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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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간
개인 정보
출생일 1912년 11월 17일(1912-11-17)
출생지 일제강점기 평양시[1][2]
사망일 1984년 5월 29일(1984-05-29)(71세)
사망지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3]
포지션 은퇴 (과거 스트라이커)
청소년 구단 기록
1923–1924 순덕학교
1925–1928 ???
1929 광성중학교
1930–1931 숭실전문학교
대학팀 기록
연도 출전 (득점)
1934–1938 연희전문학교
구단 기록*
연도 구단 출전 (득점)
1933–1934 평양 축구단 3 (1)
1933–1934 동경유학생 축구단 0 (0)
1935–1939 경성 축구단 0 (0)
1940 함흥 축구단 0 (0)
통산 3 (1[4])
국가대표팀 기록
1935–1939 조선 0 (0)
1939–1940 일본 1 (0)
지도자 기록
1937 송도고등보통학교
1948 대한민국 (코치)
1954 대한민국 (코치)
1956 대한민국 (코치)
1960 대한민국 U-20 (단장)
행정가 기록
1939 조선축구협회 (기술지도위원)[5]
1960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6]
1961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1963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1964 대한운동구상공협회 (회장)[7]
??? 대한체육회 (이사)[8]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김성간(金成杆, 1912년 11월 17일 ~ 1984년 5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축구인으로, 경성 축구단에서 활약하였으며[9] 1950년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직을 수행하였다.

초기 생애[편집]

평양에서 태어나 순덕학교에 진학해 소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처음 축구를 접하게 되었다.[2]당시 순덕학교는 축구로 유명했으며, 담임 선생이던 김만영 선생 등 숭실대학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하던 인물들도 많았었다.[2]그 당시 공부를 하지 않고 운동 선수가 되려 하면 부랑자, 망나니가 된다는 등의 좋지 않은 집안과 주위 시선으로 인해 대부분의 선수들이 몰래 운동을 배웠고 김성간 선수도 그랬다.[2] 그러다 다른 공립학교로 전학가게 되고 그곳에서 여러 축구 대회 및 육상 대회와 야구 대회,[2]농구 대회 등에서 선수로 활약했다.[10]

축구인 생활[편집]

이후 연희전문학교 축구부에서는 주장직을 맡았으며[11]영국의 영불함대와의 환영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12]이후에 여러 팀에서 활약하였고 조선 축구 대표팀에 발탁되어, 1935년 6월에 개최된 전일본 발구 선수권 대회(제15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팀의 우승에 공헌했다.

1937년에는 송도고등보통학교의 감독직을 맡았다.[13]

1939년 8월 관동주 대표전에서 일본 대표로 첫 출전, 다음 1940년까지 일본 대표로 5경기에 출전했다. 덧붙여 국제 A 매치로 인정되는 경기는 1940년 6월 16일의 필리핀 대표전의 1경기이다.[14]

1946년 현역을 은퇴한 뒤 한국대표 스태프 등을 역임, 우승한 1956년 아시아컵에서는 코치를 맡았다.[15]

그 후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1984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3]

플레이 스타일[편집]

센터 포워드였음에도 개인 드리블 돌파에 관한 기사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단순 득점 외에도 개인 기술로 찬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선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6][17]또한 장신인데도 빠른 스피드를 지녔으며 특히 슈팅 능력 1965년 기사에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슈팅의 왕가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정확도와 파워가 강했다고 한다. 골키퍼가 막아도 그대로 공이 안쪽까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골대에 맞으면 큰 소리와 함께 오랫동안 골대가 흔들렸다고 한다.[18]

기타[편집]

  • 가족들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정대현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2]
  • 김성간 선수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국립학교에서는 일본에를 국어라고 불렀고, 사립학교에서는 일본어라고 불렀다고 한다[2]

가족 관계[편집]

각주[편집]

  1. 평원군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는 부모님 고향이 평원군이고 본인은 평양 출신이라고 밝혔다
  2. “축구인 김성간 제1회 축구선수가 된 사연”. 동아방송 DBS. 1972년 10월 23일. 
  3. “원로축구인 김성간씨”. 중앙일보. 1984년 5월 30일. 
  4. 당시에는 리그 경기보다 토너먼트 경기 위주로 진행 되었다.
  5. “축협부서결정”. 동아일보. 1939년 3월 15일. 
  6. “공항 일기”. 동아일보. 1960년 10월 11일. 
  7. “회장에 김성간씨 운동구 협의임원개선”. 동아일보. 1964년 6월 24일. 
  8. “깨진 매달의 꿈”. 경향신문. 1968년 10월 21일. 
  9. “결승에 강적 분쇄 경성축구 우승”. 동아일보. 1935년 11월 4일. 
  10. “평양농구연맹 제이일 전적 숭인31 농우 14”. 동아일보. 1931년 11월 29일. 
  11. “운동계인사”. 조선일보. 1936년 2월 27일. 
  12. “영불함대환영제축구 제일일 영함대와 연전 제일일에 일대일”. 동아일보. 1934년 10월 30일. 
  13. “종합경기축구 출전선수”. 조선일보. 1937년 10월 28일. 
  14. “国際親善試合”. 《日本サッカー協会》. 2016년 8월 16일. 
  15. "역대대표팀감독명단" 대한축구협회(大韓サッカー協会). - 歴代韓国代表監督一覧
  16. “동화군을 격퇴한 전경성군의 수훈”. 조선일보. 1935년 4월 23일. 
  17. “경성군북전하야 당당 동화 격파”. 동아일보. 1935년 4월 23일. 
  18. “한국축구 70 연 명인전 상”. 경향신문. 1965년 2월 17일. 
  19. 기영노 (2020년 7월 21일). “스포츠 사건, 농구 천재 김영일의 의문의 죽음”. 미디어피아. 

외부 링크[편집]

  • 김성간 - National-Football-Teams.com (영어)위키데이터에서 편집
  • (영어) 김성간 - Japan National Football Team Databa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