고령과 병환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 때, 이에카네는 타카노부의 기량을 간파하여 환속해 미즈가에 류조지가를 잇게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류조지가 당주상속[편집]

1547년(천문 16년) 류조지가문의 상속자 된 다카노부는 본가의 명을 따라, 주군인 쇼니 후유히사(少弐冬尚)를 공격하여 추방시켰다. 천문 17년(1548년) 본가의 당주가 죽자, 타카노부는 그 미망인과 혼인을 맺고 본가를 상속한다. 이에 본가 당주 취임에 반대하는 중신들이 있어 당시 쥬고쿠 지방(中國地方)의 센고쿠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와 손을 잡고 내부의 불만을 억누른다.

히젠 통일[편집]

1551년(천문 20년), 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의 모반에 의해 사망하자, 후원자를 잃은 타카노부는 가신들에 의해 히젠에서 쫓겨나 증조부 이에카네를 도와줬던 카마치가(蒲池家)의 치쿠고 야나가와(柳川) 성으로 피신한다. 거기서 다카노부는 천문 22년(1553년) 카마치가의 원조를 받는데 성공하여 히젠을 탈환하였다. 이후 세력 확대에 전념한 다카노부는 에이로쿠(永綠) 2년(1559년)에는 한때 주군 가문이었던 쇼니가를 공격해 쇼니 후유히사를 할복시키고 쇼니씨를 다이묘 가문으로써 완전히 멸했다.

그 후 에가미(江上)씨 등을 제압하고 에이로쿠 5년(1562년)까지 동 히젠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러한 급속한 세력 확대는 근접한 아리마가(有馬家)나 오오무라가(大村家) 등의 불안을 사 에이로쿠 6년(1563년)에 양 가는 연합하여 동 히젠에 침공하지만, 타카노부는 치바가(千葉家)와 동맹을 맺어 이 연합군을 물리쳤다. 이로 인해 남 히젠에도 위세가 미치게 되었기 때문에 이번은 분고(豊後)의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이 타카노부를 경계하여, 에이로쿠 12년(1569년)에는 소린이 직접 대군을 인솔해 히젠을 침공하지만,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토요마에에 침공해 왔기 때문에 소린은 히젠에서 철퇴했다. 이후 소린은 겐키 원년(1570년)에 남동생 오토모 치카사다(大友親貞)을 총대장으로 하는 6만 대군을 히젠으로 보낸다. 그러나 타카노부는 이것을 나베시마 나오시게(過島直武)에 의한 기습책에 의해서 격퇴하여 (이마야마 합전), 오토모씨와 유리한 강화로 묶는 데 성공했다.

타카노부는 이마야마에서 오토모가와 싸워 이겼지만, 그 후도 오토모씨에게 종속하고 있었지만 결국 영토를 인정받아 미미가와의 싸움 전까지 영토를 확실히 인정받아 힘을 기르고 있었다. 덴쇼(天正) 원년(1573년) 서히젠을 평정, 덴쇼 3년(1575년)에는 북 히젠을 평정한다. 덴쇼 4년(1576년)에는 남 히젠에 침공해, 덴쇼 5년(1577년)까지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를 굴복시키고, 덴쇼 6년(1578년)에는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를 굴복시켜 히젠의 통일을 완성했다. 이때 적자 류조지 마사이에(龍造寺政家)에게 가독을 양보하고 은거하였지만, 그러나 정치·군사적 실권은 여전히 그가 잡고 있었다.

세력 확대[편집]

덴쇼 6년(1578년) 오토모 소린이 미미가와의 싸움으로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대패하면서, 타카노부는 오오토모씨의 혼란을 타 오오토모씨의 세력권의 탈취에 박차를 가해 덴쇼 8년(1580년)까지 치쿠젠(筑前)이나 치쿠고(筑後), 히고(肥後), 토요마에(豊前) 등을 세력하에 두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덴쇼 8년(1580년) 자신과 가문을 도와준 치쿠고의 카마치 시게나미(蒲池鎭漣) 모살하고 야나가와 성의 시게나미의 일족을 몰살하고 인질로 맡고 있던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統家)의 아들을 죽이는 등 가신단에게 실망을 안긴다.

덴쇼 9년(1581년)에는 사가라가(上梁家)를 물리친 시마즈가(島津家)가 북상하자, 타카노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덴쇼 11년(1583년) 마사이에를 히고에 침공시켜 한 때는 시마즈 군을 압도하고 있다.

사망[편집]

덴쇼 12년(1584년) 아리마 하루노부가 류조지씨한테서 배반한다. 이것을 기회로 시마바라 반도에 있는 모든 호족이 동요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타카노부는 스스로 대군을 인솔해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의 결전을 준비한다.

이때 류조지 군은 6만(불분명한 수치)대군 이었지만, 적의 지장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에게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戰い)에서 크게 지고 많은 장병과 함께 타카노부 자신도 향년 56세의 나이로 시마즈씨의 가신·카와카미 타다카타(川上忠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 싸움은 류조지가(龍造寺家)의 몰락을 결정지었고 중신인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주군인 타카노부의 유해를 방치한 채로, 도망갔다고 한다.

인물[편집]

  • 선교사가 남긴 기록에는, 히젠의 다이묘는 시저를 닮은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 젊은 무렵부터 몇 번이나 히젠을 쫓긴 경위 때문인지 모든 것에 의심을 품는 냉혹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 평상시부터 가신에게 차가웠기 때문에, 오키타나와테 전투 때 패색이 짙어지자 타카노부의 가마를 메는 것이 짜증이 난 측근들은 가마를 던지고 도망쳤기 때문에 타카노부는 늦게 도망쳐 죽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 이와 같이 타카노부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내용이 많지만 이런 냉혹, 비정, 교활함이 있기 때문에 히젠의 호족에 지나지 않았던 류조지 가문이 타카노부 일대에서 큐슈 3강에까지 오른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의견도 있다.
  • 치쿠고의 카마치가(蒲池家)는 류조지가에게 타카노부의 아버지 시절부터 당주 카마치 아키모리(蒲池鑑盛)가 도움을 주었고 그의 아들인 카마치 시게나미(蒲池鎭蓮)는 타카노부의 딸과 혼인하여 치쿠고 침공에도 류조지가를 협력하고 있었다. 타카노부에 있어서 시게나미는 사위이며 치쿠고에 있어서의 강력한 가세이기도 했다. 그러나 타카노부는 큐슈 정벌을 위해 구실을 만들어 덴쇼 8년(1580년)에 2만의 군사로 야나가와 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큐슈 굴지의 난공불락의 성인 야나가와 성을 끝내 공락하지 못하자 타카노부 측 가신이자 시게나미의 백부인 타지리 아키타네(田尻鑑種)로 인해 강화를 맺는다. 그 뒤 연회를 가장하여 카마치 일족도 몰살시켜 치쿠고를 공략했지만, 그 냉혹함은 류조지 사천왕의 한 명 햐쿠타케 토모카네(百武賢兼) 같은 심복의 충성심까지 크게 약화시켰다. 심지어 햐쿠타케 토모타케는 야나가와 성 출진 소식을 듣자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다 끝내 끝까지 출진하지 않았다. 타카노부의 첨병이었던 타지리 아키타네도 후에 타카노부를 배반하였다. 이 카마치 시게나미의 모살과 일족 살육은, 쿠로키 이에나가, 타지리 아키타네 등 치쿠고의 국인과 연잇는 배반이나 잇키를 불러, 결과적으로 타카노부는 치쿠고 경영을 질질 끌게 되어 몰락의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 젊었을 무렵이나 히젠 통일까지는 영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은거한 뒤엔 주색에 빠져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정무를 멀리하는 등 행패가 눈에 띄었다고 여겨진다.
  • 상당히 비만해서 말을 탈 수 없었다고 한다(이견이 있다). 이 때문에 오키타나와테에서도 도주할 때에 가마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지며, 그 때문에 적에게 발각당했다고 여겨진다. 오키타나와테 전투의 패배 요인은 타카노부가 무모한 공격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군졸들이 자포자기가 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 시마즈 군이 획득한 타카노부의 수급은 후에 류조지가에 반환하였지만,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반환하는 것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 시마즈 측에 돌아온 목은 타카노부에 인연이 있던 아카호시 친가의 미망인에게 인도해지고 놀림감으로 되었다고도 하고, 시마즈 이에히사에 의해 매장해졌다고도 하며, 시마바라의 강에 흘러갔다고도 한다.
  • 타카노부에게는 스루가노쿠니센고쿠 시대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와의 공통점을 많이 볼 수 있다.「한 번은 불가에 입문했지만 환속하고 상속하였다」 「비만 체구로 말을 타지 못하고, 전장에서는 가마를 타고 있었다」 「대군을 인솔하고 있었음에도 관련되지 않고 적은 병력에 참패해 전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 임
류조지 다네미쓰
무라나카 류조지가 당주
1548년 - 1578년
후 임
류조지 마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