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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해오는 이야기 ==
== 전해오는 이야기 ==
{{인용문|[[신라]] 말의 문장가이자 학자인 [[경주]] 사량부의 사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전해온다.
매월당 [[김시습]]은 [[신라]] [[내물왕]](17대) ∼ [[눌지왕]](19대) 때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쓴 부도지를 부활시킨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징심록(澄心錄)' 15지(誌)와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선생이 보탠 '금척지(金尺誌)'와 김시습이 보탠 '징심록추기' 등 총 17지(책)를 전하고 있는데 [[부도지]]는 징심록의 제1지에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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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들이 피난해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거처하는 마을을 사탁(沙涿)이나 점탁(漸涿) 등으로 불렀다.” 신라인들의 방언에 탁(涿)을 읽을 때 도(道)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고 쓰고, 량(粱)을 도(道)라고 읽었다. <ref name="조선연나라">단군조선이 멸망하면서 72국으로 흩어져 살았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第一卷, 제1기이(第一紀異) 72국(七十二國), 조선의 유민들이 70여 국으로 나뉘다)의 기록과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서한(西漢)은 조선의 옛 지역에 처음에는 4군을 두었다가 뒤에는 2부를 두었는데, 법령이 점차 번거로워지면서 갈라져 78국으로 나뉘고 각각 1만 호씩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에 의거 연나라에 살던 단군조선의 유민으로 추정된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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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전하길 옛날 진한(辰韓)의 땅에는 6촌(六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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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으로 내려오니,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32)<ref name="노례왕">《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으로 여기서 노례왕(弩禮王)은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신라 유리왕)을 가리킨다. </ref>에 두어져, 급량부(及梁部)라고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 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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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오니, 사량부(沙梁部)(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혹은 탁(涿)이라고 쓰는데,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ref name="조선연나라"/>)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때 설치한 기준이다. 아래의 예도 이와 같다<ref name="삼국유사기록">《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고려시대에 편찬한 사서(史書)이므로 고려 태조때 설치한 기준을 따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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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인데,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구(仇)라고도 쓴다) 처음에 이산(伊山)으로 내려오니(계비산(皆比山)이라도 한다), 점량(漸梁)(탁(涿)이라고도 한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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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라도 쓴다)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오니,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하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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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지금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인데, (촌)장은 기타(祗沱)(지타(只他)이라고도 한다)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하서지(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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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상산(金剛山)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인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旀村)․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육부(六部)의 조상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ref name="노례왕"/>에 비로소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ref name="삼국유사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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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매월당 [[김시습]]은 [[신라]] [[내물왕]](17대) ∼ [[눌지왕]](19대) 때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쓴 부도지를 부활시킨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징심록(澄心錄)' 15지(誌)와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선생이 보탠 '금척지(金尺誌)'와 김시습이 보탠 '징심록추기' 등 총 17지(책)를 전하고 있는데 [[부도지]]는 징심록의 제1지에 있다고 전해진다.


상고사에 대한 저서 중의 하나인 ‘[[부도지]](符都誌)’ 중 ‘징심록 추기’편에서 [[김시습]]은 금척(金尺, 금으로 된 자)이 천부경(天符經)이라는 사상적 배경과, 첫 건국의 바탕이라는 역사적 유래를 갖추고 있는 신비로운 사물이라는 것을 누누이 밝히고 있다.
상고사에 대한 저서 중의 하나인 ‘[[부도지]](符都誌)’ 중 ‘징심록 추기’편에서 [[김시습]]은 금척(金尺, 금으로 된 자)이 천부경(天符經)이라는 사상적 배경과, 첫 건국의 바탕이라는 역사적 유래를 갖추고 있는 신비로운 사물이라는 것을 누누이 밝히고 있다.

2013년 8월 27일 (화) 08:02 판

최치원
최치원 영정
출생857년
경주 사량부
사망미상
가야산 해인사
성별남성
국적신라
별칭자는 고운 또는 해운
학력885년 한림학사
직업학자, 문인

최치원(崔致遠, 857년~?)은 신라 말기의 문장가,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이 《삼국사기》를 통해 남아 있다. 특히 8l자로 구성된 천부경단군의 가르침을 단군의 신하 신지(神志)가 전문(篆文, 전서체의 문자)으로 비석에 새겨 전해오던 것을 최치원이 이를 한자로 번역하여 태백산(묘향산) 꼭대기의 바위에 새긴 경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1] [2]

생애

857년 경주에서 출생했다.

868년(경문왕 8년) 당나라 유학을 떠나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에 과거에 급제, 선주 율수현위(宣州 水縣尉)가 되고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874년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양저우 지방으로 벼슬을 제수받았고 황소의 난 당시 이를 비난하는 토황소격문을 지었다.

884년 음력 10월 귀국했다. 885년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 태산(太山 : 지금의 전북태인)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상소해서 아찬이 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1]

전해오는 이야기

신라 말의 문장가이자 학자인 경주 사량부의 사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전해온다.



“진한(辰韓)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들이 피난해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거처하는 마을을 사탁(沙涿)이나 점탁(漸涿) 등으로 불렀다.” 신라인들의 방언에 탁(涿)을 읽을 때 도(道)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고 쓰고, 량(粱)을 도(道)라고 읽었다. [3]



삼국유사》에 전하길 옛날 진한(辰韓)의 땅에는 6촌(六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인데,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으로 내려오니,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32)[4]에 두어져, 급량부(及梁部)라고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 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속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인데,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오니, 사량부(沙梁部)(량(梁)은 도(道)라고 읽는다. 혹은 탁(涿)이라고 쓰는데,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3])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고 하는데, 구량벌(仇良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때 설치한 기준이다. 아래의 예도 이와 같다[5])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인데,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구(仇)라고도 쓴다) 처음에 이산(伊山)으로 내려오니(계비산(皆比山)이라도 한다), 점량(漸梁)(탁(涿)이라고도 한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는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 또는 빙지(氷之)라도 쓴다)인데,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오니,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하는데,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致遠)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후(崔侯, 최치원)의 옛 집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다섯째 금산(金山) 가리촌(加里村)(지금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의 북쪽 산이다)인데, (촌)장은 기타(祗沱)(지타(只他)이라고도 한다)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하서지(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상산(金剛山)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臨川部)인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旀村)․궐곡(闕谷)(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이 육부(六部)의 조상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9년[4]에 비로소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한 여섯 성(姓)을 주었다.[5]

한편 매월당 김시습신라 내물왕(17대) ∼ 눌지왕(19대) 때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쓴 부도지를 부활시킨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징심록(澄心錄)' 15지(誌)와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선생이 보탠 '금척지(金尺誌)'와 김시습이 보탠 '징심록추기' 등 총 17지(책)를 전하고 있는데 부도지는 징심록의 제1지에 있다고 전해진다.

상고사에 대한 저서 중의 하나인 ‘부도지(符都誌)’ 중 ‘징심록 추기’편에서 김시습은 금척(金尺, 금으로 된 자)이 천부경(天符經)이라는 사상적 배경과, 첫 건국의 바탕이라는 역사적 유래를 갖추고 있는 신비로운 사물이라는 것을 누누이 밝히고 있다.

이성계가 꿈속에서 금척을 받고 나라 이름을 단군과 같이 조선으로 했던 것은 단군의 맥을 이어 이 땅에 천부도(天符都)를 건설하려 했던 의도로 해석하고 있다. [1][6]

최치원과 해운대, 양저우 시

최치원은 부산 동백섬 일대의 경관에 반하여 자신의 호 '해운'을 따서 그 지역 지명을 해운대라고 붙였다고 한다. 최치원이 직접 새겼다는 '海雲臺' 석각도 동백섬 절벽 한켠에 남아있다. 이러한 이유로 최치원의 동상과 시비가 동백섬 언덕에 생겼으며, 해운대구와 최치원이 벼슬을 하며 토황소격문을 지었던 양저우시구는 자매결연을 맺게 됐다.[1]

저서

  • 《금체시》
  • 계원필경
  •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
  • 《잡시부》
  • 《중산복궤집》
  • 《오언칠언금체시》
  •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 《부석존자존》
  • 《법장화상전》
  • 《석이성전》
  • 쌍녀분전기

같이 보기

주석

  1. 『국역 고운선생문집』 상·하(고운선생문집편찬회, 1972·1973),『최문창후전집』(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72),「최치원의 역사서술」(조인성,『역사학보』94·95, 1982),「고운 최치원의 사회개혁사상」(최근영,『한국사상』18, 1981),「최고운의 사상과 문학」(양광석,『한국문학론』, 일월서각, 1981),「최치원연구」(최경숙,『부산사학』5, 1981),「고운 최치원의 사상연구」(김복순,『사총』24, 1980) 참조
  2. 유동식 (1997).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연세대학교출판부. 64/376쪽. ISBN 9788971414231. 
  3. 단군조선이 멸망하면서 72국으로 흩어져 살았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第一卷, 제1기이(第一紀異) 72국(七十二國), 조선의 유민들이 70여 국으로 나뉘다)의 기록과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서한(西漢)은 조선의 옛 지역에 처음에는 4군을 두었다가 뒤에는 2부를 두었는데, 법령이 점차 번거로워지면서 갈라져 78국으로 나뉘고 각각 1만 호씩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에 의거 연나라에 살던 단군조선의 유민으로 추정된다.
  4.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으로 여기서 노례왕(弩禮王)은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신라 유리왕)을 가리킨다.
  5.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고려시대에 편찬한 사서(史書)이므로 고려 태조때 설치한 기준을 따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6. “한국차의 신화학 다시쓰기, 매월당 초암차 일본으로 건너가”. 세계일보. 2013년 8월 25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