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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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5년]][[신문왕]] 5년 [[보덕국]]의 고구려유민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였다.
* [[685년]][[신문왕]] 5년 [[보덕국]]의 고구려유민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였다.
신라귀족 [[옥보고]]가 이곳에서 고구려의 [[칠현금]] 전수받아 이를 개량해 [[거문고]]를 만들었다.
신라귀족 [[옥보고]]가 이곳에서 고구려의 [[거문고]] 전수받아 이를 개량해 30여곡을 만들었다.


* 고려시대에 [[940년]] [[태조]] 23년 [[남원부]]가 되어 인근 5현을 관할하였다.
* 고려시대에 [[940년]] [[태조]] 23년 [[남원부]]가 되어 인근 5현을 관할하였다.

2009년 12월 8일 (화) 23:45 판

역사상의 남원(南原)은 일제에 의해 운봉군과 통합되기 전의 남원군의 영역인 남원시서부 지역과 인근 임실군, 장수군일부지역이다.

유래

가야의 기문(己文)지방의 일부인 하기물(下奇物),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다. 기물과 고룡이라는 이름은 서로 연관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龍)의 순 우리말이 "미르"이므로 둘 다 "고밀Komir"로 개련되기 때문이다.[1] 기문지방은 우륵의 12곡에 나오는 남원시내의 하기물과 지금의 남원시 운봉읍의 옛 모산현,또는 장수군 번암면이나 임실군 청웅면으로 여겨지는 거사물현에 있던 상기물지역으로 후기 가야세력이 호남 서부지역까지 진출했음을 시사한다. 남원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소경의 설치 이후이다.

역사

  • 5세기 이후 대가야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하기물이 되었다.
  • 6세기 전반 백제가야연맹이 기문지방을 놓고 충돌하였다. 무령왕에 의해 백제는 하기물을 점령해 고룡군을 설치하였다.
  •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패배하였고 향후 3년동안 남원 인근의 거물성(居勿城)에서 백제의 잔당들이 항전했다.
  • 웅진도독부에 의해 지심주(支심(수변尋)州) 기문현(己汶縣)또는 대방주(帶方州)에 속하였다.
  • 685년신문왕 5년 보덕국의 고구려유민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였다.

신라귀족 옥보고가 이곳에서 고구려의 거문고를 전수받아 이를 개량해 30여곡을 만들었다.

  • 조선시대에 1413년 태종13년 남원도호부로 승격하였다. 남원도호부는 1부 1군 9현( 담양·곡성·창평·구례·순창·임실·무주·진안·장수 등)을 관할하였다.
  • 1457년 남원진영이 설치되어 인근6현(곡성·옥과·구례·창평·장수·운봉)을 관할하였다.
  • 1654년 전라좌영이 설치되었다.
  • 1895년 전국의 행정체계가 23부로 개편되면서 이전 전라도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남원부가 실치되어 그 치소가 되었다.

본래의 남원부는 군(郡)이 되었고 남원군을 포함해 16군을 관할하였다.

  • 1896년 13도제로 환원되어 남원부가 전라남,북도로 분할 편입되었다. 남원군은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
  • 1906년 지사면·둔남면 등이 임실군으로 편입되었다.
  • 1910년 관할의 48방(坊)을 22개 면으로 통폐합하였다.
  • 1911년 일부지역이 순창군에 편입되었다.
  •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통폐합으로 서방의 운봉군을 합병하였다.
  • 1931년 지금의 남원시내가 남원읍 으로 승격되었다.
  • 1981년 남원읍이 남원시로 승격, 분리되었다.
  • 1995년 남원군과 남원시가 도농복합의 남원시로 통합하여 지금에 이른다.


같이 보기

주석

  1. 국사편찬위원회 편집부(1970)한국사 7 (삼국의 정치와 사회3 신라.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