툰쿠 압둘 라만
툰쿠 압둘 라만
Tunku Abdul Rahman | |
말레이시아의 제1대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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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57년 8월 31일~1970년 9월 22일 |
군주 | 투앙쿠 압둘 라만 |
후임 | 압둘 라자크 후세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03년 2월 8일 |
출생지 | 시암 크다주 알로르스타르 |
사망일 | 1990년 12월 6일 | (87세)
사망지 |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
국적 | 말레이시아 |
학력 | 성 캐서린 대학교 |
정당 |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
배우자 | 샤리파흐 로지아흐 알위 바락바흐 |
자녀 | 8명 |
종교 | 이슬람교 |
툰쿠 압둘 라만(말레이어: Tunku Abdul Rahman, 자위문자로 تونكو عبد الرحمن ڤوترا الحاج ابن سلطان عبد الحميد حليم شاه)은 말레이시아의 초대 총리이다. 본명은 툰쿠 압둘 라만 푸트라 알 하지 이브니 알마르훔 술탄 압둘 하미드 할림 샤흐(Tunku Abdul Rahman Putra Al-Haj ibni Almarhum Sultan Abdul Hamid Halim Shah)이다. 줄여서 툰쿠라고 불리며, 말레이시아가 독립한 직후 집권하였다. 종종 말레이시아 독립의 아버지(말레이어: Bapa Kemerdekaan), 또는 말레이시아의 아버지(말레이어: Bapa Malaysia)로 불린다. 1957년 독립 후 초대 총리에 취임했으며 1970년까지 그 직에 있었다.
1903년 알로르스타르에서 압둘 하마드 할림 샤흐와 체 만잘라라(본명 누엥 논타나코른)의 자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1] 16세에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하였으며[2] 영국의 통치 하의 사회에서 농민들이 떠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알게 된 후 독립 운동을 시작했으며,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1950년대 초 다토 온 자파르가 이끌던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에 참여하였고, 그는 차츰 독립 운동의 주도자가 되었다.
1957년 말라야 연방의 독립 이후 초대 총리에 취임했으며, 이어 1959년 총선에서 UMNO가 ⅔를 넘는 의석을 차지해 사실상 일당체제를 구축했다. 말레이인 인종주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인종의 평등을 주장했으며, 이에 말레이인들의 반발을 사자 말레이인 우대로 전환했다. 한편 1963년 싱가포르, 사바, 사라왁을 편입해 말레이시아를 출범시켰으나, 1965년 싱가포르가 인종 문제로 탈퇴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다. 그는 인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69년 5·13사건이 터지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됐고, 계엄령을 선포한 뒤 절대적인 독재자가 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총선에서 UMNO는 참패하였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총리직을 사퇴했다.
그는 신생한 싱가포르와 자주 충돌하여 싱가포르가 결국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되게 했으며 '말레이시아 말레이인'을 옹호함으로써 비판을 받았다.
약력
[편집]툰쿠 압둘 라만은 1903년 2월 8일, 말레이시아의 알로르스타르에서 태어났다.[3] 툰쿠는 압둘 하미드 할림 샤흐(Abdul Hamid Halim Shah)와 체 만잘라라(เนื่อง นนทนาคร, 본명은 누엥 난다나코른) 사이에서 태어난 12명의 자녀 중 7번째였다. 그의 아버지는 술탄이었다(훗날 국왕이 된다).[4]
16세에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하였으며[5] 영국에서의 취직이 계속 실패하자 모국으로 돌아왔다. 말레이시아를 돌아볼 기회를 가지던 그는, 사회에서 농민들이 떠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알게된다.
독립을 향하여
[편집]1934년에 패당의 관료가 된 그는 치수 공사에 전념하고 정부에 관련 자금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는 첫째 아들을 얻은지 얼마되지 않아 첫 번째 아내 메리암 총(Meriam Chong)이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일에 열중했으며 습지에서 생겨나는 모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나갔다. 곧, 정부에서 자금이 조달되었고 업무를 본인의 주도로 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브리튼 치하에 있던 말레이시아에서 그는 유일한 말레이인이였으며, 말레이인들의 처지를 정성으로 대했기 때문에 그는 종종 브리튼 관리와 다툴 수 밖에 없었다. 식민치하에서 자의적으로 일할 수 없던 중, 영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하기로 하였지만, 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중단하고 모국으로 돌아왔다. 일제 치하에서 운 좋게도 귀족으로서 대접받아, 핍박은 피할 수 있었으나 그는 자국민들을 구하는데 최선을 다하였고 종전 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완수하고 돌아온다.
그때는 민족주의가 왕왕하던 시기였는데 다토 온 자파르가 이끄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이 그 민족주의 움직임의 중심에서,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있었다. 툰쿠는 바로 그 조직에 소속하기로 하였고 후에 크다주 지부의 장을 거쳐 조직의 최고 지휘자로 선출된다.
1954년에 툰쿠는 독립을 위해 영국을 방문하지만, 무성과로 귀국하고 만다. 동년에 선거를 통해 툰쿠는 초대 국회의장이 되었고, 1955년에 재차 협상을 위해 영국으로 출국하여 성과를 가지고 귀국, 2년 후인 1957년 8월 31일에 독립을 선언한다.[6]
독립
[편집]라만은 1954년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위해 영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지만, 거부당하고 만다. 1955년 총선에서 UMNO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 해 영국에 다시 사절단을 파견하였고, 1957년 8월 31일을 말레이시아 독립의 날로 지정하였다.
1957년 8월 31일, 유니언 잭(영국의 국기)가 내려지고 잘루르 그밀랑(말레이시아의 국기)가 올려진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기뻐하였고, 압둘 라만은 이렇게 외쳤다.
“ | Merdeka! Merdeka! Merdeka!(독립! 독립! 독립!) | ” |
— 툰쿠 압둘 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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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기록되었으며, 말레이시아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총리
[편집]1957년 8월 31일 독립과 함께, 총리로 임명되었다. 군주(양디-페르투안 아공)로는 투앙쿠 압둘 라만(Tuanku Abdul Rahman)이 임명되었다(재직 중이던 1960년 별세하였다).
말라야 연방은 1963년 말레이시아로 개편되지만, 그는 계속 총리로 재직하였다. 1959년 총선(독립된 나라의 첫 총선)과 1964년 총선에서도 UMNO는 압승을 거두었으며, 라만은 이에 따라 장기 집권에 성공한다.
그의 삶에 있어, 말레이시아의 개편은 최고의 성과와도 같았다. 1961년 싱가포르에서 강연했을 당시, 싱가포르, 브루나이, 사라왁, 사바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1963년, 브루나이를 제외한 보르네오 섬 북부의 지역들이 말레이시아에 통합하였고, '말레이시아'로 개편된다.
민족 간의 대립
[편집]하지만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던 그가 언제나 칭찬받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는 민족 간의 대립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가 되던 곳이 바로 싱가포르였다. 한때는 말레이시아의 일원이었지만, 지금은 독립국이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민족 구성은 크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싱가포르만 놓고 보면 중국계가 말레이계보다 훨씬 많지만, 말레이시아 전체를 놓고 보면 말레이계가 중국계보다 많았기 때문이었다(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의 일원이었으니 전체를 놓고 봐야 할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입장에서, 이는 정말로 신경이 쓰이는 문제였다. 정치적, 군사적 등 국방에 관한 것의 대부분을 말레이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경제에 관한 것의 대부분은 중국인들이 장악하였기 때문이다(실제로 말레이시아 부유층의 대부분은 중국인들이다). 정부 정책은 말레이인들을 우대했음에도 생활 수준은 이런 식이니, 말레이인들은 불만이 컸을 것이다. 물론 싱가포르의 지도자 리콴유도 불만을 갖고 있었다.
말레이인들 중 극우 성향을 갖은 민족주의자, 파시스트들은 이슬람교 축제 일만 되면 폭동을 일으켜, 두 민족 간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라만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리콴유는 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계이며 무슬림이 아닌 리콴유는 말레이인들과 무슬림을 옹호하는 라만의 제안에 응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리콴유는 중국계도 말레이 원주민과 같은 말레이인임을 주장했다). 그러니 UMNO와 MCA의 입장에서는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PAP)이 굉장히 신경쓰였다. 라만이 3선에 성공한 1964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1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날이 갈 수록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간의 갈등은 커졌고, 라만은 "말레이시아 정부에 그 어떠한 충성도 하지 않는 것들과는 당장 헤어지자"며, 1965년 싱가포르를 자국에서 추방시켰다. 싱가포르의 관점에서 보면, 원치 않은 독립이나 다름없었다.
몰락
[편집]1965년 싱가포르를 추방시킨 라만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민족 간의 대립이 해결될 리가 없었다.
1969년, 라만은 완전히 몰락하고야 말았다. 그해 5월 13일 민족 간의 불화로 인해 대참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일명 5·13 사건). 이로 인해 라만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더욱이 UMNO 내에서 조차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여파로 1969년 총선에서 UMNO는 많은 의석을 잃게 되었고, 그 책임으로 1970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후임 총리로는, 라만 정권 하에서 부총리를 지낸, 압둘 라자크 후세인(Abdul Razak Hussein)이 임명된다.
죽음
[편집]1990년 12월 6일, 압둘 라만은 쿠알라룸푸르(KL)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7] 향년 87세. 그의 시신은 알로르스타르의 랑가르 로얄 마우솔레움에 매장되었다. 마하티르 빈 모하맛 총리의 비서실장이었던 툰 아흐마드 사르지(Tun Ahmad Sarji)는 압둘 라만의 마지막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마하티르는, 사르지에게 라만의 죽음을 전 세계에 알리라고 했다.
각주
[편집]- ↑ Biography.com. “Tunku Abdul Rahman biography”. 2012년 5월 5일에 확인함.
- ↑ Biography.com. “Tunku Abdul Rahman biography”. 2012년 5월 5일에 확인함.
- ↑ Biography.com. “Tunku Abdul Rahman biography”. 2012년 5월 5일에 확인함.
- ↑ Biography.com. “Tunku Abdul Rahman biography”. 2012년 5월 5일에 확인함.
- ↑ Biography.com. “Tunku Abdul Rahman biography”. 2012년 5월 5일에 확인함.
- ↑ Biography.com. “Tunku Abdul Rahman biography”. 2012년 5월 5일에 확인함.
- ↑ Biography.com. “Tunku Abdul Rahman biography”. 2012년 5월 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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