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철
문영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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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본명 | 문운경(文雲耕) → 문영철(文泳澈) |
출생 | 1915년 7월 25일 일제강점기 경성부 종로 |
사망 | 1950년 9월 8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천군 전투지 (현재의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천시 전투 유적지) | (35세)
사인 | 북의 공산당의 인민군의 총(총포)에 맞아 사망.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단성 |
직업 | 국제권투사범, 권투계의 대사부, 대한민국 무급별동대 특수부대총사령관, 조선팔도극장협회 총회장(명치좌, 시공관, 현재의 명동예술극장 등), 언론기업인, 항일 독립운동가, 반공 청년 우익 활동가 |
학력 | 고졸(고보졸업) |
종교 | 개신교 |
키 | 188cm |
활동 정보 | |
활동 기간 | 1927년~1950년 |
경력 | 조선팔도 극장연합회 총회장 |
문영철(한국 한자: 文泳澈, 본명: 문운경, 본명 한자: 文雲耕, 1915년 7월 25일~1950년 9월 8일)은 대한민국의 우익 관련 사회 운동가이자 권투인이었다. 배우자로는 기독교 신자인 아내가 있었으며, 자녀로는 외동 아들 문수영(슬하 무녀독남)이 있었다.
그는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장쑤 성 상하이(上海)와 광둥 성 광저우(廣州)에서 조선인 권투 선수 등으로 활약을 한, 일제 시대의 항일 독립운동가 출신의, 대한민국의 제1공화국 시절의 반공 청년 운동가 겸 우익 활동 관련 사회 운동가였었다.
1950년 한국 전쟁에 민간 종군원으로 참전 당시 188cm이자 81kg의 거체였던 이로 알려져 있으며, 어린 시절 농가의 농한기를 맞이한 1922년 11월 10일 을 전후한 시절에 홀홀(忽忽)한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만주에 홀로 건너가, 1924년부터 자신의 이름도 문운경(한국 한자: 文雲耕)에서 문영철(한국 한자: 文泳澈)로 개명까지 하였을뿐더러, 1927년에서부터 이듬해 1928년까지 일제강점기 시대의 만주의 지린(吉林)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출신의 백야 김좌진 장군(白冶 金佐鎭 將軍)의 특사 등으로 활약한 그는, 1928년 상하이로 건너가 권투 선수로 활약을 한 후, 1941년 경성부로 귀국하여 1945년 광복(을유 해방)이 도래한 후에는 미군정 시대부터 의송 김두한(義松 金斗漢)의 친구이자 우군·작전 책사·참모장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5년 8월 15일 을유 해방 후 문영철은, 우남 이승만 대통령(雩南 李承晩 大統領)의 귀국시 미군정 조선 시대의 경기도 김포군에서부터 서울 이화장까지 미군과 함께 많은 부하들을 비롯한, 조선의 팔도 강산의 약2만여명과 더불어 차라리 무급 경호대장으로까지 활동하였다.
지난 1928년에 상하이로 건너갔었던 문영철은 1941년까지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인 청년 시절 상하이 및 광저우 등지에서 권투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그 이후 권투를 접고, 경성부로 귀거의 길을 떠나면서 만주국의 퉁화를 거쳐 함북의 무산과 함남의 혜산과 평남의 평양을 경유하여 1941년 경성부로 귀거한 당시 스물여섯 남짓의 문영철은, 1945년 을유 해방 이후 김두한과 같이 우익 활동 등을 했으며, 1946년에 불교를 이탈함과 동시에, 아내를 따라 기독교로 귀의하였다.[1]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 후 김두한, 김무옥, 김관철 등 이들과 함께 민간 종군원으로, 학도병을 이끌고 1950년 9월 8일, 영천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결국 인민군의 총포에 맞아 향년 36세로 친구 김무옥과 함께 사망(전사)하였다.
문영철이 등장한 작품
[편집]각주
[편집]- ↑ 1950년 6월 25일 문영철 선생은 한국 전쟁 (6,25) 때 참전하였으나 결국 참전하여 전투하던 중, 중공 인민 해방군의 사주를 받은 북한 공산당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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