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축구대항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경평축구대항전

京平蹴球對抗戰

국가 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 조선
설립 연도 1929년
리그 폐지 1946년

경평축구대항전 (京平蹴球對抗戰)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양대 도시인 경성평양을 대표하는 경성 축구단평양 축구단이 장소를 번갈아 가면서 벌였던 친선 축구경기이다.

역사[편집]

창설 (1929년)[편집]

조선일보 주최로 1929년 10월 8일 첫경기가 개최되었으며 당시 조선일보 10월 8일자 사설은 "부지중에 민중적 차원으로 화합하자는 데"에 취지가 있다 했고,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은 개회사에서 "경기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량을 과시하는 기회"로 승화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경평전은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단합과 극일의 저항정신을 키운 본보기로 평가 받았다. 당시엔 '팀' 대신 군(軍)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전경성군 대 전평양군 축구대항전이란 이름이 사용되었으며 경성군은 당시 축구의 명문 경신중학 중심으로, 평양군은 일본의 최강팀인 와세다 대학을 7:0으로 물리쳐 이름을 날리던 숭실학교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출신학교는 그랬지만, 평양팀의 멤버는 25세 이상의 청장년이었으며, 경성팀의 주축은 당시 민족 사학의 쌍벽을 이루던 연희보성 전문 선수로 대부분이 20~23세의 대학생이었다.

제1회 대회는 10월 8일 서울 원서동 휘문고등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7천여 관중이 열광하는 가운데 개최됐으며 1차전은 1:1로 비겼고, 9일의 2차전은 평양이 4:3, 10일의 3차전은 평양이 다시 4:2로 이겨 2승1무로 평양이 우승했으며 평양팀은 평양에 돌아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1]

제2회 대회는 1930년 11월 28일부터 3일간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2회 대회는 다소 체계가 잡혔으며 경성팀은 막강한 멤버를 갖출 수 있어 2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종합 2승 1패로 우승하며 지난 대회의 패배를 설욕하였다. 1차전은 경성이 3:2승, 2차전은 평양이 5:3승, 3차전은 경성이 5:1로 대승했다. 제2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일보 주최의 경평전은 중단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분분하지만 승부욕이 지나쳐 싸움이 잦아 중단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2]

재개 (1933년)[편집]

그 후 1933년조선축구협회의 주선으로 경평 대표자들이 모임을 갖고 1933년 경성 축구단평양 축구단의 각각 창단을 기념하여 봄, 가을 두차례로 나누어 경기 장소를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실시하도록 결정하였다. 그 후 경성-평양 대항정기축구전으로 경기가 계속되어 오다가 1935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경평전은 경성, 평양 이외에 다른 도시 축구팀의 성장에 힘입어 3도시대항축구전이나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와 같은 도시대항 축구대회로 이어진다. 그러나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로 인해 모든 대회는 중단된다.

해방 이후 (1946년)[편집]

1946년 해방 후 서울운동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평전이 열렸다.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대회였기에 서울 시민들의 큰 관심과 열광적인 응원 하에 열렸으며, 그 열기가 지나쳐 3월 26일 열린 2차전에서는 관중 난동이 벌어져 경찰이 공포탄을 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3] 하지만 38선으로 남북통행이 금지되면서 평양 선수들은 경비망을 뚫고 어렵게 내려왔던 것이었으며, 돌아갈때는 육로가 위험해 뱃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서울 선수들을 초청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 채 경평전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도시대항축구대회

의미[편집]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양대 대도시 서울과 평양에 당시 조선의 최고 양대 빅클럽이 형성되었으며 이들 최고의 클럽들 대결에 전조선이 열광하는 흡사 지금의 유럽 프로축구 리그처럼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클럽 축구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을 살리지 못하고 80년대 프로축구 출범 후 대도시에 연고 구단이 뿌리내지리 못하고 그 후 기형적인 서울연고공동화정책 등으로 대도시 연고지 빅클럽 구조에서 중소도시 연고지 빅클럽 구조로 바뀌고 부산, 대구, 인천, 광주 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도시들에 시민구단들이 들어선 점은 아쉬운 점이다.

또한 경평전의 주축이었던 경성 축구단평양 축구단은 해방 이후 각기 남북 국가대표팀의 모태가 되었다. 가난한 신생 독립국에 불과하던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 및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이들간의 교류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경평전 역시 그 명성만이 남은 채 재개되지 못하였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의 지역 예선에서 남북이 마주치기는 했으나 국가대표로서 만난 것이었으며, 경평전과 같이 남북을 대표하는 도시 간의 정기적 경기는 부활되지 못하였다. 물론 1990년 10월 11일에는 평양에서, 10월 23일에는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명칭으로, 2002년 9월 5일과 8일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2002 남북통일축구경기라는 이름으로 경평축구의 맥을 잇는 축구대표팀 경기가 벌어지기도 하였다.[4]

역대 전적[편집]

대항전 횟수와 전적에 대한 정리[편집]

경평축구대항전의 제1회 대회를 조선일보 주최의 1929년 대회로 보는 견해가 있고 1933년 4월 6일부터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벌어진 대회를 1회 대회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아직 명확하게 대회에 대한 정리가 확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같은 대회이지만 각각 대회 횟수가 다르게 기재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최대한 당시 언론에서 기재한 대회 횟수를 반영하여 1929년 10월, 1930년 11월, 1933년 9월에 개최된 대회와 1933년 10월 부터 정식으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합의하여 개최되기 시작한 경평축구대항전을 분리하여 정리하였다. 또한 1933년 4월의 대회는 아직 합의전 평양 축구단이 주최한 일종의 친선경기라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역시 분리하였다.

전적에 있어서는 1939년까지 6년 동안 평양 축구단 기준으로 19전 7승 8무 4패라는 아래 전적표에 의한 실제 전적인 19전 8승 7무 4패와 근접한 기록의 기사가 있으며 [5] 한겨레, '29년 첫 경평축구 개최'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총 23전 경성 6승 7무 10패, 평양 10승 7무 6패의 종합전적이라고 나오고 있다.[6]한편 세계일보, 이동윤 1990년 9월 20일, 11면 기록으로 본 경평축구 - '11승 7무 7패로 평양이 우세'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총 25차례 경기가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문헌마다 다른 기록이 나오고 있는 이유는 정기전 성격의 경평축구대항전 이외에 전조선축구대회3도시대항축구전 등의 대회에서 경성과 평양의 대진 기록을 포함 한 것으로 추정되며 좀 더 정확한 기록을 위해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경평전[7][편집]

  • 최대한 승패와 득점결과까지 정확하게 기록이 확인된 전적만 기재하였다.
# 대회명 구분 일시 홈팀 득점 원정팀 결과 장소 비고
1
제1회 조선일보 주최 경평전 1차전 1929-10-08 경성
1-1
평양
무승부 (1)
서울 원서동
휘문고등학교 운동장
종합전적 2승 1패로
1회 대회 평양 우승
2
2차전 1929-10-09 경성
3-4
평양 평양 승 (1)
3
3차전 1929-10-10 경성
2-4
평양 평양 승 (2)
4
제2회 조선일보 주최 경평전 1차전 1930-11-28 경성
3-2
평양 경성 승 (1) 경성운동장 종합전적 2승 1패로
2회 대회 경성 우승
5
2차전 1930-11-29 경성
3-5
평양 평양 승 (3)
6
3차전 1930-12-01 경성
5-1
평양 경성 승 (2)
7
평양 주최 친선경기
조선축구협회 주선
1차전 1933-04-06 평양
2-3
경성 경성 승 (3) 평양공설운동장 종합전적 1승 1무 1패로
우승팀 없음
8
2차전 1933-04-08 평양
2-2
경성
무승부 (2)
9
3차전 1933-04-10 평양
3-0
경성 평양 승 (4)
10
제3회 조선체육회, 조선체육계사
공동 주최 경평전
조선중앙일보 후원
1차전 1933-09-20 경성
3-2
평양 경성 승 (4) 서울
배재중학교 운동장
종합전적 1승 1무 1패로
우승팀 없음
11
2차전 1933-09-21 경성
2-3
평양 평양 승 (5)
12
3차전 1933-09-22 경성
1-1
평양
무승부 (3)
13
제1회 경성-평양 대항
정기 축구전 (평양 주최)
1차전 1933-10-23 평양
1-1
경성
무승부 (4)
평양공설운동장 봄에는 경성팀, 가을에는 평양팀이
주최하는 홈앤드어웨이제로 변경
14
2차전 1933-10-24 평양
1-1
경성
무승부 (5)
15
3차전 1933-10-25 평양
2-1
경성 평양 승 (6)
16
제2회 경성-평양 대항
정기 축구전 (경성 주최)
조선중앙일보 후원
1차전 1934-04-06 경성
1-2
평양 평양 승 (7) 서울
배재중학교 운동장
17
2차전 1934-04-07 경성
2-2
평양
무승부 (6)
18
제3회 경성-평양 대항
정기 축구전 (경성 주최)
1차전 1935-04-13 경성
0-0
평양
무승부 (7)
경성운동장
19
2차전 1935-04-14 경성
0-1
평양 평양 승 (8)
20
자유신문사 주최 경평전 1차전 1946-03-25 경성
2-1
평양 경성 승 (5) 경성운동장 해방 후 첫 경평전이자 마지막 경평전
21
2차전 1946-03-26 경성
1-3
평양 평양 승 (9)

3도시대항축구전[편집]

  • 최대한 승패와 득점결과까지 정확하게 기록이 확인된 전적만 기재하였다.
# 대회명 구분 일시 홈팀 득점 원정팀 결과 장소 비고
1
제2회 3도시대항축구전 1차전 1939-11-10 경성
미상
평양 경성 승 (1) 경성운동장
2
2차전 1939-11-11 경성
1-3
평양 평양 승 (1)

전적 총계 (정기전만 포함)[편집]

경기수 경성 축구단 승 무승부 경성 축구단 패 경성 축구단 득점 경성 축구단 실점
21 5 7 9 37 43
경기수 평양 축구단 승 무승부 평양 축구단 패 평양 축구단 득점 평양 축구단 실점
21 9 7 5 43 37

전적 총계 (모든 대회 포함)[편집]

경기수 경성 축구단 승 무승부 경성 축구단 패
23 6 7 10
경기수 평양 축구단 승 무승부 평양 축구단 패
23 10 7 6

양 구단에서 활약하였던 선수[편집]

  • 김용식 (경성 : 1933-1937 / 평양 : 1940-1942 / 경성 : 1946-1948)

관련 항목[편집]

참고 자료[편집]

  1. "경평대항축구 전평양우승", 《조선일보》, 1929년 10월 12일 작성.
  2. 강준만. "축구는 한국이다", 《인물과사상사》.
  3. 윤경헌, 최창신『축구 = 1 : 國技축구 그 찬란한 아침 』국민체육진흥공단, 1997, p.133-137.
  4. "경평축구", 《경향신문》, 1998년 11월 9일 작성.
  5. "한국축구 70년 경성-평향전 (하)", 《경향신문》, 1965년 2월 27일 작성.
  6. "29년 첫 경평축구 개최", 《한겨레》, 1994년 10월 4일 작성.
  7. 경성과 평양이 맞부딪친 경기는 이외에도 전조선축구대회나 3도시대항축구대회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이 표에서는 경평전이라는 타이틀 매치만을 다루기로 한다.
  • 大韓蹴球協會 편 『韓國蹴球百年史』라사라, 1986.
  • 윤경헌, 최창신『축구 = 1 : 國技축구 그 찬란한 아침 』국민체육진흥공단,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