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정
김원정(金元鼎, ? ~ 1063년)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김인위(金因謂)의 차남이다.
생애
[편집]1034년(덕종 3)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임명되었고[1], 1044년(정종 10) 동북로병마사(東北路兵馬使) 김영기(金令器)가 장주(長州)[2]·정주(定州)[3]·원흥진(元興鎭)[4]에 성을 쌓을 때 우사낭중(右司郞中)으로서 전공을 세웠다.
이에 조정으로 돌아온 후 김영기가 왕에게 청한 덕분에 포상을 받았다.[5]
1049년(문종 3) 예빈경(禮賓卿)·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임명되어 재추의 반열에 올랐으며, 1052년(문종 6) 3월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옮겼다가 9월 다시 동지중추원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승진했다가 1054년(문종 8)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나갔으며, 이듬해 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叅知政事)·태자소보(太子少保)로 임명되었다.[6]
1057년(문종 11) 5월 병부(兵部)에서 '군졸을 파견해 양계(兩界)를 방비하자'고 요청하자, 당시 봉책사(封冊使)를 맞이하고 흥왕사(興王寺)의 역사(役事)에 동원되느라 쉬지 못해 피곤해진 군민들에게 물품을 하사해 보낼 것을 청했다.[5]
12월 내사시랑동평장사(內史侍郞同平章事)로 승진했으며, 1060년(문종 14) 수사도(守司徒)가 더해졌다.[6]
이듬해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상주국(上柱國)·태자태보(太子太保)로 승진했으나, 또 그 이듬해 개경(開京)에서 서경(西京)의 일을 감독하면서 올린 보고가 왕의 뜻에 거슬려 한 달여만에 파직되었고,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로 나갔다.
그러나 곧 소환되었으며, 1063년(문종 17) 수태위(守太尉)·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진했으나 얼마 후 졸했다.[5]
가족 관계
[편집]- 증조 - 김인윤(金仁允)[7] : 삼한공신(三韓功臣)