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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양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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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양씨
濟州梁氏
나라한국
관향제주특별자치도
시조양을나(良乙那)
중시조양순(梁洵)
주요 인물양팽손, 양산보, 양유성, 양응정, 양산숙, 양한묵, 양기탁, 양주동, 양회경, 양회수, 양재봉, 양달승, 양정규, 양영식, 양영태, 양삼승, 양동관, 양승숙, 양형일, 양회문, 양창수, 양종수, 양향자, 양석조
인구(2015년)142,211명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제주도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탐라(耽羅) 개국군왕(開國郡王) 양을나(良乙那)이다.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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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세 신인(神人) 중의 한 명인 양을나(良乙那)를 시조로 한다. 《고려사(高麗史)》 고기(古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1]

태초(太初)에 사람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로부터 솟아 나왔다. 맏이는 양을나(良乙那), 그 다음을 고을나(高乙那), 셋째는 부을나(夫乙那)라고 했는데 세 사람은 수렵을 하면서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 어느날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 한 사람이 따라와 있었다.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와 구독(駒犢; 망아지와 송아지 등 가축)과 오곡(五穀)의 종자가 있었다. 사자(使者)가 "우리는 일본국(日本國)의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세 왕녀를 낳고 말하기를 「서해(西海)의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내려와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구나」 하고는 저에게 분부하여 세 딸을 모시고 여기에 오도록 한 것입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루십시오."라고 말한 후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순서에 따라 세 여자를 나누어 아내로 삼고서, 샘이 달고 땅이 비옥한 곳으로 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점치고는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였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였으며,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였다. 처음으로 오곡을 파종하고 가축을 길러 나날이 부유하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

15대손에 형제 세 사람이 신라에 조회하니 왕이 큰아들을 성주(星主)라 부르고, 둘째 아들을 왕자(王子)라 불렀으며, 막내아들을 도내(都內)라 불렀다. 읍호(邑號)는 탐라(耽羅)라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왔을 때 처음 탐진에 정박하였기 때문이다. 각기 보개(寶盖)와 의대(衣帶)를 하사하고 돌려보냈다. 자손이 번성하면서 고(高)씨가 성주(星主)가 되고, 양(良)씨가 왕자(王子)가 되며, 부(夫)씨가 도상(徒上)이 되었다. 후에 양(良)을 양(梁)으로 고쳤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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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개국군왕(耽羅開國郡王) 양을나(良乙那)의 후손인 양탕(良宕)이 559년(진흥왕 20년) 신라에 사신으로 예방하여 양(梁)씨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중시조 양순(梁洵)이 682년(신문왕 2)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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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보숭 (梁保崇) ▶ 유격공파 (遊擊公派)
  • 양구미 (梁龜美) ▶ 성주공파 (星主公派)

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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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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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 구한(九韓)을 열거하였는데 탁라(乇羅)가 네 번째에 있다. 476년에 백제 문주왕(文周王)이 탐라국(耽羅國) 사자(使者)에게 은솔(恩率)이란 벼슬을 주었다. 백제가 망하니, 661년(문무왕 원년) 탐라 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하였다. 1105년(고려 숙종 10년) 탁라를 탐라군(耽羅郡)으로 개칭하였다.[2] 1416년(조선 태종 16년) 제주목(濟州牧)이 설치되어 전라도에 속했다. 1946년 제주도(濟州道)로 승격하였고,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로 승격되었다.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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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급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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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양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명, 무과 급제자 20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양계벽(梁季璧) 양덕하(梁德厦) 양덕호(梁德浩) 양만용(梁曼容) 양봉래(梁鳳來) 양상기(梁相器) 양석관(梁奭觀) 양응정(梁應鼎) 양응정(梁應鼎) 양응태(梁應台) 양일위(梁日煒) 양정명(梁井明) 양진손(梁震孫) 양팽손(梁彭孫)

무과

양경하(梁擎厦) 양기만(梁起萬) 양덕윤(梁德胤) 양명웅(梁命雄) 양봉명(梁奉命) 양사숙(梁士淑) 양성표(梁聖表) 양시계(梁時啓) 양시흥(梁始興) 양심(梁沁) 양우급(梁禹及) 양운(梁澐) 양유성(梁有成) 양응정(梁應禎) 양응지(梁應池) 양응홍(梁應泓) 양익기(梁益沂) 양익표(梁益標) 양중욱(梁重郁) 양홍발(梁弘發)

생원시

양거안(梁居安) 양거웅(梁居雄) 양견석(梁堅石) 양달명(梁達溟) 양만용(梁曼容) 양산룡(梁山龍) 양상우(梁相瑀) 양수중(梁守中) 양응정(梁應鼎) 양응태(梁應台) 양진남(梁軫南) 양찬진(梁燦晉) 양천지(梁千至) 양천회(梁千會) 양택지(梁擇之) 양팽손(梁彭孫)

진사시

양경지(梁敬之) 양규호(梁圭浩) 양만용(梁曼容) 양명린(梁命麟) 양몽우(梁夢禹) 양우철(梁禹轍) 양위남(梁渭南) 양진영(梁進永) 양천운(梁千運) 양천장(梁千章) 양치남(梁致南) 양학연(梁學淵) 양회익(梁會益)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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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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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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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133,355명
  • 2015년 142,211명

양고부 서열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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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양씨, 제주 고씨, 제주 부씨 3성 순서는 고서마다 달리 표기됐다. 1281년 《삼국유사》, 1451년 《고려사》, 1454년(단종 2년) 《세종실록지리지》, 1484년 《동국통감(東國通鑑)》, 《탐라기년》에는 양고부(良高夫) 순으로 쓰여 있지만, 영주지와 탐라지는 '고양부'로 쓰고 있다.

1484년(성종 15년) 간행된 동국통감은 長曰良(장왈양)이라 하고 長爲良說(장위양설)이 굳어졌다. 1654년(효종4년)에 이원진(李元鎭) 목사(牧使)도 삼성혈조(三姓穴條)에 良高夫(양고부)라고 썼고, 1703년(숙종 29년)에 이형상(李衡祥) 목사(牧使) 역시 삼성사(三姓祠) 상량문(上樑門)에 양고부(良高夫)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순위를 정함에 있어서 삼성신인 강생(三姓神人 降生)의 사적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한 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 5년(1771)에 고한준(高漢俊) 등이 主上(주상)께 주청하는 상소문에도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또한 李丙燾(이병도)著의 韓國史(한국사)에도 良高夫(양고부), 金泰能(김태능)著의 濟州島史論攷(제주도사논고)에도 良高夫(양고부)라 했으며 國史大事典(국사대사전)·한국사대사전 등에도 良高夫(양고부)라고 기록하였으며, 玄容駿(현용준)著 「濟州島神記(제주도신기)」에도 良高夫(양고부)라 수록되어 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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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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