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용 (187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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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한성]]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적장자 [[이재면]]과 풍산홍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오군란]] 이전에 그는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다고 한다. [[김윤식 (1835년)|김윤식]]이 쓴 신도비명에 의하면 '이준용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리하고 행동거지가 신중하여 대원군이 매우 총애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다.<ref>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2p </ref> 이준용의 보호자였던 [[흥선대원군]]은 1873년 11월 권좌에서 물러난 후부터 둘째아들 [[조선 고종|고종]]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후 대원군은 기회만 오면 언제나 탐탁치 않은 [[조선 고종|고종]]과 민비를 폐위하고 이준용을 왕위로 앉히려 하였다. 여기에는 이준용을 앉히고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대원군의 깊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 외에도 고종정부에 반대하는 국내외 여러 정치세력들이 고종이나 순종의 대안자로서 이준용을 주목하였다.<ref>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2쪽. </ref> 그래서 이준용은 15세부터 30대 중반경까지 끊임없이 반정부세력들로부터 고종과 태자를 대신할 왕재로서 주목을 받았다.<ref>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3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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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 관료 생활 ===

2010년 8월 27일 (금) 22:48 판

영선군 이준용 신도비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년 음력 6월 25일~1917년 양력 3월 22일)은 조선의 왕족으로 조선 고종의 형 흥친왕 이재면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이다. 자는 경극(景極), 호는 석정(石庭) 또는 송정(松亭). 영선군(永宣君)의 작위를 받았으며 만년에는 신궁봉경회 총재를 지내고, 작위를 수여받았다.

고종의 잠재적 대안자이자 경쟁자였으며, 할아버지 흥선대원군고종을 폐위시키고 완은군, 흥친왕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기도를 하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만년에는 친일적 성향으로 변절했다.

생애

생애 초기

1870년 한성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적장자 이재면과 풍산홍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오군란 이전에 그는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다고 한다. 김윤식이 쓴 신도비명에 의하면 '이준용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리하고 행동거지가 신중하여 대원군이 매우 총애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다.[1] 이준용의 보호자였던 흥선대원군은 1873년 11월 권좌에서 물러난 후부터 둘째아들 고종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후 대원군은 기회만 오면 언제나 탐탁지 않은 고종과 민비를 폐위하고 이준용을 왕위로 앉히려 하였다. 여기에는 이준용을 앉히고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대원군의 깊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 외에도 고종정부에 반대하는 국내외 여러 정치세력들이 고종이나 순종의 대안자로서 이준용을 주목하였다.[2] 그래서 이준용은 15세부터 30대 중반경까지 끊임없이 반정부세력들로부터 고종과 태자를 대신할 왕재로서 주목을 받았다.[3]

관료 생활

1884년 11월 갑신정변 때 이준용은 개화파에 의해 정9품 세자익위사 세마(洗馬)에 올랐으며,[4] 1885년 8월 동몽교관에 제수되었고, 1886년 충량과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에 임명되었다.[5]

군주의 대안자

1차 추대 시도

1886년 고종과 명성왕후는 갑신정변 후부터 더욱 심해진 청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인 친러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위안 스카이에 의해 다시금 고종의 대안자로 고려되었다. 위안스카이1885년 10월 보정부에서 환국한 흥선대원군과 협의하여 1886년 초부터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세자로 삼아 대원군을 섭정에 오르게 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왕실과 정부로부터 친러반청세력을 일소하려는 정치적 음모를 공공연히 추진하였다.[6] 1887년 예문관 검열, 홍문관 부응교루 지냈고, 이해 12월 모친상으로 3년간 상복을 입었다.[5] 이후 홍문관예문관의 여러 직책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대제학, 도승지에 올랐다.

1890년 승정원 동부승지, 형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을 거쳐 1891년부터 1896년 6월까지 홍문관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 승정원 도승지, 이조 참의 등의 요직을 맡았으며[7] 1890년대 이후 숙부인 대한제국 고종의 정치적 경쟁자로 부상하였고,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1894년 쿠데타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자객을 보내 김학우를 암살한 혐의로 교동도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 만에 특전으로 석방되어 할아버지 대원군과 함께 마포 공덕리의 별장인 아소정에 기거하였다. 1895년 10월(음력 8월) 을미사변 당시에 대원군의 입궐을 상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8]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학자 매천 황현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그에 의하면 운현궁의 폭탄테러 사건은 명성황후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하였다. [9] 이때 흥선대원군의 사랑채와 이재면과 이준용 부자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각되었다. 이는 1874년 흥선대원군명성황후의 오라비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일가를 폭사시켰던 전례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이었다. [9]

2차 추대 시도

1894년 6월 22일부터 흥선대원군명성황후 폐서의 취지를 적은 문건을 일본 공사 오토리에게 제시하였다. 이준용도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스기무라 서기관 등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실패하였다.[10] 흥선대원군6월 24일 이준용을 별입직에 임명하여 고종명성황후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하였다.[11] 7월 15일 종정경, 친군통위사 겸 정부당상, 내무아문협판에 임명되었다.[11]

7월 17일 군국기무처가 이준용을 군국기무처 의원에 임명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였지만 이준용의 권력확대를 우려하고 있던 고종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7월 19일 그를 내무대신서리에 임명하여 내정을 장악하게 했다.[12]

1894년 10월 중순 이후 일본측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항일활동을 전개한 증거들을 가지고 추궁하며 양인에게 공직 사퇴를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정부는 고종이 평양의 청장들에게 보낸 밀서를 일본측이 문제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대원군의 축출에 동의했다. 이에 흥선대원군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 공사에게 자신이 추진한 항일운동에 대해 사과하고 손자 이준용의 장래 교육을 부탁하였고, 이준용도 자신이 시골 사람들과 부주의한 접촉을 하였다고 하며 동학지도부와 연대하려던 사실을 완곡하게 인정하였다. [13]

10월 26일 고종에게 통위사직을 사직할 의사를 밝혔고, 11월 21일 수락되었다. 12월 17일 박영효가 내무대신이 되면서 내무대신서리직을 상실하였다.

정치적 몰락

1895년 3월 24일 개화파인 김학우를 암살했다는 혐의로 법무아문에 체포당하였다. 그는 20여일 간 혹독한 심문을 당하고 개화파 서광범이 주재하는 특별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 결과 이준용 등 6인이 대역모반죄, 김학우 살인죄, 모살죄 등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사형 교살형을 선고받았다. 흥선대원군은 어떤 대가를 주고서라도 손자를 구하기 위해 이노우에 공사와 각국 공사들을 찾아가 절박한 부탁을 하였고, 대원군의 부탁을 받은 이노우에와 각국 공사들은 이준용에 대한 온건한 처벌을 호소하였다. 결국 그는 사형을 면하고 종신유배형으로 결정되었다. 4월 19일 고종의 특별 사면조치로 강화부 교동도에 10년 유배형을 받았다가, 6월 2일 석방되었다.[13]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일본의 도움으로 김홍집 내각에 발탁되어 내부 협판, 통위사에 등용되었다. 일본 공사의 강요로 일본으로 유학하고, 주차(駐箚) 일본공사가 되었다.[8] 이때까지는 극렬한 배일주의자였으나 뒤에 친일파로 변절했다고 알려지고 있다.[14]

만년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하자 일본을 떠나 유럽 각지를 유람하고 2년 뒤에 돌아와 일본 지바 현에서 한거하였으며, 1898년 안경수의 쿠데타 사건에 연루되어 망명 상태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1907년 돌아왔다.

1907년 8월 14일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져 종일품 숭정대부의 자품을 받고 대한제국 육군 참장(參將)이 되었으며, 12월에 이화 대수장(李花大綏章) 1908년 9월 서성 대수장(瑞星大綬章)을 차례로 받았다.

1909년부터 1910년까지 친일 단체인 신궁봉경회 총재를 맡아, 한국의 건국 시조인 단군을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에 부속되는 구도로 신궁에 함께 배치하여 한국 역사를 일본 역사에 종속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한 바 있다. 1910년 8월 5일 종친으로 가장 높은 자품인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마지막으로 8월 27일 대한제국 최상위 훈장인 금척대수장(金尺大綏章)을 받았다.

일본으로부터는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훈1등 욱일장을 수여받았다.[15]

일제 강점기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이준용도 왕손의 대우를 받았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칙에 따라 아버지 이재면이 이희공(李熹公)에 봉해졌는데, 이재면이 곧 사망하자 이준(李埈)으로 개명하고 공위를 계승하여 이준공(李埈公)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한일병합 뒤 일제는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은사금을 주었다. 1910년 8월 중추원 고문직을 받았고, 그의 부실 이옥경은 총독부 간부나 고위 장성과 어울려 친일행각을 벌이기도 했다.[16]

조선의 왕가는 자손이 귀한 탓에 몇 사람만 왕족의 대우와 특권을 받았다.[16] 이준용은 고종의 조카로 직계왕손이 아니었으나 왕족 대우를 받은 것은 친일적 성향 때문이었다.< 일제는 그에게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이라는 훈장을 주었는데 그는 이를 벽에 걸어놓고 절을 하며 은혜에 감격했다 한다.[16]

1914년 서조모 서씨(徐氏)가 사망하자 일본 제국으로부터 장례비로 400원을 지원 받았다.

아들이 없던 그는 1916년 첩인 전순혁에게서 딸 이진완을 보았다. 1917년 양력 3월 22일에 사망했다. 이에 사촌 동생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양자가 되어 가계와 세습 공위를 이었다.

평가

그는 무골호인에 가까운 아버지 이재면보다는 능력과 야심이 남달랐던 조부 흥선대원군을 닮았다. 25~27세경의 이준용은 주변으로부터 유능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이준용을 종친 중에서 가장 유위의 기상이 넘치는 인물, 당년이 겨우 25세에 불과하지만 대단한 기상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하였다.[17] 니치니치(Nichi Nichi) 신문의 서울특파원도 이준용을 '조선에서 가장 재능있는 젊은이' 중의 한사람이라고 말했다. 동경 주재 영국 공사 사토 경(Sir. Ernest Wstow)도 1896년 2월 일본 도쿄에서 그를 면담한 후에 유능한 인물이라는 평을 내렸다.[18]

사후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아버지 이재면과 함께 포함되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가족 관계

부실 전순혁과 사이에서 딸 이진완을 낳았으나, 후사가 없어 의친왕의 차남 이우를 양자로 삼았다.

같이 보기

참고자료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이준용〉 (PDF). 《2006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서울. 898~912쪽쪽. 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주석

  1.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2p
  2.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2쪽.
  3.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3쪽.
  4.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3쪽.
  5.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4쪽.
  6.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4쪽.
  7.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5쪽.
  8.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초 1쇄판. 서울: 효형출판. 34쪽쪽. ISBN 89-86361-57-4. 
  9.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5쪽.
  10.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6쪽.
  11.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7쪽.
  12.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7~318쪽.
  13.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0~321쪽.
  14. 《이준용》. 2008년 9월 4일에 확인함. 
  15.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4쪽.
  16.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135페이지
  17.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0쪽.
  18.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