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일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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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의합니다. 위키백과 자체는 신뢰할 만한 출처가 아니기 때문에, 중국어 위키백과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사용자:Pudmaker|adidas]] ([[사용자토론:Pudmaker|토론]]) 2009년 11월 5일 (목) 15:03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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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日磾는 김'밀'제로 읽혀야 옳습니다. IP 유저는 이것을 단순히 중국어 위키백과를 참고하여 편집한 것이 아니라, 현대에 까지 구전되는 독음이자 학계에서 당연시되는 독음이므로 (따라서 중국어 음운 연구에 쓰이고 있기에) 이와 같이 편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역사학계가 아닌 언어학계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언어학계에서는 金日磾의 日은 [[반절|彌畢切]]이며, 역사적으로 密와 혼동되어 표기됨을 근거로 한국한자음에서도 명백히 「밀」로 간주합니다. 또한, [[판우윈]]은 이를 근거로 상고음 日을 *mbrig로 재구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학자에 따라 金의 말음 -m의 영향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日의 독음 「밀」 자체는 이곳 토론문서에서 논의될 주제는 아닙니다. 한국에서 「김일제」로 간주되는 경우는 단순한 유추이며, 이는 교정되어야 합니다. 중국어 위키백과 mi1, 일본어 위키백과 みつ(mitu)와 마찬가지로,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독음을 「밀」로 삼아야 마땅하겠습니다. --[[사토:고솜|고]]·[[특수:기여/고솜|솜]] 2020년 1월 27일 (월) 00:23 (KST)
:: 金日磾는 김'밀'제로 읽혀야 옳습니다. IP 유저는 이것을 단순히 중국어 위키백과를 참고하여 편집한 것이 아니라, 현대에 까지 구전되는 독음이자 학계에서 당연시되는 독음이므로 (따라서 중국어 음운 연구에 쓰이고 있기에) 이와 같이 편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역사학계가 아닌 언어학계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언어학계에서는 金日磾의 日은 [[반절|彌畢切]]이며, 역사적으로 密와 혼동되어 표기됨을 근거로 한국한자음에서도 명백히 「밀」로 간주합니다. 또한, [[판우윈]]은 이를 근거로 상고음 日을 *mbrig로 재구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학자에 따라 金의 말음 -m의 영향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日의 독음 「밀」 자체는 이곳 토론문서에서 논의될 주제는 아닙니다. 한국에서 「김일제」로 간주되는 경우는 단순한 유추이며, 이는 교정되어야 합니다. 중국어 위키백과 mi1, 일본어 위키백과 みつ(mitu)와 마찬가지로,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독음을 「밀」로 삼아야 마땅하겠습니다. --[[사토:고솜|고]]·[[특수:기여/고솜|솜]] 2020년 1월 27일 (월) 00:23 (KST)
::: {{핑|Xakyntos|Synparaorthodox}} '밀' 운운에 관한 연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입니다. 다만, 이미 그것으로는 되돌리기가 힘들 만큼 고착된 '김일제' 때문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근거 제시는 아닙니다만, 현제 웹상에서 '김밀제'라는 키워드 자체가 오로지 이곳에서만 검색이 되는 실정입니다. [[외효]]를 '''외오'''라고, [[회계군|회계]]를 '''쾌계'''라고 등재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용자:威光|<span style="font-family: 'MS Mincho'; color: #C90000;">威光</span>]]''' <span style="font-size: smaller; font-family: '돋움';">([[사용자토론:威光|토론]] ・ [[특수:기여/威光|기여]])</span> 2020년 1월 27일 (월) 00:59 (KST)
::: {{핑|Xakyntos|Synparaorthodox}} '밀' 운운에 관한 연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입니다. 다만, 이미 그것으로는 되돌리기가 힘들 만큼 고착된 '김일제' 때문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근거 제시는 아닙니다만, 현제 웹상에서 '김밀제'라는 키워드 자체가 오로지 이곳에서만 검색이 되는 실정입니다. [[외효]]를 '''외오'''라고, [[회계군|회계]]를 '''쾌계'''라고 등재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김밀제든 김밀저든) '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제 와서 고치기에는, '김일제'가 완전히 정착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용자:威光|<span style="font-family: 'MS Mincho'; color: #C90000;">威光</span>]]''' <span style="font-size: smaller; font-family: '돋움';">([[사용자토론:威光|토론]] ・ [[특수:기여/威光|기여]])</span> 2020년 1월 27일 (월) 00:59 (KST)


== 출처를 제시하여 주십시오 ==
== 출처를 제시하여 주십시오 ==

2020년 1월 27일 (월) 01:02 판

김인문

현재 김일제 관련 문서에서 대단히 독단적인 주장이 여과없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김인문의 묘비에 김일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근거 자료로 제시된 신문기사 어디에도 김인문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김인문의 묘비는 나오지도 않고, 당연히 묘비에 김일제 기사가 들어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즉 잘못된 근거 자료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보고 이렇게 작성하셨는지 정확한 출처를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거짓된 근거를 가지고 자의적인 편집을 하는 행태는 명백한 위반 행위입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4월 17일 (금) 00:05 (KST)답변

이보시오. 상당히 무례한 분이시군요. 기사 본문에 이거 안보입니까? [1] - 신라의 태조는 박혁거세다. 그러나 놀랍게도 문무왕릉 비문에는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星漢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한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 역시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기사나 읽어보시고 허위주장인지 아닌지를 논하시지요? 위반? 본문에 뻔히 설명된 것도 읽어보지도 않으면서 위반을 말하기 전에 당신부터 성의를 보이십시오, 이런것까지 떠먹여 드려야 합니까? --100범 (토론) 2009년 4월 17일 (금) 10:20 (KST)답변
김인문의 묘비에는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고 되어 있지 성한왕의 시조는 김일제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사 속 어디에도 김인문의 묘비에 김일제가 언급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명명백백한 거짓 팩트입니다. 명백하게 명시된 근거를 가져오시지 못한다면 삭제 대상입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4월 17일 (금) 18:10 (KST)답변
해당 토론에 대한 답변이 없고, 실제 김인문의 묘비를 확인해본 결과 명백한 오류이므로 수정하겠습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4월 20일 (월) 10:56 (KST)답변

우리 민족이 대흉노제국의 후예임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인데 이를 부정하시나요? Gaganara (토론) 2009년 4월 20일 (월) 11:00 (KST)답변

어느 만천하에 그 사실이 공개되었고 명징하게 증명되었으며 학계의 공인을 받았는지를 먼저 밝혀주셔야 귀하의 그와 같은 주장은 증명될 것입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4월 20일 (월) 11:38 (KST)답변
조선일보 논평(4.23)에서도 김일제와 관련된 주장을 '학계 일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설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이른 듯합니다. jtm71 (토론) 2009년 4월 25일 (토) 05:12 (KST)답변

4월20일 편집 사유

위 김인문 관련 토론에서 일부 사유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전체 내용 자체가 끊임없이 중언부언되고 있고, (예를 들어 '문무왕릉비에 투후가 나온다'라거나 '김성한은 투후의 7대손, 김성한은 문무왕의 15대조'라는 똑 같은 내용이 살짝 어투만 바꿔서 3~4차례나 계속 나오는 등) 특정 방향에 엄청나게 편중해서 서술되어 있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에 따라 중언부언되는 것은 모두 삭제하고 하나로 모아서 서술하였으며, 기타 주석들도 정리하였습니다. 또한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 김일제라는 인물과 무관한 내용(김성한에 대한 설명이나 문무왕에 대한 설명)은 삭제하거나 이동하였습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4월 20일 (월) 11:27 (KST)답변

내용 중복

문무왕과 관련하여 문무왕, 조갑제 문서에도 같은 내용이 있는데, '조갑제' 문서의 것만 남겨 놓고 나머지 내용들은 삭제하거나 요약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jtm71 (토론) 2009년 4월 25일 (토) 05:02 (KST)답변

조갑제가 평가한 내용이라서 삭제해야 된다는 겁니까? 문무왕에 대한 평가이면서 김일제와 관련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유지해야 되겠읍니다. --100범 (토론) 2009년 4월 25일 (토) 05:15 (KST)답변

중복되는 것도 문제이고, 그 분이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의견은 비중 있게 고려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용된 서적의 저자 또한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위키백과:신뢰할 수 있는 출처의 내용을 참조하세요. jtm71 (토론) 2009년 4월 25일 (토) 05:22 (KST)답변
인물이나 사건, 그리고 문무왕 비판에 대한 반론 등은 누구나 내릴수 있는 것입니다. 조갑제는 일반 아마추어 시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평가는 비중있지는 않더라도 어떻게 됐든 역사에 대한 의견이자 인물평이니 다루어져야 합니다. --100범 (토론) 2009년 4월 25일 (토) 05:29 (KST)답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조갑제 정도의 인물이 내린 평가를 다뤄야 한다면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내린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평가들을 모두 다 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당연히, 그럴 수야 없겠지요. 그렇다면 대표적이고 비중있는 평가를 다루는 것이 백과사전의 목적에 맞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조갑제 같은 인물의 평가를 대표적이고 비중있는 것이라고 평할 가치는 없다고 봅니다. 단순히 좌·우를 떠나서 조갑제라는 인물이 역사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선 인물이라고 생각치는 않습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4월 25일 (토) 10:42 (KST)답변
역사 학부생인 저나 조갑제씨나 역사에 관해서는 비전문가라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보는데요. 그의 발언이 이 항목에서 언급되어야 할 것은 아니지만, 조갑제 항목에서는 '조갑제의 생각'을 묘사하는 한 부분으로 쓸 수는 있다고 봅니다. adidas (토론) 2009년 4월 25일 (토) 13:02 (KST)답변

소호금천씨 관련 내용 삭제 사유

해당 내용은 모두 "신라의 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내용으로 김일제와 전혀 무관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경주 김씨 문서나 신라 문서에서 제시될 내용이며, 김일제 문서와는 무관한 내용이므로 삭제합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7월 22일 (수) 14:49 (KST)답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지요. 신라의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이라면 김일제도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얘기인데 전혀 무관하다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이곳에 인용한 것은 삼국사기의 김부식 주장에 참고할 가치는 있다고 보기에 적어 보았습니다. 가야계의 김수로왕 후손에 대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紫桃꽃 (토론) 2009년 7월 23일 (목) 12:10 (KST)답변

:: 해당 신문기사만 놓고 보아도, "김일제 계의 시조"와 "소호금천씨 계의 시조"라고 해서 둘이 서로 대립되는 반대항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김일제는 소호금천씨의 후손이 아니거든요. 김일제는 흉노인이며, 중국사료에서 흉노인들은 우임금의 후손이라 기록될 뿐입니다. 게다가 문무왕릉비에는 화관지후라고도 기록되어 있지요. 즉, 김일제와 소호금천씨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신문기사 상에도 이미 시조가 김일제냐 소호금천씨냐 하고 궁금증을 표현하고 있느데 생뚱맞게 김일제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신문기사나 그외 직접 김일제와 소호금천씨의 관계를 언급한 근거를 첨부하지 않는 이상 해당 내용은 김일제와 완전히 무관합니다. 해당 내용은 경주 김씨 같은 문서에서 김씨의 시조 설화 계통을 말할 때나 쓰일 내용이지, 김일제에 대한 내용이 아닙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7월 23일 (목) 13:58 (KST)답변

위 내용은 제가 신문기사를 정확하게 읽지 않아 잘못 이해한 내용입니다. 저의 잘못된 편집은 바로잡았으며, 해당 편집도 더 깔끔한 형태로 수정하였습니다. 잘못된 편집을 한 점 사과드립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7월 23일 (목) 14:07 (KST)답변

극히 생략하여 일반화하는 편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전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살려내야 맞다고 봅니다. 하여 내용을 보충하여 수정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흉노족이요, 오랑케이지만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흉노족과 흉노족의 일파인 선비족이고 몽골족,여진족,동이족인데 모화사상이란 것도 중국의 찬란한 역사중 과연 진정한 한족(漢族)이 차지하였던 중원의 나라가 얼마였는지 안다면 우리 한국인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紫桃꽃 (토론) 2009년 7월 24일 (금) 14:39 (KST)답변

이 문서는 김일제에 대한 문서이지 소호금천씨나 경주 김씨에 대한 문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소호금천씨와 김일제, 경주 김씨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시각이 있다"는 내용이면 충분합니다. 김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도 없는 삼국사기의 사료 내용을 옮겨 놓는다고 문서의 내용이 풍성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해당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경주 김씨 문서나 신라 문서에서 서술하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아울러 이번 자도꽃 님의 편집은 문법에도 맞지 않는 편집이므로 불필요한 내용은 삭제하고 관련 내용을 조금 더 추가하여 정리하였습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7월 24일 (금) 15:59 (KST)답변

'문법에도 맞지 않는 편집'이라니 구체적으로 무엇이 맞지 않다는 얘기지요? Xakyntos 님은 왜 자꾸 시비거리를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한번 묻고 싶군요. 님의 하는 편집만이 정석이라는 생각인가요? 그리고 왜 그런 자세를 견지하는지 다분히 다른 사용자에게 오해의 소지가 느껴질 수 있는 행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알면서 모른체 하는 건가요? 紫桃꽃 (토론) 2009년 7월 24일 (금) 16:45 (KST)답변

자도꽃님의 자세는 "왜 자꾸 시비거리를 만드냐"고 따질 자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몽골족, 여진족, 동이족과 현대 한국인이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근거' 없이 편집한다면 백과사전적인 서술이 절대 아닙니다. adidas (토론) 2009년 7월 24일 (금) 21:36 (KST)답변

adidas님은 무슨 얘길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김일제 문서에 그 내용을 추가한 것도 아니고 다만 기록 인용된 내용을 살려야한다는 것인데 백과사전이라니 언제 몽골,여진,동이족의 내용이 김일제 문서에 언급되었나요? 토론 문서에 모화사상운운하니 중국의 너른땅도 진정한 한족(漢族)이 지배한 것은 별로 없다는 말을 하였던 것인데 이곳에 왜 그말이 나오지요? 그리고 님에게 따지는 것도 아닌 건데 왠 참견이지요? 학부생이면 학부생답게 자신에게 관련된 것이나 자세문제를 언급하는게 경우에 맞겠지요..紫桃꽃 (토론) 2009년 7월 24일 (금) 21:59 (KST)답변

김일제 문서에서 김일제와 직접적으로 관계도 없는 삼국사기의 사료들을 잔뜩 옮겨 놓는 것이 올바른 편집이라 생각하십니까? 그 삼국사기의 사료 내용 어딘가에 김일제와 직접 관계된 내용이 있는지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자도꽃 님이 옮겨 놓은 사료의 내용은 그저 "신라나 가야의 왕족이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다"는 내용일 뿐, 그 어디에도 김일제라는 인명이 나오지도 않고, 심지어 최근에 발견된 재당신라인의 묘지명이 아니었으면 아예 "관련성"조차 없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언급된 소호금천씨 시조설"이라는 말이면 충분한 것이지, 그 시조설에 대한 내용을 구구절절이 옮겨야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백과사전에는 백과사전에 어울리는 내용과 문체가 있는 겁니다. 세상 어느 백과사전에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관성도 없는 사료의 내용 직접을 싣는 경우가 있답니까? 마지막으로, 귀하께서 하셨던 편집이라도 한 번 읽어보십시오. 과연 문법에 맞는 문장인지.--Xakyntos (토론) 2009년 7월 25일 (토) 09:17 (KST)답변

'잔뜩'이라는 말과 '구구절절'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언급만 했을뿐 일일히 논거한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문법이라는 말에 나도 국어에 관련한 일에 종사했던 사람이고 어느정도는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편집만이 올바른 편집인양 삭제로 일관하니까 하는 얘기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독선같다는 느낌은 안드는지..紫桃꽃 (토론) 2009년 7월 25일 (토) 12:36 (KST)답변

독선이지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초지일관 유지하고, 혹여 스스로가 틀렸음이 밝혀진다면 겸허하게 수용하고 오류를 고치는 것. 이것을 독선이라 한다면 독선이 맞습니다. 옳지 못한 것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 독선이라 한다면 독선이 맞습니다. 저는 적어도 왜 제가 옳은지, 왜 고치고 삭제하였는지를 모두 밝히고 이해를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도꽃 님께서는 그저 "시비거리"라거나 "삭제로 일관한다"라고 말씀하실 뿐, 왜 자신의 편집이 필요한지, 아니면 왜 저의 편집이 옳지 않은지 밝히시지 않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독선적인 것입니까?--Xakyntos (토론) 2009년 7월 25일 (토) 20:56 (KST)답변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곳 위키백과는 두부류의 편집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Xakyntos님처럼 시비를 만들어 가면서 이루워지는 편집이 있는가하면 어느 문서는 서로 보충해가면서 이해로 만들어가는 편집이지요. 지금까지 Xakyntos님의 뜻에 따라 이루워진 편집은 피곤하다는 느낌으로 시비를 만들어봤자 결론이 없을 것같아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태반일 겁니다. 말들은 안하였지만 그런 분들이 많았으리라 봅니다. 그것이 님이 생각하는 소명의식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위키백과의 수많은 편집이 서로의 도움과 이해로 순기능 방향으로 이끌어간다는 생각에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분들이 위키백과에 있어 좋은 이웃과도 같은 분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紫桃꽃 (토론) 2009년 7월 25일 (토) 21:24 (KST)답변

김일제#견해의 일부 항목 삭제 사유

문무왕, 김인문, 흥덕왕 비문에는 소호금천을 조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기원전 2500년대의 소호금천의 시대는 모계사회로 부계 조상을 파악하기는 현시점, 혹은 통일 신라 후기에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통일 신라 후기에 도교와 함께 삼황오제 이야기가 한반도에 전파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천왕, 단군, 소호금천의 시조 의식은 도교와 결합된 삼황오제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통일 신라 후기 삼황오제중 신라왕성과 친근한 소호금천을 조상일거라는 막연한 관념이 생겨났고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기록되었다고 할수있다. 소호금천 후손설은 완전히 검증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막연히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해당 내용은 경주 김씨나 신라 왕실의 출자 전승에 대한 내용으로 김일제와 무관한 내용입니다. 더불어 위 내용은 출처도 제시되어 있지 않아 독자연구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삭제하고 토론에 보존합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10월 6일 (화) 18:57 (KST)답변

김일제 후손 관련 내용 삭제 사유

백과사전의 항목에는 해당 항목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내용만 존재해야 합니다. 김일제 문서에 금선이나 금위의 생애나 약전이 들어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금선이나 금위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해당 내용들이 있을 가치가 있으나, 금선, 금위, 영양남씨 등의 문서가 모두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김일제 문서에서는 "김일제의 후손으로 금선, 금위가 있다."는 표현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삭제하고 평이한 형태로 수정하였습니다. 또한 영양남씨 관련 내용에는 김충이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만, 관련 문맥으로 보아 연관성이 있다고 보아 문구를 추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출처가 없으므로 출처 요구 틀을 함께 달았습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10월 9일 (금) 11:09 (KST)답변

김일제의 음에 대하여

아이피 사용자께서 김일제의 발음이 중국 고서에 따르면 김밀제이다라고 편집하셨습니다. 현재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김일제의 음에 대하여 Ji midi(金密低)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중국어의 발음일 뿐이며, 한국어의 한자 발음이 중국어 발음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한, 설사 중국 고서의 발음을 따른다고 쳐도 김밀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日을 密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면서 磾를 低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무시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편집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 고서가 무엇인지에 대한 출처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출처를 제시하시기 바라며, 설사 출처가 제시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역사학계 차원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출처가 정확하게 제시된다면 김일제는 김밀저(金密低)로 읽어야 한다는 중국의 고서 《○○》의 견해도 있다는 형태로 서술되어야 합니다.--Xakyntos (토론) 2009년 10월 29일 (목) 09:35 (KST)답변

동의합니다. 위키백과 자체는 신뢰할 만한 출처가 아니기 때문에, 중국어 위키백과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adidas (토론) 2009년 11월 5일 (목) 15:03 (KST)답변
金日磾는 김'밀'제로 읽혀야 옳습니다. IP 유저는 이것을 단순히 중국어 위키백과를 참고하여 편집한 것이 아니라, 현대에 까지 구전되는 독음이자 학계에서 당연시되는 독음이므로 (따라서 중국어 음운 연구에 쓰이고 있기에) 이와 같이 편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역사학계가 아닌 언어학계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언어학계에서는 金日磾의 日은 彌畢切이며, 역사적으로 密와 혼동되어 표기됨을 근거로 한국한자음에서도 명백히 「밀」로 간주합니다. 또한, 판우윈은 이를 근거로 상고음 日을 *mbrig로 재구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학자에 따라 金의 말음 -m의 영향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日의 독음 「밀」 자체는 이곳 토론문서에서 논의될 주제는 아닙니다. 한국에서 「김일제」로 간주되는 경우는 단순한 유추이며, 이는 교정되어야 합니다. 중국어 위키백과 mi1, 일본어 위키백과 みつ(mitu)와 마찬가지로,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독음을 「밀」로 삼아야 마땅하겠습니다. --· 2020년 1월 27일 (월) 00:23 (KST)답변
@Xakyntos, Synparaorthodox: '밀' 운운에 관한 연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입니다. 다만, 이미 그것으로는 되돌리기가 힘들 만큼 고착된 '김일제' 때문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근거 제시는 아닙니다만, 현제 웹상에서 '김밀제'라는 키워드 자체가 오로지 이곳에서만 검색이 되는 실정입니다. 외효외오라고, 회계쾌계라고 등재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김밀제든 김밀저든) '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제 와서 고치기에는, '김일제'가 완전히 정착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威光 (토론기여) 2020년 1월 27일 (월) 00:59 (KST)답변

출처를 제시하여 주십시오

*하지만 이 내용은 저자의 창작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기록대로 왕망의 난에 김일제가 관련되어 있다면, 후한 역사에 김일제 후손이 등장하지 않아야 맞는다.

  • 그러나 소호금천이라는 명칭은 소호라는 사람이 금천에 살았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특정 성씨와 관련이 없으며, 실존성이 명확하지 않다. 예을 들면 황제는 삼황과 오제가 합쳐진 말로, 한 사람의 특정인을 가리키고 있지 않음에도, 중국 대부분의 성본들이 막연히 조상을 미화하기 위하여 무분별하게 시조로 설정하는 경우가 있었다. 삼황 오제 이야기는 중국 고대의 참고적인 설화에 해당하며, 실제 역사로 인식하는 역사학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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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의 후손들은 한나라 수도 장안이 아닌, 산동성 하택시에 위치한 투국 수도 금성에 살았기 때문에 한나라 조정의 음모, 반란에는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 유씨 공족들과 조정의 모든 사람들은 왕망의 주술을 현혹되어, 왕권 교체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쿠테타라고 인식을 하지 못하였다. 왕망의 난 이후에 유씨 공족들의 반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광무제가 왕망을 진압할 때 투후국에서 반대한 내용이 없으며, 후한이 건국 될때 투후국과 충돌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김일제의 투후국은 중심부는 산동성 하택시이다. 후한 수도 하남성 카이펑은 하남성 개성(카이펑)은 투후국에 속했던 지역으로, 투후국 금성의 서쪽 지역에 해당한다. 투후국은 중국 동부을 관리, 관할하려는 목적이 강했는데, 투후국과 인접한 하남성 개성(카이펑)에 한나라 수도 낙양(개성)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의하면 따르면 김일제 후손들은 한나라의 정치적 불안으로, 투후국을 떠나 요동으로 들어가 번성했다고 한다. 한나라의 정치적 불안정이란 후한의 건국, 수도 이전의 결과로, 투후국의 종결에 관한 부분이다.

위 인용문 역시 독자연구에 해당합니다. 또한 명백한 오류 - (허난 성 카이펑 시를 후한의 수도로 서술) - 를 담고 있는 등 백과사전에 적합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삭제하였습니다.--Xakyntos (토론) 2010년 5월 11일 (화) 10:35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