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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6일 (일) 16:19 판

홍영식

홍영식(洪英植, 1855년 음력 12월 29일~1884년)은 조선의 문신이며, 구한말 개화파 정치인이며 갑신정변의 주역[1]으로,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서울 출신이다. 한국 우편, 우표 제도의 선각자이기도 하다.[2][3]

생애

출생 초기

홍영식은 1855년 음력 12월 29일 후에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홍순목(洪淳穆)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홍순목에게는 아들 홍만식(洪萬植)이 있었으나 홍영식의 큰아버지 홍순경(洪淳敬)이 후사가 없이 죽자 1849년 홍순경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1853년 부인을 잃어 재취를 하여 얻은 아들이 바로 홍영식이다.[3] 박규수의 문하생으로서 서재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이동인 등과 서로 잘 알고 지냈다.[출처 필요]

관직 생활

1872년 음력 7월 칠석제에서 대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홍순목은 아들에게 관직을 맡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판단하여 고종에게 건의하여 2년간 사가독서를 허락받았다. 이후 1878년 음력 3월 9일 교리, 1878년 음력 11월 29일 문학, 1880년 음력 8월 9일 상례, 1880년 음력 12월 참의로 승진했다.[3]

견문과 개화 활동

1881년(고종 18년)에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정양 등과 함께 일본을 시찰했다. 이때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온 이상재와도 교우하였다. 이후 1882년에는 김옥균·박영효·서광범과 함께 국가의 개혁 방안을 토론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883년 미국의 사절에 대한 답변으로 보빙사가 파견될 때 보빙사의 부사(副使)로서, 민영익,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다.

우편의 선구자

1881년 신사유람단일본에 파견할 때 홍영식도 이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당시 시찰 대상은 병제였으나, 홍영식은 우편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 우편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마에지마의 자서전인 《우편창업담》에 홍영식이 역체국에 찾아와서 우편에 관한 일들을 질문하여 모든 서류를 증여하고 직원으로 하여금 우편실무를 설명시키고 자신도 홍씨를 만나 우편 제도를 설명하고 조선에도 빨리 우편을 개설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3]

1882년 음력 12월 4일 창시된 교섭통상아문에 근대식 체신기관인 우정사(郵程司)가 설치되자 홍영식은 우정사 담당 협판이 되었다.[3] 1883년 음력 9월 보빙사의 부사로 미국에 갔을 때는 뉴욕의 우체국과 전신국을 시찰하였으며, 귀국 후 고종에게 우편 업무의 개설을 건의하였다.[3][2] 1884년 음력 3월 27일 우정총국을 창설하게 되었고, 우정국총판에 임명되었으며, 음력 10월 1일(양력 11월 18일) 서울·인천 간에 근대식 우편제도의 실시를 보았다.[3]

갑신정변의 실패와 최후

1884년 개화파 주도로 갑신정변이 단행되었으나 청나라의 주둔으로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홍영식은 청군에게 살해되었다.[3] 그는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사형되었는 설도 있다.[4]

또한 1884년 양력 12월 17일 부친 홍순목과 형 홍만식은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그날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따라 일가 20여 명은 독약을 받고 집단 자살하고, 홍만식은 스스로 자수해서 살아남았으나, 1년이나 복역했다. [3]

평가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홍영식을 건방지다고 혹평하였다.[3]

같이 보기

참고 자료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